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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젼정 Feb 07. 2022

왜 이렇게 예민해?

폭력적 언어의 발견


“왜 이렇게 예민해?”


이 말이 얼마나 상대에게 폭력적으로 쓰이는지를 나는 자주 경험했다. 내가 잘 맞춰주다가 태도를 바꾸면, 그 결과 자신이 불편해지면 상대는 내게 그런 식으로 공격을 해왔다. 그럴 때마다 나는 나 자신이 미워졌다. 예민하지 않을 방법을 몰라 괴로웠다. 그런 상대가 내게 바라는 것은 싫은 내색을 하지 않고 계속 친절할 것, 자신이 눈치 보게 만들지 말 것 등등, 그런 것들이었다. 그들은 내가 생색내지 않고 베풀었던 호의를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받았다. 그러나 내가 한계를 드러내면 내 예민함을 지적했다. 내가 얼마나 그것을 참아왔는지, 둔감한 척 억지로 웃었는지, 지나간 시간들이 내게 묻는다. 


그들은 내게 말했다. 불편한 것이 있으면 말을 하면 되지 않느냐고, 대화로 풀어갈 수 있는 문제 아니냐고. 그들은 평소 자신의 몫이 아니었던 불편을 처리하기 위해 이성적이고, 이상적인 인간처럼 굴었다. 결국 말하지 않은 내 탓을 하고 있으면서도, 내 걱정을 진심으로 해주는 듯한 뉘앙스를 풍겼다. 

당장 속시원히 말해서 해결하는 방식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시간을 갖고 천천히 풀어가는 방식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 나의 편리를 위해서 그 방식을 상대에게 강요해서는 안 된다. 나는 기분이 나빠지면 입을 닫는다. 같은 일을 겪더라도 내가 느끼는 감정의 강도가 상대보다 세다는 것을 스스로 느끼기 때문이다. 기분이 나쁜 상태에서는 아무 말이나 내키는 대로 내뱉을 게 된다. 그렇게 된다면 계획하지 않았던 상처를 상대에게 주게 된다. 세련된 방식으로 풀어가는 방법은 상대가 원하는 것이다. 나는 그런 방식을 원하지 않는다. 시간이 흘러가면 어떤 감정은 자연스럽게 소멸된다. 물론 완전한 소멸은 아닐지도 모른다. 다만 시간에 의해 누그러져 의외로 부드러워지는 감정도 있다. 누구에게나 자신의 감정을 다루는 방식이 있다. 그 방식은 존중되어야 한다. 




이상적인 대화, 괜찮은 화해, 친절한 설명.

이제 더 이상 우리 사이에 존재하지 않을 것들. 


사실 그 이상적인 방법을 실천하자고 하는 사람조차도 화가 나면 언성부터 높인다. 자신의 기분을 얼굴에 그대로 드러낸다. 그럴 때마다 나는 생각했다. 


'이해는 가지 않지만 분명 이유가 있을 거야.'


자신이 화를 내는 것은 괜찮고, 상대가 화를 내는 것은 참기 힘든가. 자신이 언성을 높이는 것은 자신의 감정이라 괜찮고, 상대가 언성을 높이는 것은 이성적이지 않아서 불편한가. 나는 확실히 알았다. 자신이 불편한 것을 참지 못해 상대를 불편하게 하는 사람들이 쓰는 언어가 무엇인지. 그 언어는 지극히 일상적이면서도 대단히 폭력적이다. 일상적이어서 폭력이지 않다고 착각하게 만든다. 

예민한 감정을 가졌으니 그것을 배려해달라는 것이 아니다. 적어도 나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다고 판단될 때 그런 감정을 드러낸다. 상대가 나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날리는 일상적 언어에 담긴 펀치를 견딜 수 없을 때, 나는 온몸으로 그것을 방어한다. 상대는 내게 계속 그 펀치를 날리고 싶을 것이다. 그래야 속이 시원할 테니 말이다. 예상할 수 없었던 나의 방어를 본 상대는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난 그런 뜻으로 말한 게 아닌데? 네가 오해한 거야."


예전 같으면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그런가?' 생각해봤겠지만 이제 아니다. 나는 그러지 않기로 했다. 불쾌한 말을 습관적으로 계속 배설해놓고, 오해였다라고 말하는 상대에게 친절을 베풀 생각이 전혀 없다. 어떤 이는 상대에게 나의 감정을 말해줘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래야 할까? 생각해 봤지만 그 역시 해줄 마음이 없다. 


"나는 좀 야비한 구석이 있어. 내 감정을 상대에게 알려주지 않는 게 내가 상대에게 하는 일종의 복수야. 친절하게 설명해 주고 싶지 않아."


그 말을 하면서 나는 비로소 솔직해졌다. 이상적인 대답을 한 기분도 들었다. 그날 내 뺨은 울긋불긋했고, 입술은 메말랐고, 눈은 힘을 잔뜩 주느라 지쳤고, 눈꺼풀은 평소와 다르게 무거웠다. 화난 얼굴도, 제멋대로인 마음도, 쉰 목소리도, 전부 엉망이었다. 그럼에도 상대를 위해 거짓말을 하지 않았던, 그 순간이 괜찮게 느껴진다. 

나는 '예민하다'라는 말에 늘 속수무책이었다. 모든 것이 내 잘못처럼 느껴졌다. 내가 예민하지 굴지 않았다면 상대가 불쾌하지 않았을 텐데, 내가 좀 더 나은 사람으로 보일 수 있었을 텐데, 그런 생각부터 들었다. 그런 생각이 들면 여지없이 내 그림자는 작아졌다가 사라져 버리고야 말았다. 이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기분이었다. 나는 언제나 예민했다. 이제 와서 나의 예민함을 이해해 달라는 건 아니다. 오히려 이해하려고 노력했던 건 나였다. 내 예민함이 당신을 배려했다. 내 예민함이 당신이 그 말을 하게 내버려 두었다. 


나를 나의 예민함을 사과할 생각이 전혀 없다. 내 예민함이 배려로 이어질 수 있는 건 나를 코너로 몰기 전까지다. 내가 상대의 마음을 살폈던 건 어디까지나 좋아하기 때문이었다. 좋아하는 마음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지나친 요구와 간섭, 그것을 내가 몰랐던 게 아니다. 나는 느끼고 있었지만 외면했다. 내가 예민해지면 이 관계가 깨질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 사실을 알면서도 나는 뒤돌아보지 않는다. 우리가 함께 쌓아온 시간이 산산조각 나는 것을 지켜볼 생각이다. 

이제 나는 상대가 아닌 나를 먼저 돌볼 생각이다. 때때로 괜찮았던 시간이 내게 와 마음을 건드리기는 하겠지만 그렇지 못했던 시간이 이미 그 시간을 이기고야 말았다. 부서진 시간을 밟고 지나가며 나는 마음의 통증을 느낀다. 우리 관계가 회복되지 않길 바란다. 예민한 내가 했던 세심한 배려를 이제 상대는 받을 수 없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예민하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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