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산슬’‘지미유’ ‘유야호’는‘유재석’이라는 한 사람의 부캐이다.‘부캐’란 본래와는 다른 이름, 콘셉트, 세계관을 지닌 새로운 캐릭터를 뜻한다. 지금은부캐시대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연예계 뿐 아니라 일반인 사이에서도부캐열풍이 일고 있다.
내게도회사원이라는 본캐 외 부캐가 있다. 아마추어 수영선수 ‘물찬제비’와 작가 ‘찬비’이다.회사원으로 일하며생계를 유지한다면, ‘물찬제비’는 에너지를 폭발시켜 삶의 활력을 얻고, ‘찬비’는 글을 쓰며 상처 입은 마음을 치유하고 있다. 세 캐릭터는 모두 다 참 소중한 ‘나’라는 존재이다.
수영을 시작하기 전엔 회사원이라는 정체성에만 얽매었다. ‘나’라는 세상이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회사’라는 세계에 나라는 미물이 있었다. 회사에서는내재된 욕망과 감정을 숨겼다.그러다보면 이따금 아무도 없는 곳에서 크게 소리를 지르고 싶을정도로 회사란 곳은 여러모로 참 답답했다.
정숙하고 얌전한 척, 이성적이고 똑똑한 척, 회사에 맞는 사람인 척.그렇게 척만 하며 살다 보니 어느덧 ‘나’는 없어지고 ‘회사원’이라는 껍질만 남았다. 나중엔사람들의 사소한 말에도 상처 입고 삶 전체가 크게 흔들리기도 했다.
잃어버린 정체성은수영을하며 찾았다. 수영할때 만큼은 억압될 필요가 없었다. 나이 많은사람도, 국가 연구소 임원도, 중견기업 사장도, 대기업 센터장도,회사 팀장님까지도. 수영하다 알게 된 사이라면 ‘언니’, ‘아저씨’였다.수영장은계급장을 뗀 자유의 공간이었다.
그래서인지 수영할땐격식 없는 익살꾼이 됐다. 사람들에게“더 빨리 좀!" 이라고 자극하며 놀리기도 하고, "한 바퀴 더!"를 외치며 훈련을 주도하기도 했다. 억눌러 왔던 정체성을 분출하고 좋아하는 활동을 하니즐거웠다. 덕분에 삶의 질도좋아졌다.
수영을 하면서'나'를 인정하게 되었다. 마른 상체에 근육질 하체는 콤플렉스였다. 원푸드 다이어트, 디톡스 다이어트, 스트레칭 등 여러 시도에도 하체는 변하지 않았다. 옷을 입을 땐 하체를 가리는데 급급했고, 살을 빼야 한다는 강박도 있었다.
생각이 변한 건 하체 근육이 발차기에 유리하다는 것을 알고서였다. 킥판 잡고 발차기만 하는데도 다른 사람들의 자유형보다 빨랐다. 하체 근육이 좋으니 전반적으로 속도도 빠르고 쉽게지치지도 않았다.그제야 근육은 몸에 좋은 것인데사람들의 눈에 맞춰 살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더 이상 근육질 하체는 콤플렉스가 아니라,나의 상징이자 보물이 되었다.
물찬제비: 제비가 물위를날으며 아래로 쏜살같이 내려가 물을 한모금 마신뒤 물을 발로 힘껏 뒤로 젖히고 공중으로 날아오르는 모습을 사람의 모양새에 비유한 순우리말
'직장인'와 '물찬제비'의 삶은 다르기에 소중하다
낮에는블루라이트 차단 안경을 끼고 구부정하게 앉아 키보드만 두드려대지만, 거칠게 접영 할 때면 꽤 멋있다. 팀장님 앞에서 쭈굴쭈굴 눈치보지만, ‘MASTERS’ 수모를 쓰고 위풍당당 걸을 때면 누구보다 당차다. 일할 땐 맥없이점심시간과 퇴근시간만기다리지만, 수영할 땐쉬는 시간조차 쉬는 시간까지 꽉 채워정신없이 수영한다.
회사원으로만 살았다면 알 수 없었던 나의멋있고 당당하고 열정적인모습을 깨닫고,나를 사랑하게 된다.
'물찬제비'라는부캐가 생긴 후 또 다른 세상도열렸다. 작가 ‘찬비’이다. '찬비'는사보에 수영 에세이를 쓰려다 탄생했다. 사보 원고를 2회까지 작성했을 때 써둔 글이 아까워 ‘브런치’에 작가 신청을 했는데 작가가 되었다.
'찬비'는 수영할 때의 행복을 쓰며 나타났지만, 점점 내면의상처와우울에 대해서도파고들었다. '찬비'가 금기되었던 상처에 대해 글을 쓰면서심연의 아픔이 떠올랐다. 그리고나는 비로소 자유를 얻었다.
아리스토텔레스도 여러가지를 부캐를 가지고 있었다. 철학가이자, 선생이자, 작가이자, 예술가였던그는 여러 방면에 세계관을 두며 풍족한 캐릭터와 사고로살았다. 어쩌면부캐는근래 반짝유행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살면서 자기 자신을 깨닫고 행복하게 사는데 꼭 필요한 요소일지도 모르겠다.
평생직장을 꿈꾸는 이도, 제2의 삶을 꿈꾸는 이도, 그저 버티며 살아 가는 이도.부캐를 통해 숨어있는나의 정체성을 찾고, '나' 그대로를 온전히 받아들이고사랑하며, 세상을 넓게즐기길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