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 C.S.Lewis -

by 젼정 Oct 04. 2021

'미안해'가 오늘 밤 내게 와 묻는다.

스스로 잘게 부서져 사라진 조각들

"미안하다."


아빠는 종종 그렇게 말했다. 아빠의 미안해는 초라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당당하고, 세련된 미안해였다. 사춘기 시절, 감히 아빠에게 대들지 못하고 눈물이나 질질 짜고 있던 내게 아빠는 사과를 했다. 내가 좀 불쌍해 보였나? 본인이 좀 심했다 싶었나? 목소리가 커서 그런지 남의 말을 잘 듣지 않는, 듣지 않으려 하는 아빠였지 의외로 잘못을 인정하는 태도는 깔끔했다. '미안해'를 듣는 순간만큼은 존중받는 기분이었다. 나의 잘못도, 아빠의 잘못도 그 순간 아주 조금은 증발되었다. 하지 않았으면 좋았을 행동과 말들이 공기 중으로 사라져 가는 것을 느끼면서 나는 흐르는 눈물을 맨손으로 닦아내곤 했다. 


그 순간은 어른이 아이에게 이렇게 사과할 수 있다는 사실을 두 눈으로 확인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물론 그 확인에는 약간의 오류가 있었다. 아빠의 '미안해'가 술기운이 동반되면 진심이 아닌 취어(醉語) 일뿐이라는 사실을 멀지 않은 미래에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해도, 자기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이 제법 괜찮아 보인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잘못된 것을 끝까지 우기기보다는 깔끔하게 인정하는 쪽이 더 낫다는, 단순한 깨달음을 나만 느낀 아니었던 모양이다. 


"누나한테 미안하지."


얼마 전 동생에게 전화가 왔다. 동생은 느닷없이 내게 미안하다고 말했다. 동생의 미안해는 아빠의 미안해와는 좀 달랐다. 평소 내 서운함을 헤아리는 미안해,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대한 미안해, 변명이 없는 미안해였다. 자신의 삶이 늘 먼저일 수밖에 없는, 그럴 수밖에 없는, 그런 순간에 느끼는 힘든 마음을 나는 조금은 안다. 그걸 알면서도 내심 서운해했던 내 마음도 안다. 동생이 내게 미안한 마음을 말하는 순간, 나는 내 마음을 들킨 것 같아 울컥해졌다. 


'나라고 뭐 너에게 미안한 일이 없을까.'


우리는 각자의 삶에 최선을 다할 뿐이라고, 나는 동생의 미안해를 어설프게 위로했다. 정말 동생에게 미안한 일들이 많다. 이제 와서 말하기엔 너무 늦어버린 미안해가 내 아랫입술에 꼭꼭 숨어있다. 어쩌면 너무 쉬운 말들이 우리에게 가장 어려운 말들로 남아 있다. 아빠의 미안해를 들으면서 작고 큰 불편함의 조각들이 공기 중으로 사라진 것처럼, 동생의 미안해를 들으면서 담아두었던 서운함들의 조각들이 창문 너머로 멀어졌다. 캄캄한 밤, 그 조각들은 스스로 잘게 부서져 사라졌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미안해'라는 말을 얼마나 하면서 살아갈까. 마음속으로는 미안하지만 겉으로는 모르는 척 슬쩍 넘어가는 순간들이 더 많은 것 같다. 아빠에게 배운 미안해와 동생에게 들은 미안해가 오늘 밤 내게 와 묻는다. 


미안해, 먼저 말하는 게 낫지 않겠냐고. 


어떤 미안해를 말해야 할지 몰라 나는 고개를 숙인다. 그들의 미안해를 떠올려본다. 그럴 수 있었던 그들의 크나큰 마음을 더 자세히 들여다볼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지금의 나는. 



이전 13화 잊는데 도움이 될 거야
brunch book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돌이킬 수 없는 시절의 우리에게

매거진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