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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젼정 Feb 28. 2022

씹을수록 말랑해지는 캐러멜처럼

부끄러운 글쓰기

나는 글쓰기가 부끄럽다는 생각을 자주 해왔다. 내가 쓰고자 하는 글과 내가 쓰는 글의 격차를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감탄하며 읽었던 문장으로도 나는 쉽게 좌절했다. 이토록 나약할 수가 있나 싶을 정도였다. 그들이 어떻게 그런 문장을 쓸 수 있었는지는 다음 문제였다. 시간이 지나도 내가 그렇게 쓸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우선이었다. 내가 닿지 못할 곳에 내가 가고자 하는 세상이 존재하는 게 아닐까 하는 불안감이 자주 엄습해왔다. 그럴 시간에 더 읽고, 써보는 것이 낫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쉽게 그 감정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부끄럽다고 생각하면서도 이상할 정도로 나는 글쓰기 외에는 하고 싶은 일이 없었다. 나이가 먹으면서 취미는 생겼다. 어릴 때는 그마저도 없었다. 글쓰기를 취미로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카테고리에 글쓰기를 넣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무작정 쓰지도 않았다. 누군가에게 도와 달라고 하지도 않았다. 어떤 방법을 찾지 못한 상태로 나는 그렇게 마음이 또다시 그 자리에 고이는 것을 자주 지켜보았다.

 



삶에 잔잔하게 깔려 있었던 불행이 나를 괜찮은 작가로 만들어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남들이 태어나면서부터 당연히 가진 것들을 가지지 못했다면 거기에 이유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내가 가진 결핍이 결국 잘 쓰게 만들어 줄 것이라고도 기대했다. 내 기대와는 다르게 아빠는 내게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얼굴로 조언하곤 했다. 내게 그 말은 이렇게 들렸다. 


너에게 기대하는 건 없다. 

그저 남들 뒷모습을 보며 따라가라.


내가 받아야 할 기대와 관심을 나는 어디에서 받아야 하는가. 고등학교 진학을 할 때도, 대학을 갈 때도, 아빠는 늘 내게 그런 식으로 말했다. 내가 아빠에게 이렇다 할 과정이나 결과를 보여준 적도 없으니, 때로는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아빠가 나를 객관적으로 봤다고 이해해야 할까. 그렇게 이해하는 척도 해본다. 그러나 부모가 자식에게 아무 기대도 하지 않는 모습을 보이는 건 실례다. 


결혼하기 전에도 나는 글을 쓰고 싶었다. 결혼과 육아를 하면서는 잠시 그 마음을 잊긴 했다. 잊었다고 해야 할지 잠시 잃었다고 해야 할지 망설여진다. 아이를 키우면서는 늘 힘들다고 징징거리기 바빴다. 아이가 어느 정도 크고 나니, 평생 첫사랑을 못 잊는 사람처럼 나는 또 글쓰기를 떠올렸다. 얼마나 다행인가. 글쓰기를 만나고 싶은 건 사회적으로 큰 문제가 되지 않으니 말이다. 남편은 내가 글쓰기를 다시 하고 싶다는 사실을 알아차렸고, 적극적인 지지는 아니었지만 해보라는 뉘앙스를 풍겼다.

보란 듯이 잘하고 싶은 마음과는 별개로 글쓰기는 역시 지지부진한 상태다. 거기에는 글쓰기를 부끄러워하는 내 태도가 한몫한다. 나는 글쓰기를 해야 한다고 내 시간을 요구하지 못했다. 전업주부 업무를 하지 않고 글을 쓰겠다는 것이 아니라 그저 해야 할 일을 끝내면 하겠다고, 그런 말조차 하지 못했다. 그렇게 말하고 나면 대단한 것이라도 써야 하는데 정작 현실은 그렇지 못하니, 대놓고 그 시간을 드러내기가 부끄러웠다. 잠시 노트북을 좀 해야 한다고 하면서 눈치 채지 못하게 글을 쓰면서 나는 자주 작게 쪼그라들었다. 


나에게 기대하기가 어려우니 몰래 가라.


내가 나 스스로에게 이런 벌을 내린 것만 같았다. 무엇이 되기 전에는 작가인 척하지 말라고, 나를 시시때때로 나무라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남편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이기도 했다. 맞벌이를 하면 조금이라도 집안에 보탬이 될 텐데,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계속 사들이는 책 때문에 오히려 지출이 늘었다. 남편은 책을 전혀 읽지 않는 사람이라서 내가 책을 계속 사는 것을 조금 못마땅해한다. 자제해야지 다짐을 하면서도 나는 산 책을 다 읽기도 전에 다른 책을 고르는 일을 반복하고 있다. 일을 하느라고 고생하는 남편 앞에서 글쓰기에 대해 이야기하다 보면 속 편한 이야기나 늘어놓고 있는 게 아닐까, 어떤 날에는 괜히 별 걸 다 말했나 싶어 진다. 

정확한 수치로 내 글쓰기가 나아졌다고 증명할 수도 없고, 당장 공모전에 낼만한 글도 없는 것 같아서 시간이 지날수록 초조해진다. 나는 스스로 마음을 쿡쿡 찌른다. 게다가 최근 내가 쓰는 글이 말랑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서는 좀 혼란스럽기도 하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내가 쓰는 글이 꽤 말랑거리는 편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내가 좋아하는 작가의 글을 읽고 나서 깨달았다. 내가 말랑거리는 글보다 단단하고, 딱딱한 글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내 글을 객관적으로 본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마땅히 물어볼 사람이 없어서 남편에게 내 글의 분위기에 대해서 물어보니, 남편은 이렇게 말했다. 


딱딱한 편이지.


내 글의 민낯은 그랬다. 그럼 난 어떤 글을 써야 하나. 또다시 미궁에 빠졌다. 그래도 나는 내가 쓴 글을, 쓰고 싶어 하는 마음을, 좋아해 보려고 한다. 말랑거리게 쓰지 못한다 해도, 나는 내가 쓸 수 있는 글을 쓰면 되니까. 

마음에 고인 말들을 꺼내 올려놓는다. 말랑거리는 것들을 모아 딱딱하게 만들었다면, 결국 내 글은 씹을수록 말랑해지는 캐러멜처럼 생긴 건 아닐까. 다양한 맛의 캐러멜이 만들어지고 있다. 그게 다 모일 때까지 나는 좀 더 써보려고 한다. 당신에게 방금 만든 딱딱한 캐러멜을 하나 건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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