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석 시집을 필사하기로 했습니다. 작년 새해 다짐이었죠. 호기롭게 1일 1필사를 다짐했지만, 마지막 시를 필사한 건 한 해가 훌쩍 지나, 올해 여름이었습니다. 뿌듯한 일입니다만 조금 아픈 일이기도 합니다. 사랑시로 시작해서 인생시로 끝나는 마지막 필사까지의 호흡이 좀 와닿기도 해서 입니다.
필사 첫 시는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였습니다. 단연 제일 좋아하는 시입니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 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가 아니올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가난한 내가’.로 시작하는 첫행을 읽을 때는 이따금 목소리가 떨리기도 합니다. 가진 게 없어서 더 차오르던 어쩔 수 없는 마음. 시의 첫 구절의 세상은 근사합니다. 그곳에선 추워서 내리는 눈 대신 '내가 나타샤를 사랑해서' 내리는 눈, 그래야만 내리는 눈이 있는 세상입니다. 내가 쓸쓸하면 나타샤는 언제 또 내 옆에 와서 속삭입니다. 세상한테 지는 게 아니라 세상 따윈 더러워 버려 내고 눈이 쌓인 산골로 떠나 마가리에 살자고요. 저는 그런 나타샤를 만났더래서 그런지 참 좋아했습니다. 온전하게 읽을 수 있는 몇 안되는 시입니다. 축복같은 시기도 하고요. 그래서 시집의 순서와 상관없이 그 시를 첫 시로 필사했습니다. 그 한 번의 사랑과 이 시로 제 마음은 오랫동안 포근한 골짜기였습니다.
마지막 필사 시는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이라는 시입니다. 분명 10대에 교과서에서 정말 자주 보던 시입니다. 수능을 준비하던 때는 몇 번이고 '분석'했을텐데, 딱히 마음을 울린 적은 없었어요.
그랬던 시가 올해 7월이 느닷없이 찾아와 또 다른 감동이 되기도 했습니다.미친 듯이 비가 내려, 도시가 잠겼고, 아직 못다 죽은 벌레가 온 하늘을 메웠던 이상한 그 달에 그 기운을 받아선지 저도 느닷없는 이별을 했습니다. 그리고 팔월의 첫째 날, 우연인지 미뤘던 필사를 찾았고 그 때 딱 마주한 백석이 ‘남신의주’의 쪽방에서 쓴 이 시였던 것입니다.
이리하여 나는 이 습내 나는 춥고, 누긋한 방에서
낮이나 밤이나 나는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같이 생각하며...(중략)...
또 문밖에 나가디두 않구 자리에 누워서,
나는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 연하여 쌔김질하는 것이었다
어찌 그리 닮았는지. 눈물이 고이는 것이나, 한 없이 부끄러워지는 것이나, 어리석음에 자책하다가 또 성당이나 절을 찾는 것이나, 참 많이 닮아서 제가 시 속에 사는 것 같았습니다.
시에선 시간이 지나 마음에 앙금이 가라앉는다고 하는데, 저는 이 ‘앙금’이란 게 와 닿았습니다. 여러 날이 지나도 차마 사라지지는 않고, 되려 차분해져서 더 무거워진 앙금. 저도 차분해질수록 뭔가 뭉친 것이 가슴을 지그시 누르고 있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마디마디를 읽을 때마다 먹먹하고 무거웠습니다.
내 어지러운 마음에는 슬픔이며, 한탄이며, 가라앉을 것은 차츰 앙금이 되어 가라앉고
외로운 생각만이 드는 때쯤 해서는...(중략)...
어니 먼 산 뒷 옆에 바우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
어두어 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고갤 들어 나무 한 그루가 떠오릅니다. 그 드물다는 갈매나무.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지만, 아주 선명하게 나무 한 그루가 그려졌습니다. 굵고 튼튼한 모습이 아니라, 바람에 가늘게 가까스로 버티고 서있는 그런 나무였어요. 거친 설산에 앙상한 나무 하나. 그렇지만 그 굳센 모양이 얼마나 눈에 선하게 그려지던지. 검게 삭아, 아직 다 떨어지지 않은 잎새까지 그림자가 가슴에 남습니다.
두 편의 시를 그나마 제대로 읽어내는 데 몇 년의 호흡이 걸렸습니다. 그런 깊이와 길이로 읽어야 시 하나가 읽히는구나 생각합니다. 호흡이 깊고 긴 만큼 저는 그 세상은 포근하게 남아있습니다. 사랑으로 채웠던 그 모든 자리가 더 오래 아픔일 테지만 언젠간 삶으로 채워졌으면 합니다.
그래서 참 시가 좋습니다. 또렷해서 더 아픈 것.
시가 아니었으면 제대로 사랑도 못해보고 시가 아니었으면 또 어느 낭떠러지에서 뒹굴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백석 시 하나에 사랑과 삶이 담겨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