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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찬비 Oct 18. 2021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우리가 구덩이에 빠졌을 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구덩이를 더 파는 일이 아니라 그곳에서 얼른 빠져나오는 일이다.
-영화 <메기> 中


중학교 동창과 오랜만에 만나 수다를 떠는 중 친구가 남편의 폭력에 대해 언급했다.


친구 친구남편은 나이트클럽에서 만났다.  취한 둘은 하룻밤을 보냈을 뿐이었는데 그날 친구임신하고야 말았다. 서로 알게 된 지 하루 만에 한 생명의 엄마, 아빠가 된 둘은 그해 급히 결혼다. 생면부지의 관계에서 백년해로를 약속한 두 남녀는 자주 싸웠 어린아이의 존재는 두 사람을 더욱 지치게 했다. 그리고 고등학교 때 야구선수였다던 친구의 남편은 화가 나면 친구를 때리기 시작했다.


친구의 이야기를 듣고 화가 났다. 지금이라도 이혼하라고, 한 대를 때리면 두대, 세대도 때릴 수 있는 게 사람이니 당장 도망치라고 했다. 흥분하는 나와 달리 친구는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평소에는 다정한데 화날 때만 그러는 거야.."


나는 친구에게 지금까지 하지 않았던 아빠의 가정폭력에 대해 털어놓았다. 친구는 나의 긴 이야기를 조용히 다 들었다. 그리고 내린 친구의 결론은

"아빠 없이 키우는 것보다는 아빠 있는 게 나을 것 같아. 그리고 나 돈도 없고"


가정 폭력은 강도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이다. 어떤 폭행이든 시작은 가벼운 주먹질이다. 순간적으로 화가 나서 약한 여자와 아이에게 주먹을 휘두르는 사람은, 나중엔 아무 이유도 없이 그들에게 칼을 휘두르게 된다.


처음 폭력이 발생했을 때 가볍게 여기지 말고 반드시 적절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 맞설 수 없다면 참는 것이 아니라 도망치기라도 해야 한다. 폭력에서 익숙해지도록 자신을 방치해서도, 폭력을 행하는 사람을 이해하려 해서도 안 된다. 폭력을 자신의 운명이라 체념하고 익숙해하지 말아라. 그곳만 벗어나면 당신은 다른 삶을 살 수 있다.


아빠의 폭력에서 도망칠 용기를 내지 않았다면, 죽은 것은 아빠가 아니라 엄마, 언니들 그리고 나였을 것이다. 육체가 죽었을 수도, 정신이 피폐해져 있었을 수도 있다. 오랜 시간 폭력의 굴레에 있었던 우리는 그 이후로도 계속 상처를 안고 살아왔지만, 살아 있다. 벗어났기에, 도망쳤기에, 살아 있다. 


술에 취해서, 화가 나서, 속상해서. 그 어떠한 도 이유가  수 없다. 그들은 어느 상황에서도 때릴 것이다. 가해자를 고치려 해서도 안 된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가정폭력의 피해자인 당신은 절대로 가정폭력 가해자를 고칠 수 없다. 이미 약자로 낙인 되었으니까. 가정폭력''피해자 당사자가 아니라 사회의 관심, 제도 그리고 법으로 고쳐야 한다.


주변에 폭력을 알리고, 어떻게든 도움을 받아라. 물론 쉽지 않다. 그 과정에서 더 큰 어려움도, 좌절도 겪을 것이다. 그러나 포기해서는 안 된다. 주변에서는 '남의 가정일에 끼어드는 것 아니야'라고 방관해서는 안 된다. 다음날 그 집에서 누군가 죽은 채 발견되어야만 당신의 방관이 얼마나 큰 잘못인지 깨달을 것인가?


아빠와 살았을 때 가난했던 시절과, 아빠가 없을 때 지독하게 가난했던 시절 중에 선택하라면, 나는 천 번이고 만 번이고 후자를 택하겠다. 아빠란 사람은 존재했으나, 사랑은 없었다. 아빠가 들어오는 소리를 듣고 자는 척을 해야했고, 숨소리를 죽이고 벌벌 떨어가며 엄마가 맞는 소리를 들었다. 그렇게 공포의 공간에서 죽어 있었다.


어릴 적 아빠가 나에게 생새우를 먹으라 하자, 아무 말 없이 살아 있는 새우의 머리통을 쳐서 기절시키고 옆구리를 뜯어먹었다. 팔딱팔딱 움직이는 새우가 무서워서 못 먹겠다는 말 한마디 하지 못한 채, 8살 꼬마는 아빠의 말 한마디에 우걱우걱 씹어먹었다. 아빠는 그 모습에 즐거워했다.


폭력으로 굴복된다는 것은 이런 것이다. 무섭다는 말 한마디 하지 못하고, 먹고 싶지 않은 것을 먹고, 하고 싶지 않은 것을 하고, 누군가를 만족시키기 위해 살아가는 것, 그것은 살아 있는 죽음이다. 더 이상 사랑이란 이름으로 폭력을 방치하지 말고, 떠나라. 당신은 소중하다. 그곳을 벗어나야, 당신은 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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