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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찬스 Oct 03. 2020

사랑하려면 백석

백석 시집을 필사하기로 했습니다. 작년 새해 다짐이었죠. 호기롭게 1일 1필사를 다짐했지만, 마지막 시를 필사한 건 한 해가 훌쩍 지나, 올해 여름이었습니다. 뿌듯한 일입니다만 조금 아픈 일이기도 합니다. 사랑시로 시작해서 인생시로  끝나는 마지막 필사까지의 호흡이 좀 와닿기도 해서 입니다.


필사 첫 시는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였습니다. 단연 제일 좋아하는 시입니다.

19년 1월에 시작한 필사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 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가 아니올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가난한 내가’. 시작하는 첫행을 읽을 때는 이따금 목소리가 떨리기도 합니다. 가진  없어서  차오르던 어쩔  없는 마음. 시의  구절의 세상은 근사합니다. 그곳에선 추워서 내리는  대신 '내가 나타샤를 사랑해서' 내리는 , 그래야만 내리는 눈이 있는 세상입니다.  내가 쓸쓸하면 나타샤는 언제   옆에 와서 속삭입니다. 세상한테 지는  아니라 세상 따윈 더러워 버려 내고 눈이 쌓인 산골로 떠나 마가리에 살자고요. 저는 그런 나타샤를 만났더래서 그런지  좋아했습니다. 온전하게 읽을  있는 몇 안되는 입니다. 축복같은 시기도 하고요. 그래서 시집의 순서와 상관없이  시를  시로 필사했습니다. 그 한 번의 사랑과 이 시로 제 마음은 오랫동안 포근한 골짜기였습니다.


마지막 필사 시는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이라는 시입니다. 분명 10대에 교과서에서 정말 자주 보던 시입니다. 수능을 준비하던 때는  번이고 '분석'했을텐데, 딱히 마음을 울린 적은 없었어요.


그랬던 시가 올해 7월이 느닷없이 찾아와 또 다른 감동이 되기도 했습니다.미친 듯이 비가 내려, 도시가 잠겼고, 아직 못다 죽은 벌레가  하늘을 웠던 이상한 그 달에  기운을 받아선지 저도 느닷없는 이별을 했습니다. 그리고 팔월의 첫째 , 우연인지 미뤘던 필사를 찾았고 그 때 딱 마주한 백석이 ‘남신의주’의 쪽방에서 쓴 이 시였던 것입니다.


이리하여 나는 이 습내 나는 춥고, 누긋한 방에서
낮이나 밤이나 나는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같이 생각하며...(중략)...
또 문밖에 나가디두 않구 자리에 누워서,
나는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 연하여 쌔김질하는 것이었다


어찌 그리 닮았는지. 눈물이 고이는 것이나, 한 없이 부끄러워지는 것이나, 어리석음에 자책하다가 또 성당이나 절을 찾는 것이나, 참 많이 닮아서 제가 시 속에 사는 것 같았습니다.


시에선 시간이 지나 마음에 앙금이 가라앉는다고 하는데, 저는  ‘앙금이란   닿았습니다. 여러 날이 지나도 차마 사라지지는 않고, 되려 차분해져서  무거워진 앙금. 저도 차분해질수록 뭔가 뭉친 것이 가슴을 지그시 누르고 있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마디마디를 읽을 때마다 먹먹하고 무거웠습니다.


내 어지러운 마음에는 슬픔이며, 한탄이며, 가라앉을 것은 차츰 앙금이 되어 가라앉고
외로운 생각만이 드는 때쯤 해서는...(중략)...
어니 먼 산 뒷 옆에 바우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
어두어 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고갤 들어 나무  그루가 떠오릅니다.  드물다는 갈매나무.  적도 들은 적도 없지만, 아주 선명하게 나무  그루가 그려졌습니다. 굵고 튼튼한 모습이 아니라, 바람에 가늘게 가까스로 버티고 서있는 그런 나무였어요. 거친 설산에 앙상한 나무 하나. 그렇지만 그 굳센 모양이 얼마나 눈에 선하게 그려지던지. 검게 삭아, 아직  떨어지지 않은 잎새까지 그림자가 가슴에 남습니다.

일러스트 이철원

 편의 시를 그나마 제대로 읽어내는   년의 호흡이 걸렸습니다. 그런 깊이와 길이로 읽어야  하나가 읽히는구나 생각합니다. 호흡이 깊고  만큼 저는 그 세상은 포근하게 남아있습니다. 사랑으로 채웠던  모든 자리가  오래 아픔일 테지만 언젠간 삶으로 채워졌으면 합니다.


그래서 참 시가 좋습니다. 또렷해서 더 아픈 것.

시가 아니었으면 제대로 사랑도 못해보고 시가 아니었으면  어느 낭떠러지에서 뒹굴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백석  하나에 사랑과 삶이 담겨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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