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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젼정 Feb 21. 2022

서가에 부는 바람

책을 좋아했던 순간


도서관 서가에 머무는 공기에서는 온갖 활자의 냄새가 날 것만 같다. 활자는 평면으로 누워있지만 펼치면 언제나 입체가 된다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다. 그 입체의 세계를 만나기 위해 나는 또다시 그곳에 서 있다.


도서관에서 만나는 책은 그 나름대로 매력이 있다. 신중함보다는 호기심을 앞세워 고르기 때문에 부담이 없다. 때로는 제목만 보고 책을 집어 오기도 한다. 그런 책 중에 정말 좋은 책을 만나기라도 하면, 그렇게 만난 책이 마음에 쏙 들키라도 하면 ‘이 책과 나는 지금 만날 운명이었어.’라고 의미를 부여하기도 한다. 정말 그렇다. 운명이라는 건 다양한 방식으로 만남과 헤어짐을 이야기한다. 서가에 꽂힌 책들은 수많은 사람들의 손을 거쳐 자신의 세월을 만들어냈다. 어떤 공간이어도 그곳에 존재해야 했다. 그곳에서 책은 새로운 세상을 만났다. 같은 활자를 제각기 다르게 읽어나가는 사람들의 얼굴을 담담하게 지켜보기도 했다.




서점이 아닌 도서관에서만 느낄 수 있는 특유의 분위기가 있다. 도서관마다 다르기도 한데 나는 이 근처에서는 화도진도서관을 제일 좋아한다. 20년 전쯤 나는 그 동네에 살았다. 집에서 창문을 열면 화도진도서관이 보였다. 당시 대학 생활을 하고 있을 때라 도서관에 꽤 자주 드나들었다. 

화도진도서관 3층 창가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는 순간을 나는 참 좋아했다. 커다란 밤색 책상 위에 책을 몇 권 올려놓고,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마음을 바깥으로 내놓았다. 공원을 마주하고 있는 도서관 창문은 계절까지 읽을 수 있게 해 주었다. 울창하게 큰 나뭇가지가 바람에 살랑거리는 소리를 듣다가 그 바람이 내 뺨에 닿는 순간, 나는 슬그머니 웃곤 했다. 내 뺨에 닿았던 바람은 또 서가의 어느 틈에 숨어들었고, 책들은 볼이 빵빵해지도록 그 바람을 마셨다. 책을 읽어야지 생각하면서도 나는 그런 풍경에 꽤 긴 시간 정신이 팔려 있었다. 

가끔은 도서관에 온 사람들이 무엇을 하나 살펴보기도 했다. 사람들은 기꺼이 자기 자신을 책 안으로 구겨 넣을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안에서 우리는 어디든지 갈 수 있었다. 내가 읽음으로써 생긴 그 세상 속으로 걸어 들어갈 수 있었다. 그곳에서는 우리는 서로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그렇게 자신의 세계를 지켰다. 그 순간을 존중했다. 도서관의 서가에는 외면의 침묵과 내면의 대화가 함께 했다. 침묵할수록 내면은 깊어졌다. 깊어진 내면에 생각이 파고들기 시작하면, 쉴 새 없이 소리를 내어 떠드는 것처럼 에너지가 소진되었다. 소진되는 동시에 또다시 생기는 것도 있었다. 그것은 또 다른 내면이었다. 지금 세계와 이어지는 다른 통로가 펼쳐졌다. 그렇게 새로운 길을 찾을 수 있었다.


그 동네를 떠나고, 나는 책과 많이 멀어졌다. 가까워지는 것이 자연스러웠던 것처럼 멀어지는 삶도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나는 현실에 펼쳐진 세상을 외면할 수 없었다.

 

다시 아이로 인해 도서관에 드나들긴 했지만 그때처럼 여유를 부리기는 힘들었다. 도서관 창문에 새겨진 계절도 세심하게 읽을 수 없었다. 그곳에 시선을 둘 수 있는 순간이 늘 있으리라 생각했었다. 내가 원하면 언제든지 그럴 수 있는 순간이라고도 생각했었다. 마음을 먹으면 그곳에 앉아 있을 수 있겠지만, 그때와 같아질 수 없으리라는 사실을 이제 나는 안다. 도서관 서가의 통로를 돌아다니며 책 제목을 실컷 읽으며 보냈던 시간이 가끔 그리워진다.

화도진도서관 입구에 있는 음료수 자판기, 초록색 의자와 아기자기한 꽃과 나무들, 활자의 냄새, 수많은 사람들이 넘긴 페이지와 서가의 계절이 눈앞에 펼쳐진다. 책을 좋아했던 순간은 그곳에서 시작되었다. 집도, 학교도 아니었다. 그저 화도진도서관 서가였다. 멀어졌지만 다시  순간을 찾을  있었던 이유를 이제야   같다. 올해 봄에는  바람을  마셔봐야겠다. 책이 마신 어느  계절의 바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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