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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찬비 Oct 20. 2021

1999년 9월 30일

"아빠를 떠나 도망칠 거야. 너네 생각은 어때?"

아빠가 없는 고요한 집에서 엄마는 우리에게 물어봤다. 우리 셋은 한치의 망설임 없이 이곳에서 나가고 싶다고, 제발 같이 데려가 달라고 애원했다.


엄마는 그동안 아빠 몰래 저축한 돈에, 가지고 있던 물건 중 돈 될만한 건 다 팔고, 막내 이모에게 200만원을 지원받아 500만원을 마련했다. 은밀히 막 이모가 사는 곳 근처 반지하 월세집을 알아보고, 이사를 가기 위한 화물트럭을 예약하며 한 달 반 동안 치밀하게 비밀 작전을 수행했다.


1999년 9월 30일.

그날은 나와 작은언니가 다니던 초등학교 운동회 날이었다. 큰언니는 교복을 입고 학교 갈 준비를 했고, 작은언니랑 나는 체육복을 입은 채 김밥을 싸는 엄마 옆에서 김밥을 주워 먹었다. 그리고 아빠가 집을 나서는 순간, 모두 하던 동작을 멈추고 커다란 비닐봉지에 옷가지를 쓸어 담았다.


누군가 눈치채지 못하게 빨리 떠나야 했다. 엄마는 짐을 다 싸면 데리러 갈 테니 운동회 서 놀고 있으라했다. 학교 앞까지 가서 빌라 모퉁이에 숨어 커다란 박에 콩주머니를 던지고 있는 아이들을 보았다. 들어가고 싶었지만 혹시라도 엄마가  두고 갈까 봐, 때문에 아빠한테 들킬까 봐 려워 바로 집으로 돌아왔다.


엄마는 "놀다 오지 그랬어. 데리러 간다니까."라고 말  꼭 필요한 것만 챙기라 했다. 커다란 비닐봉지를 잡고는 가장 먼저 페페와 미미를 담았다. 요요도 챙길까 고민했으나 요요는 자주 안 노니까 챙기지 않았다. 짐을 많이 챙길 수 없다는 엄마의 말에 적은 장난감들 중에서도 특별히 소중한 것들만 하나 하나 골랐다.


화물트럭 아저씨는 "짐 한번 단출하시네."라고 말하고 서울에서 안양으로 출발했다. 그렇게 우리는 그간 우리를 괴롭혔던 공포의 공간을 떠났다. 가는 중에도 혹여나 아빠한테 들킬까 봐 노심초사 했다. 두근대는 가슴은 안양에 도착하고 나서야 진정되었다.


휑한 반지하 집. 그곳에서 우리는 가져온 짐을 풀었다. 있는 것보다 없는 게 더 많은 집이었지만 마음만은 편안했다. 다 같이 신문지를 깔고 짜장면을 먹었, 작은 집을 뛰어다니며 이곳저곳 구경했다.


우리는 아빠가 찾아올 것이 두려워 한동안 학교를 다니지 못했다. 처음에는 학교 안 가고 집에서 노는 게 즐거웠다. 그런데 일주일이 지나자 집에 있는 게 지겨워졌고 점점 학교에 가는 아이들이 부러웠다.


엄마는 여러 학교를 찾아가 울며 애원했다. 사정을 설명하며 아빠가 우리의 새로운 학교를 알 수 없도록 보호해달라고 부탁했다. 그 결과 나랑 작은언니는 집을 나온 지 2주가 지나 다시 학교를 다닐 수 있었다. 학교 가는 길이 그렇게 신날 수가 없었다.


고등학생인 큰언니는 전학이 어려웠다. 언니가 다니던 학교에서 아빠가 소란을 피워서 일수도 있고, 고등학교는 학이 까다로웠을 수도 있다. 오도 가도 못하는 상황으로 어쩔 수 없이 자퇴를 했다가 학교를 다니고자 실업계 고등학교로 재입학했다. 머지않아 자퇴하고 검정고시를 보긴 했지만.


그해 11월 내 생일은  나의 생일 파티이자, 우리 가족의 새 출발을 위한 파티였다. 엄마, 언니들, 이모는 없는 돈을 모아 케이크를 준비하고, 맛있는 음식을 해주고, 깜짝 선물도 주었다. 어려운 형편 때문에 선물 받을 기대를 전혀 안 하고 있다가 가족들이 준비해 준 몽이 인형과 빨간 패딩과 빨간 목도리를 받고는 뛸 듯이 기뻐했다.


얼마 후 함박눈이 내렸다. 우리는 늦은 밤 함박눈을 보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다 같이 두 볼이 빨개지도록 눈을 맞으며 눈밭 속을 뛰어다녔다. 빨개진 얼굴로, 흰 눈과 함께 화기애애 눈사람도 만들고 눈밭에 누워 뒹굴기도 했. 엄마도, 큰언니도, 작은언니도, 나도. 비로소 찾은 마음의 평안너무나 행복했다. 늦었지만 우리에게도 평화는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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