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찬비 Oct 18. 2021

엄마의 굽은 등

엄마의 등은 꼬부라진 길처럼 휘었다. 그 시작은 술 취한 아빠한테 맞으면서였다. 아빠에게 말없이 맞고 있던 엄마는 아빠의 폭력이 어린 딸들에게 향하자 아빠에게 대항했. 아빠는 화가 나 냉동실 안에 있던 닭을 꺼내 엄마 등에 내던졌고 엄마의 몸과 마음에는  커다란 피멍이 생겼다. 다음날 술이 깬 아빠는 절룩거리는 엄마에게 미안하다는 말도, 병원비도 건네지 않았다. 그렇게 엄마는 상처를 치료받지 못한  평생을 살아왔.


엄마는 아빠의 폭력으로 눈이 새까맣게 멍든 상태에서도 아빠를 미워하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지금은 아빠를 원수로 여기지 않고 불쌍히 여긴다, 너네도 너네를 위해 아비를 원수로 여기진 말아라" 처연하게 말하기까지 엄마는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려야 했을까. 


엄마는 자신의 아픔은 잊었지만, 아빠의 따뜻함을 느끼지 못했던 우리를 생각하면 안하다고 한다. 엄마에게 "때린 건 아빠이고, 엄마는 우리 셋을 가정폭력과 죽음의 위협에서 살린 사람이야"라고 대답하지만, 엄마는 눈물만 흘린다. 남편과 따뜻한 대화는커녕 가벼운 일상 대화조차 해보지 못한 엄마는 그저 우리가 안쓰러울 뿐이다.

 

아빠가 죽은 후 엄마는 처참한 상황 속에서도 우리를 먹여 살리기 위해 처절하게 일해야 했다. 가난했지만, 풍족하지는 못했지만, 엄마는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해 우리를 보살피려고 노력했다. 그러고도 더 해주지 못해 항상 미안함과 죄책감을 품고 살아왔다.


어릴 때는 우리 집이 가난해서, 평범한 것들도 할 수 없는 상황에 서러웠다. '우리집이 평범하기만 했어도 나는 지금 보다 나았을 거야'라고 원망한 적도 많았다. 지친 몸으로도 쉬지 않고 우리를 위해 고군분투했던 엄마에게 나는 왜 이리 가혹했던 것인가.


엄마는 밤을 새우 일하면서매일 새벽 기도회에 나가 우리를 위해 기도했다. 아침 6시  집으로 돌아와 총총거리며 우리가 먹을 밥을 짓고, 8시에 공장으로 출근하는 생활을 365일 계속했다. 엄마는 휴가도 주말도 없이 우리를 먹여 살리기 위해 부단히 애썼다.


파 반찬 좋아하는 나를 위해 오랜 시간 서서 쪽파를 다듬고 데쳐 고이 접어두었으며, 지각하는 우리를 위해 밥과 멸치볶음을 비벼 김으로 싸서 입에 넣어주곤 했다. 어떻게든 자식새끼들을 굶기지 않으려고, 비싼 반찬은 아니더라도 자식들이 좋아하는 음식을 주려고 끊임없이 노력했다.


엄마는 퇴근 후에도 부업으로 바빴다. 늦은 밤 일감을 잔뜩 받아와서는 들뜬 목소리로 "새학기라 너네 참고서도 사야 할 텐데 잘 됐다. 엄마가 치킨도 사줄게" 라고 말했다. 엄마는 구부정한 자세로 핀셋을 들고 손톱보다 작은 부품에, 그보다 더 작은 철판을 깔고, 손가락 마디 주름만한 나사를 끼우는 작업에 열중했다. 


기계로는 할 수 없는 섬세한 작업이라는 말과는 달리, 부품을 만들어 벌 수 있는 돈은 개당 110원뿐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누구 하나 나서지도 않았을, 힘만 들고 돈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한 푼 한 푼이 소중한 엄마는 리들의 참고서 값이라도 벌고자 그런 일까지 마다하지 않고 집에서도 밤새 일했다.


내가 대학을 갈 즈음엔 엄마가 직장에서 크게 다쳤다. 바쁘게 뛰어다니며 일을 하다가 무릎 연골이 파열된 것이었다. 엄마는 그 일로 10년간 일했던 공장에서 잘렸다. 10년이나 일한 곳에서 받은 퇴직금이라곤 400만 원뿐이었고, 공장에서는 산재 인정을 해주려 하지 않으려 버텼다.


절뚝거리며 고 있는 엄마가 싫었다. 사실은 엄마를 그토록 부려먹고도 엄마를 자른, 그러면서도 퇴직금으로 400만 원밖에 주지 않은, 산재를 해주지 않으려 우기 공장 사장이 사무치게 미웠다. 엄마를 위해 해 줄 수 있는 것이 없는 나 자신도 답답했고, 모든 것이 원망스럽고 절망적이었다.


거대한 세상에 화를 내지 못한 나는, 내 눈앞에 있는 엄마에게 화를 냈다. 가난한 우리집과 아픈 엄마를 보기 싫어서 방학에도 일부러 집에 지 않고 학교 기숙사에 남았다. 엄마는 어떻게든 내 편이 되어주려고 평생을 싸우며 살아온 사람인데 나는 엄마가 나의 도움이 필요할 때 외면했던 것이다.


엄마는 3개월의 재활 후 수술했고 1년 정도 목발을 짚으며 생활했다. 그러면서 엄마의 등은 더욱 굽어졌다. 누구나 보자마자 등이 심하게 었음을 깨달을 수 있을 정도로 휘어졌다. 그래서 엄마의 굽은 등을 보면 죄책감이 다. 엄마의 등은 우리를 위해 아빠와 가난에 맞서  시간대로 굽어 있때문이다.


한때 엄마를 보면 외면하고 싶은 마음이 들어 불편했. 처음엔 이 감정이 엄마에 대한 원망 줄 알았다. 시간이 지나고서야 불편한 마음 근원엔 엄마 희생과 사랑에 대한 감사함과, 그 큰 사랑에 엄마처럼 보답하지 못하는 나 자신에 대한 죄책감이 있단 걸 알게 되었다.


가 아프면 진심으로 마음 아파하고 슬퍼하는 우리 엄마. 자신의 아픔보다 자식들이 겪었던 아픔을 지금까지 잊지 못하고 울먹이는 우리 엄마. 엄마는 항상 자신의 모든 것을 다해 우리에게 최선을 다했고, 지금도 우리를 끔찍이 사랑한다.


우리가 받은 것들이 최고는 아니었더라도 그 안에 있는 지극히 큰 사랑 덕분에 우리는 바르게 자랐다. 부족함에 슬퍼하기보다는, 미안한 마음에 불편해하기보다는, 할 수 있는 만큼 사랑하 마음의 표현을 숨기지 않고 살고자 한다. 항상 고마운 존재인 우리 엄마, 엄마에게 사랑을 담아 이 글을 바칩니다.


엄마도 소녀일 때가
엄마도 나만할 때가
엄마도 아리따웠던 때가 있었겠지

그 모든 걸 다 버리고
세상에서 가장 강한 존재
엄마,
엄마로 산다는 것은

-이설아 <엄마로 산다는 것은> 가사 中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