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로는 높이로 존재의 우선순위를 둔다고 한다. 인간은 물건인 차보다 소중하다. 그래서 인도는 차도보다 18cm 높게 위치한다. 차도보다 반층 낮은 곳에는 반지하가 존재한다. 차보다 낮은 위치에서 오래 살아온 나는 돈에 지배되어 살아왔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을 보며 마음이 불편했다. 기택(송강호) 가족의 일이 남일 같지 않아서였다. 창문으로 보이던 사람들의 발, 오줌 누던 강아지와 술 취한 사람들, 창문에 붙어 우리를 구경하던 사람들, 하수구가 넘쳐 집안에서 넘실대던 오수. 곳곳에 퍼진 곰팡이, 몸과 옷에 베인 쿰쿰한 냄새
평범했으면 애초에 겪지 않았을 불행들이 반지하 집에는 풍성했다. 볼일을 볼 때도 누가 볼까 의식해야 했고, 집안에 가득한 오수를 바구니로 퍼 나를 땐 나의 자존감마저 퍼 나르는 기분이었다.
대학생 때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비로소 반지하 집을 탈출해 햇빛을 볼 수 있었다. 기숙사에는 곰팡이도, 바퀴벌레도 없었지만 하루하루가 배고팠다. 명품백은 커녕 허기를 채울 밥값도 부족해 추운 겨울에도 구멍 난 신발을 신고 다녔다.
돈이 없어 학식 대신 편의점에서 끼니를 해결했다. 1500원짜리 삼각김밥이 먹고 싶어도, 2500원짜리 떡볶이가 먹고 싶어도, 내 선택은 언제나 900원짜리 라면이었다. 누군가 옆에서 라면과 삼각김밥을 같이 먹고 있으면 '돈 많은 아이'라고 생각하며 진심으로 부러워했다. 그깟 삼각김밥이 뭐라고.
'커피 한 잔 마시자'는 이야기가 싫었다. 식사를 하고 커피를 마시기보다는 그 돈을 모아 나중에 치킨을 먹고 싶었다. 따뜻한 커피 한 잔에서 오는 여유보다는 배부른 음식이 주는 포만감이 소중했다. 필요한 건 넘쳐났지만 통장 잔고는 항상 부족했기에 초콜릿 하나를 사 먹고도 죄책감을 느꼈다. 십원 단위까지 외우고 있는 통장잔고를 떠올리면 늘 우울했다.
친구가 놀러 가자고 하면 혼자 뾰로통했다. 가고는 싶은데 돈은 없고, 그렇다고 돈 때문에 못 간다는 말을 하고 싶지도 않았기 때문이었다. 친구들이 비싼 장소와 음식을 말할까 봐 노심초사했다. 친구들은 나를 알 수 없는 변덕과 짜증이 많은 아이라고 생각했겠지만, 난 그저 돈 없고 자존감 낮은 아이였다.
나에 대해서도 알 수 없었다. 싼 음식, 싼 곳, 싼 옷. 모든 것은 싼 것만 골랐다. 좋아하는 것들을 사기에는 사지 못한 필수품들이 넘쳐나 취향을 포기했다. 소비는 나쁜 것이라는 생각으로 스스로를 억압하고 옥죄었다.
돈만 부족한 것도 아니었다. 내게는 사랑도 부족했다. 굳이 친구를 제일 친한 친구, 친한 친구, 친구, 아는 사람으로 구분했다. 사람을 좋아하지 않으려 주위를 경계하고 의심했다. 그러면서도 누군가 내게 관심과 애정을 주면 홀라당 마음을 다 주고 집착했다. 옆에 사람이 없으면 외로웠고, 있어도 잃을까 두려웠다.
누군가 호의를 베풀면 갚아야 한다는 생각에 불편했다. 사람들의 행동을 일일이 계산했고, 손해 보지도 덜 주지도 않으려 노력했다. 남에게 무엇인가를 줄 경제적 여유도, 감사히 받을 마음의 여유도 없었던 것이다.
직장생활을 하며 지갑이 두둑해졌어도 가난이 남긴 습성은 지속됐다. 월급의 반이상을 저축하고도 자책했으며 갖고 싶은 것을 사고도 후회했다. 필요한 것들을 살 수는 있었으나 여전히 싼 것만 골랐다. 사람들과 있을 땐 비싼 음식도 먹고 좋은 것을 즐기기도 했지만, 혼자 있을 때면 자신을 향해 다시 인색해졌다.
돈 대신 나를 위해 선택하는 것과 여유로운 마음을 지니는 것은 아직도 연습 중이다.
못난이 사과를 집다가 1000원 더 비싼 예쁜 사과를 고르고, 대용량 콩나물을 집다가 300원 더 비싸고 양이 적은 유기농 콩나물을 샀다. 지금껏 1000원과 300원을 아끼기 위해 나를 홀대해왔다는 것을 반성한다.
카톡에 떠있는 친구의 생일을 보고는 오랜만에 연락해 생일 축하한다고 말해본다. 반갑게 받아주는 친구를 보며 적은 노력으로 누군가에게 기쁨을 주고 내 마음도 따뜻해질 수도 있음을 깨닫는다
허기를 채우는 음식보다는, 마음을 채우는 따뜻한 차 한 잔을 마시며, 오늘 하루 돈 대신 나를 위해 살기로 다짐한다. 옹졸한 마음을 버리고, 세상을 너그럽게 바라보기를 연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