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살 터울 큰언니는 어릴 적부터 나의 자랑거리였다. 친구랑 싸우면 "우리 언니한테 이를 거야"라고 말하곤 했는데, 그 속에는 '고등학생인 우리 언니 보면 못 까불걸'이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었다.
큰언니는 평범한 고딩이었지만 쪼꼬만 초등학교 저학년들에게는 무서운 존재가 되기에 충분했다. 놀이터에서 친구랑 놀다가도 멀리서 교복 입고 하교하는 큰언니가 보이면 달려가 친구들에게 "우리 언니야"라고 자랑했다. 언니는 나의 방패이자 무기였다.
언니는 인문계 고등학교에서 IQ가 높아 따로 상담받은 적이 있을 정도로 머리가 좋았다. 그러나 아빠의 폭력을 피해 도망치면서 실업계 고등학교로 전학가야 했다. 친부가 자녀의 학적 변동사항을 조회할 수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우리가 떠난 후 아빠는 큰언니가 다니던 고등학교 안까지 들어가 언니를 찾아 헤매었다. 친구에게 그 사실을 전해 들은 언니는 아빠에게 붙잡혀 끌려갈까 봐 벌벌 떨었다. 원래 다니던 학교를 다닐 수도, 아빠가 학적 변동 사항 조회하는 것을 막으면서 새로운 학교로 전학을 갈 수도 없었던 언니는 결국 학교를 자퇴했다.
엄마는 딸이 중졸로 남을까 봐 여기저기 찾아가 재입학을 알아봤지만, 자퇴 후 남은 선택지는 얼마 없었다. 힘들게 찾은 학교가 전국의 문제아들이 최후로 선택하는 곳인지는 언니가 입학하고서야 알게 됐다. 언니는 학교를 다닐 수 있게 됐지만 학교에 있는 아이들이 무서워 다시 학교를 그만두었다.
아빠와 살 땐 엄마와 언니는 눈물로 맺은 동맹군이었는데, 아빠에게서 벗어나자 동맹이 깨진 듯했다. 언니는 용돈을 직접 벌어 갖고 싶은 것도 사고 친구들과도 어울렸다. 다른 집이라면 손 벌리지 않고 스스로 해결한다고 칭찬받을 일이었다. 그러나 우리 집은 평범하지 않은 집이었다. 43살의 젊은 과부가 모든 것을 포기하며 일만 해도 네 식구가 연명하는 집이었다.
엄마는 큰언니와 집안을 꾸려가길 바랐고 큰언니는 평범한 딸이고 싶었다. 그러기에 큰언니가 아르바이트를 하고 '용돈'으로 사용하는 것이 엄마는 야속했고 언니는 서운했다.
큰언니는 대학을 성적 대신 돈을 염두해 지원해야 했다. 먹고사는데 급급했던 엄마는 교육에 문외한이었다. 언니에게 공부를 열심히 해서 성공하라는 말 대신, 돈이 없으니 4년제 수도권 국립대 말고 2년제 전문대에 가라고 이야기했다.
언니는 지독한 가난에 수긍했고 원서비조차 아까워 지원도 못 해봤는데 이 일을 지금까지도 서운해한다. 자신의 젊은 시절의 모든 선택은 항상 엄마의 첫 번째 시행착오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작은언니랑 내가 대학을 갈 때는 엄마의 생각이 바뀌었으니까.
대학생이 된 후 큰언니는 술을 마시기 시작했는데 이때 엄마와의 갈등이 최고조였다. 엄마는 "네 아빠가 그렇게 마셔대던 술을 마셔?" 라며 언니를 원망했다. 나 역시 술을 마시는 언니를 보며 아빠가 떠올라 미웠다.
술 마시는 대학생. 참 평범한 것인데. 그때 우리 가족에겐 평범함조차 '감히 네가?'라는 말이 덧붙여져야 하는 사치이자 아픔이었다.
큰언니는 학비를 벌고자 밤낮없이 아르바이트했다. 학문을 배운다기보다는 학비와 투쟁하는 생활이었다. 그러면서도 부족한 용돈을 쪼개 우리를 챙겨주었다. 언니는 월급날이면 아웃백, 피자헛, 미스터피자에 우리를 자주 데려가 주문하는 방법부터 먹는 방법까지 세세히 알려주었다. 만약 언니의 가르침이 없었다면, 나는 친구들과 처음 아웃백에 간 날 잔뜩 주눅 들었을 것이다.
언니가 내 친구들까지 데려가 미스터피자에서 피자랑 샐러드바를 사준 적도 있었는데 친구들이 "너네 언니 짱이다"라는 말에 기분이 좋아 어깨를 들썩이며 '우리 언니 짱이지?'라는 눈빛으로 친구들 앞에서 우쭐댄 적도 있다. 친구들에게 피자를 사주는 언니가 그렇게 멋있을 수가 없었다.
하루는 큰언니가 <태극기 휘날리며> 영화를 보고 오더니 작은언니랑 나에게 편지를 썼다. 언니는 영화를 보며 우리가 생각나 많이 울었다고 했다. 언니가 진태(장동건)였어도 우리를 위해 살고 죽었을 거라고 했다. 그리고 긴 편지를 통해 우리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말해줬다.
언니는 지금도 서른이 넘은 동생들이 속상한 일을 겪고 언니 앞에서 하소연이라도 하면 "어디서 미친 것들이 감히!" 라며 크게 화를 낸다. 또 누군가 우리에게 서운하게 대하는 모습을 목격하면 "진짜 화나네. 내 동생한테 왜 그래요?"라고 톡 쏘아붙인다
글을 쓰다 큰언니에게 카톡으로 '언니가 <태극기 휘날리며> 보고 써준 편지가 기억났어'라고 보냈는데 언니한테서 '근데 지금은 하하 형제(조카) 있어서 그때의 그 감동 너네한테 못줌. 내 새끼가 중요해짐'이라고 답장이 왔다.
아름답게 글을 마무리하고 있는 도중 받은 카톡이 조금은 당황스럽지만, 지금은 하하 형제의 엄마가 된 언니이지만, 그때의 그 감동 못준다는 언니이지만, 언니는 그때도 지금도 항상 이 힘든 세상 속에서 우리를 지켜주는 하나의 큰 버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