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찬비 Oct 12. 2021

자살 유가족에게 남겨진 것들

아빠가 죽고 정신건강의학과를 찾아가기까지는 15년이 걸렸다. 12살 때부터 계속된 자살충동이 우울증 때문이라는 것을 몰랐다. 옥상을 보면 뛰어내리는 상상을 하고, 확실하게 죽는 방법을 고민하는 것이 자살 충동이라는 것은 심리상담을 받으면서 깨달았다.


살을 하고 싶었던 이유는 죄책감이었다. 사람들은 아빠가 죽자 그 이유를 남은 가족들에게서 찾으려 했다. 살아 있는 아빠는 주폭이었는데, 죽은 아빠는 사람들의 입을 통해 마음 여린 사람으로 만들어졌다.


아빠는 항상 엄마를 때렸다. 그럼에도 엄마는 자식들에게 아빠가 필요할 거란 생각으로 18년이란 시간을 맞으며 버텼다. 엄마가 도망쳐야겠다는 생각을 한 건 아빠가 큰언니를 때리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언니는 우리보다 크다는 이유로 아빠의 폭력에 쉽게 노출되었다. 언니는 친구들과 교회에 가려다 술 취한 아빠에게 목졸림을 당해 죽을 뻔한 적도 있었다. 아무 잘못도 없는 언니의 목에는 아빠의 손아귀가 남긴 빨간 흔적이 남아 있었다. 어떤 때는 밖에서 기분 나쁜 일을 겪은 아빠가 혼자 방에서 음악을 듣고 있는 언니를 붙잡아  패기 했다.


아빠의 폭력이 무서웠던 우리 세자매술 취한 아빠가 엄마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동안 몰래 방에 숨었다. 그리고 손을 벌벌 떨며 112에 전화를 걸었다.

"아빠가 엄마를 죽여요. 제발 빨리 와서 잡아가 주세요."  전화를 끊고두려움과 죄책감서로 부둥켜안은 채  흐느끼며 기도했다. '아빠가 감옥가게 해주세요..' 

하지만 엄마가 피 흘리며 맞을 동안 경찰은 오지 않았다.


아빠가 실컷 폭력을 휘두르고 진정됐을 때쯤 경찰이 도착했다. 그러고는 "가정문제니까 알아서 하세요."라는 말만 남기고 사라졌다. 경찰의 방문다시 화가 난 아빠는 큰언니를 죽일 듯 때리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식칼을 언니 목에 가져다 대며 죽여버린다고 했다. 엄마는 그 모습을 보고 아빠에게서 도망치기로 결심했다.


엄마가 도망칠 결심을 하지 않았더라면 죽은 것은 아빠가 아니라 남은 가족들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엄마의 결단 덕에 살았다.


아빠는 셋째 딸인 나를 유난히 예뻐했다고 한다. 사실 내 기억 속 아빠는 나를 사랑한 모습보다는 뻘건 얼굴로 술을 마시며 엄마를 괴롭히던 모습이 남아 있다. 나는 아빠에게 애교를 잘 부리고 아빠를 잘 따랐다고 하지만 난 아빠가 좋았던 적이 없었다. 항상 무서웠다. 아빠를 따른 건 나의 생존 본능이었다.


그럼에도 아빠가 를 가장 예뻐했다는 말은 나를 힘들게 했다. 마치 '너만 아빠를 안 떠나고 아빠한테 남았으면 아빠는 죽지 않았을지도 몰라'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아빠의 죽음이 힘들었다.


아빠의 죽음은 안 그래도 가난한 집안을 끝없이 영락하게 만들었다. 죽기 전 아빠는 일하지 않고 여기저기서 돈을 빌려 탕진하며 살았다. 아빠가 죽은 후 우리에게 남긴 건 빚뿐이었다. 엄마는 아빠가 남긴 빚을 갚으며 하루하루 지쳐갔다. 근심 가득한 얼굴로 돈 걱정하는 엄마를 볼 때면 죄책감을 느꼈다. '셋째인 내가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아빠 옆에 남았더라면 엄마는 덜 힘들었을 텐데'라는 생각이 계속됐다.


죄책감이 커질수록 자존감은 낮아졌다. 스스로를 가없고 사랑받을 수 없는 인간이라는 생각했다. 나를 드러내고 표현하거나 스스로 선택하고 책임지는 일을 극도로 피했다. "아무거나" "맘대로 해" "그냥"이라는 말로 의견을 대신하 버림받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초등학교 때 시작된 자살 충동은 2~3년을 주기로 찾아와 20대에 정점을 찍었다. 길을 가다 정신건강의학과 간판을 보고 홀린 듯 들어가지 않았으면 이 글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내 인생의 반을 우울이란 감정과 살아왔기에 심한 우울증이란 것을 인지하지 못한 채 '지극히 정상이니 꾀병 부리지 마세요'는 진단이 나오면 어쩌나 걱정할 뿐이었다.


의사 선생님의 "많이 힘드셨겠네요" 한 마디에 폭풍오열을 하며 1시간 가까이 나의 죄에 대해 이야기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병원에서는 진료를 보고 처방을 해주는 것이 위주라 길어야 15분 만에 끝나는 게 보통이다. 1시간에 걸친 긴 상담은 심리상담소에서나 진행하는 것인데 병원에서 진행한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을 것이다.


의사 선생님은 내가 울음을 못 그치자 1시간 동안 나의 곡소리를 들어주셨다. 선생님은 나에게 2주 치 약을 처방해주며 또 와서 울고 가라고 했지만 다시 가지 않았다. 나의 모든 것을 털어놓은 기분에 왠지 부끄럽기도 하고 병원에 가는 것이 귀찮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2주 치 약을 다 먹은 후 약물 복용을 중단하자 우울증은 다시 재발했다. 안에서 계속 곪아 갈 동안, 이것은 나의 기질이라 생각하며 살았다. 3년 후 자살충동과 자살시도가 반복되고서야 다시 병원을 찾았다. 오랜 기간 묵힌 데다 재발이 잦은 우울증이라 치료하는데 오래 걸렸다. 사실 아직도 완전히 완치했다고 말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계속 재발해왔듯이 언젠가 발현될까 봐 무섭기도 하다.


아빠의 자살은 우리 집 사람들에게 가난과 죄책감을 주었다. 죄책감에 주변의 눈치를 살피는 성향이 더해져, 자존감은 낮아지고 마음에는 병 생겼다. 언제나 아빠의 자살은 숨겨야 하는 일이었고, 유가족으로서의 아픔을 바로 인정받아 '힘들었겠네요'라는 말을 듣는 데는 15년이 걸렸다.


우리 가족은 처음부터 정신건강 상담을 받지도, 주변에서 위로를 받지도 못했다. 그래서 20년간  우울증이 이어졌던 걸지도 모르겠다.


많이 힘드셨죠.
아무것도 당신 잘못이 아니에요.



이전 05화 아빠가 자살했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