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누구도 내게 요구하지 않았던
작가가 되기 위해서 보이지 않는 자격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왔다. 상위권 대학 관련 학과를 나와 공모전에 연이어 입상을 하는 코스, 어릴 적부터 글쓰기에 남다른 재능을 보여 넌 커서 작가가 될 것 같다고 남들이 먼저 창창한 미래를 예견하여 그 길을 가게 되는 코스, 방송국이나 출판사에서 일을 하다가 우연한 기회로 책을 출판하게 되어 작가가 되는 코스, 이외에도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여러 가지 코스가 있을 것이다. 아무리 애써도, 나는 그 어떤 코스에도 해당되지 않는 기분이다. 이름만 대면 알만한 대학을 졸업하지도 않았고, 글쓰기에 천부적인 재능을 지니지도 않았고, 우연한 기회도 찾아오지 않았던 내게 흥미로운 레퍼토리는 때로는 절실하게 갖고 싶은 경험이었다.
어느 누구도 그런 코스가 있어야 된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럴듯한 레퍼토리를 가지고 있어야 된다고 강요하지 않았다. 작가가 되기 위해서 ‘작가 자격증’을 취득해야 된다고 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런 것들을 가지고 싶었다. 내가 글을 쓰는 건 내 선택이기 이전에 운명이었다는 증거를 보란 듯이 내놓고 싶었다.
어린 시절부터 책을 좋아해서 닥치는 대로 무엇이든 읽었다고 말할 수 있다면, 부모님이 책을 좋아해서 환경적인 영향으로 나도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었다고 너스레를 떨 수 있다면, 고전문학과 유명한 작가의 소설에 깊은 공감과 존경을 표한다고 진심으로 말할 수 있다면, 그럴 수 있다면 나는 좀 더 작가처럼 보일 수 있을까?
역시 나는 그럴 수가 없었다.
어린 시절 집에는 책 보다 빈 술병과 재떨이에 짤막하게 버려진 담배꽁초가 더 많았고, 부모님은 책보다는 드라마나 뉴스 시청에 많은 시간을 쏟는 사람이었고, 나는 문학적으로 높이 평가받는 글들보다 쉽게 읽히는 글들이 좋았고, 지금도 여전히 그런 편이다.
누군가 내게 어떻게 작가가 되었냐고 묻는다면 나는 어떤 대답을 할 수 있을까? 레퍼토리가 약하다는 생각이 들지만 무슨 수를 써도 대답을 그럴듯하게 바꿀 수는 없을 것 같다. 다만 한 가지는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마음에 너무 많은 것들을 담고 있어서요.
꾸준히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알았다. 내성적인 인간으로 살아오면서 내뱉지 못한 말들이 잊힌 게 아니라 마음속 어딘가에 켜켜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마음에 너무 많은 것을 담고 있는 나의 삶은 도저히 산뜻해질 수 없을 얼굴을 하고 있었다. 마음에 담아놓은 것들을 쓰기 시작하면서 몸이 가벼워지기 시작했다. 그 누구도 내게 요구하지 않았던 작가가 되기 위한 자격도 천천히 떨쳐버리고 있다. 그럴듯한 레퍼토리가 없는 나처럼 누군가의 평범한 삶도 특별해져야 한다는 압박감 없이 있는 그대로 괜찮아졌으면 좋겠다.
브런치에서 '제9회 브런치북 출판 프로젝트 응모하기'를 내 글 위에 보란 듯이 올려놓고 있다 해도, 나와 비슷한 삶을 살아가는 누군가에게 그것이 경쟁이 아닌 함께 쓰는 순간들이었으면 좋겠다. 모든 탈락자들의 절망감이 1등의 기쁨을 넘어설 수 없다 해도, 작가이면서 출간한 책 한 권 없는 이상한 작가 타이틀이 많은 순간 나를 흔들리게 한다 해도, 그런 순간을 나 혼자가 아닌 누군가와 함께 이겨내고 있다는 사실을 나는 한 번쯤은 말하고 싶었다.
우리의 과정은 비슷한 결을 가지고 있다고, 경쟁을 피할 수는 없는 상황이라 해도 우리는 꽤 세련된 태도로 그런 순간들을 함께 쓸 수 있다고.
브런치 구독자 수와 통계를 수시로 체크하는 나지만 그것이 나를 아무리 시험에 들게 한다 해도 결국에는 '쓰고 있다'는 사실로 우리는 나 스스로를 증명하면 된다.
이래서 나는 안 되는 거야, 그런 이유들이 항상 '작가'라는 명사 앞에 놓여 있었다. 노크도 해보지도 않고, ‘아무도 없나 보다’ 하고 돌아섰다가 다시 문 앞에서 서서 노크라도 한번 해볼까 망설이는, 그런 태도를 나는 수없이 반복했다. 근래에 인터넷에 떠돌아다니는 글처럼 나도 가능성에 중독된 사람이었던 모양이다. 노크를 하고 들어가 봤는데 내 능력이 생각보다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될까 봐 두려워, 그 상태에 계속 머물러 있는 사람이 나였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을 시작으로 나는 다시 쓰기 시작했다.
글은 누구나 쓸 수 있다. 작가도 누구나 될 수 있다. 그런 자격을 만들어 주는 것은 어떤 코스나 레퍼토리가 아니다. 어쩌면 작가라는 타이틀이 그리 대단한 게 아닐지도 모른다. 지인이 가끔 나를 ‘작가’라고 칭하면 화들짝 놀라면서 ‘나는 아직 그런 사람이 아니야.’라는 분위기로 겸손을 떨지만 속으로는 나는 이미 작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자주 한다.
나는 그냥 작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지금 내 글을 읽고 있는 당신과, 이 순간 무엇이라도 써야겠다고 생각하는 당신과, 내뱉지 못하고 마음에 담아둔 수많은 나의 문장들을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