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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찬비 Oct 16. 2021

극복하는 중입니다

우울증 재발과 치료에 대하여

털 달린 짐승들은 두렵고 낯선 대상을 만나면 털을 곧추세운다. 그것은 반감에 대한 노골적인 표현 같아서, 공격 성향으로 비쳐지기 쉽다.

그러나 공격자에게 두려워한다는 사실을 들키면 공격당하게 될 수도 있으므로, 그렇게 털을 곧추세워 자기 몸을 부풀린다. 공격자로부터 자신을 방어하고자 하는 수비 성향인 셈이다.

그것은 그러므로 공포에 대한 반응이다.

- 김소연 <마음사전> 中


경계하는 모습 안에는 두려움이 다. 성인 남성을 바라보는 내가 그러하다. 아빠의 경험과 부재 남성을 보면 경계하는 반응을 만들었다. 어릴 적 가족들에게 폭행을 일삼는 아빠를 보며 두려움에 떨어야 했다. 아빠는 김치가 매워서 못 먹는 유치원생도 혁대로 때렸다. 아빠가 없으면 손도 대지 않다가, 있을 땐 김치 마니아가 되어야 했다. 항상 아빠의 기분을 살펴야 했고, 아빠의 마음에 드는 행동을 하며 생존했다.


아빠가 죽은 후 나이 많은 남성과 대화한 적이 거의 없었다. 선생님들은 항상 여자였고, 집안에 오빠는 없었다. 남자인 친구들은 있었으나 그들은 친구일 뿐이었고, 선배는 없었다. 어쩌다 친구가 아닌 나보다 나이 많은 남성과 있으면 괜스레 주눅 들곤 했다.


직장인이 되고서야 성인 남성들을 겪었다. 그리고 그  겪음이 지나쳐, 겪었다기보다는 남성 소굴에 들어갔다는 표현이 적절할 것이다. 30여 명이 있는 사무실내 여자는 단 둘이었다. 그 둘 중 대졸 여자는 나 혼자였다. 똑 부러지게 서무 역할을 잘해준 여상 출신 동생만 제외하면 동기도 선배도, 상사도 모두 남자였.


성인 남성으로 둘러싸인 공간에 존재하는 것부터가 힘들었다. 사무실에서 '여자는 결혼하면 퇴사한다'는 말을 하는 사람과, 그 사람의 말을 제지하지 않는 사람들을 라봐야만 했다.

사무실내 몇몇 사람끼리 카톡방을 만들어 야한 사진과 동영상을 공유한다는 이야기와, 사무실에서 들리는 섹드립을 듣고도 불편한 건 나뿐이었다. 작은 공간에서 홀로 철저히 구분되어 있음에 로웠다.


술자리에 데려가 높은 사람의 옆자리에서 술을 따르게 하는 경우도 있었고, 술자리에서 간부가 나의 허벅지를 더듬은 적도 있었다. 남성이 익숙하지 않은 내가 처음 겪은 차별, 문화, 요구에 남성을 더욱 경계하게 되었다. 한 선배는 홀로 경계 태세를 갖추고 있는 나를 못마땅해했다. 그는 나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그렇게 우울증이 다시 시작되었다.


처음에 찾아간 정신건강의학과는 집에서 먼 원이었다. 그때는 길을 가다 무작정 들어간 것이었기에 그곳이 소아정신건강 전문 병원이라는 것은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실내와 놀이방 그리고 어린아이 한 명을 보고 깨달았다. 선생님은 남자였는데, 그때가 내 인생에 처음으로 나이 든 남성에게 위로를 받고 따뜻함을 느낀 순간이었다. 그러나 게으르고, 비겁한 나는 한 번의 방문 후 다시는 가지 않았다. 귀찮고,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제대로 치료를 끝냈어야 했는데 나의 아픔을 방치한 것이었다.


3년 후에는 가까운 곳에 위치한 정신건강의학과를 찾아갔다. 병원을 찾아가면서도 누구나 겪는 슬픔에 유난 떠는  같아 걱정했다. 그 시기 나는 사람들 마주 보 것도 힘들어했다. 그런 내 마음을 아는 듯, 대기공간의 의자는 널찍하게 이어져 있기도 했고, 따로 앉을 수도 있었고, 안 보이는 곳에 혼자 숨어 있을 수도 있었다. 푹신한 의자에 앉아 사람들을 몰래 살펴보았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 지극히 평범해 보이는 그들을 보며 안도했다. 그리고 나처럼 고생하고 있을, 이 공간에 모인 모두가 고통에서 벗어났으면 좋겠다고 생각다.


치료를 받으면서 한순간에 좋아지진 않았다. 나아지기도 하고 심해지기도 했다. 약도 잘 챙겨 먹고 상태도 많이 나아졌다고 생각하다가, 갑자기 불안감에 휩싸여 충동적으로 자살 도구를 찾고 시도하는 나였다. 치료받는 중에도 술을 끊지 못했다. 이때 술을 끊었으면 좀 더 빨리 치료됐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때 나는 끊지 못했다. 요동치는 감정과 파멸의 길에 들어가는 생각에만  빠져있었다. 우울증은 나의 숙명이자 운명이라 여겼다.


남아있는 슬픔과 새로 생긴 슬픔흘려보내는 건 오래 걸렸다. 안에서 찔끔찔끔 빠져나가슬픔폭우처럼 새로 떨어지는 고난들을 겪으며, 차도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의 저주 섞인 예측은 틀렸다. 나는 조금은 느렸으나, 악화되는 듯해 보이기도 했으나, 분명히 나아고 있었다. 약물뿐 아니라 심리건강센터에서 상담도 받기 시작하고, 술도 조금씩 줄여갔다. 시간이 흐르자 점점 잠자기 위해 술을 찾거나, 자기 연민에 빠져 홀로 마시지 않게 되었다.


나는 이제 지난 아픔에 대해 초연히 글로 쓴다. 우울은  숙명이자 기질이라고 여기고 있을 누군가가 있다면 우울의 늪에서도 빠져나올 방법은 있고, 더디더라도 당신은 분명히 나아질 것이라고 응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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