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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기억의 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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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젼정 Dec 15. 2022

경아의 방

짧은 소설


경아일까. 검정 곱슬머리, 희다 못해 투명한 피부, 앞으로 튀어나온 큰 눈, 꽉 다물고 있는 가는 입술과 콧볼이 둥근 그녀가 경아일까. 수진은 롯데리아 키오스크에 줄을 선 여자의 옆모습을 보고 경아일까, 하며 그녀의 얼굴을 떠올렸다. 잊은 줄만 알았던 경아의 얼굴이, 아득해져 다시는 그릴 수 없을 것 같았던 그 얼굴이 지금 이 순간 등장하기로 약속이나 한 것처럼 선명해졌다. 띵동. 일정하지 않은 간격으로 알림음이 울렸고, 그럴 때마다 사람들은 자신의 손에 들린 번호표를 확인했다. 몇 번의 기계 알림음에도 주문한 사람이 나오지 않으면 그제야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카운터에 서서 쉴 새 없이 주문서를 확인하던 직원이 어색하게 말문을 열었다. 직원은 애타게 불렀다. 주문번호 101번 고객님을. 아무도 그 번호에 반응하지 않았고, 주문 번호는 다음으로 넘어갔다. 포장된 종이봉투는 계산대 위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사물에 표정이 있다면 종이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일지도 모른다고 수진은 생각했다. 경아일지도 모른다고 추측되는 여자는 바깥 날씨를 실내에서도 그대로 느끼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여름 내내 싱그러웠던 나뭇잎을 몽땅 잃어 알몸으로 서 있는 나무처럼 여자는 자신의 팔꿈치를 반대편 손바닥으로 받치고 있었다. 실내에 들어서자마자 달라지는 공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금방 적응했다. 바깥에서 아무리 벌벌 떨고 있었어도 실내에 들어오면 얼마 지나지 않아 대부분 겉옷을 벗고 온몸에 감돌던 긴장감을 덜어냈다. 심지어 덥다고 투덜거리는 투로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경아일까. 수진은 확신할 수 없었다. 확신하면 달라지는 게 있을까. 여자에게 다가가 ‘혹시 경아?’라고 물으며 알은체를 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그럼에도 수진은 그 여자가 경아인지 알고 싶었다. 101번 고객을 마냥 기다리는 종이봉투의 심정도 그러할까.





30년이 넘은 오래된 흙집, 그 집 뒷방에 경아가 살았다. 그 집주인은 수진의 큰아버지였다. 어릴 때부터 수진은 문턱이 닳도록 그 집을 드나들었다. 큰아버지댁에는 할머니가 계셨고, 그런 이유로 모든 친척들은 시도 때도 없이 그곳에 모였다. 수진이 초등학생이었을 적만 해도 그 집은 분명 컸다. 지형이 낮아 푹 들어가 있어 비가 오기라도 하면 큰일이 나지 않을까 걱정스러울 정도였지만 실제로 집은 높은 지대라 큰 문제가 없었다. 수진은 큰아버지댁에 가는 것을 좋아했다. 마당이 있어서 좋았고, 용돈이 생겨서 좋았다. 인사만 잘하면 큰아버지는 주머니에서 흔쾌히 지폐를 꺼냈다. 수진은 그때마다 시상식에서 호명되는 순간 묘한 표정을 짓는 연기자처럼 굴었다. 전혀 몰랐다는 얼굴로 지폐를 공손히 받아 주머니에 챙겼다. 연기자처럼 수상 소감을 말하지 않아도 되는 건 다행이었다. 수진은 집에 도착하기 전까지 주머니에 손을 넣어 지폐가 잘 있는지 수시로 확인했다. 주머니에 지폐를 넣고도, 그 안에 지폐가 있다는 것을 손으로 확인하고도 몇 번이고 그 행동을 되풀이하는 자기 자신을 수진은 이해할 수 없었다. 이해할 수 없었지만 지폐가 생기면 늘 수진은 그렇게 행동했다. 지폐가 책상 두 번째 서랍 안쪽에 있는 철제 필통 안에 도착하기 전까지 수진은 그 행동을 멈출 수 없었다. 필통 안에 넣어둔 지폐는 늘 거기에 있었다. 수진은 거기에 지폐를 넣으면 여간해서 열지 않았다. 수진의 방에 있는 책상 서랍은 잠금장치가 있는 금고처럼 안전했다. 그 누구도 그 필통에 대해 궁금해하지 않았다. 필통은 늘 거기 있었고, 수진은 그것에 대해 의심하지 않았다    


수진은 마당에서 경아와 몇 번 마주쳤다. 경아는 늘 자줏빛이 감도는 잠바를 입었다. 그 잠바는 평소 아이들이 입는 잠바와 어딘가 달랐다. 명랑하고 경쾌한 분위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디자인이었다. 흑백과 맞닿아 있는 자줏빛에는 생기가 없었다. 그와는 달리 경아의 피부는 하얗고 투명했다. 눈은 비현실적으로 컸다. 수진은 경아와 자신이 동갑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큰어머니와 수진의 엄마가 거실에 앉아 커피를 마실 때 하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큰어머니는 믹스커피에 뜨거운 물을 붓고 젓가락으로 휘휘 저으며 그런 말을 했다. 뒷방에 해가 안 들어, 싸게 내놔도 안 나가더니 오죽 어려우면 이사를 왔을까, 가족이 다 선해 보여, 뒷방 집 딸이 수진이랑 동갑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수진이가 열한 살이지, 이따 나오면 인사해봐, 큰어머니는 무슨 비밀 이야기라도 하는 사람처럼 속삭였다. 수진은 자신과 동갑인 그 아이가 궁금했다. 몇 번을 마주치고도 둘은 대화 한마디 나눠보지 못했다.


뒷방에 한두 번 가본 기억이 났다. 작은 부엌이 달린 단칸방, 그곳은 이전에 언니들의 옷방이었다. 그 방 중간에 행거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자매인 언니들은 경쟁하듯이 옷을 사들였고 엄마에게 들키면 혼이 날까 봐 뒷방에 숨겨두기 시작했다. 한 번은 수진보다 네 살 위인 작은 언니와 함께 뒷방에 갔다. 언니는 헹거에 걸린 옷을 확인하다가 화를 내기 시작했다.


“자기한테 맞지도 앉는 옷을 또 입고 나갔네. 하여간 집에 오기만 해 봐.”


수진은 작은 언니의 눈썹이 붉게 변한 것을 확인하며 웃음을 참았다. 작은 언니는 뒷방에서만 말을 세게 했다. 실제로 큰언니가 오면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수진은 잘 알고 있었다. 작은 언니가 작정을 하고 화를 내도 크게 달라지는 건 없었다. 말싸움이 시작되면 작은 언니는 얼마 버티지 못하고 늘 꼬리를 내리고 입을 다물었다. 싸움은 싸움이 되지 못하고 끝이 났다. 그럴 때 난처해진 수진은 눈치를 보다가 작은 언니의 얼굴을 살피곤 했다. 그럴 때마다 작은 언니의 눈썹을 붉은색이었다. 작은 언니는 늘 분해했다. 그러면서도 자존심을 세우지는 못했다. 어느 정도까지만 대들 수 있게 설정이 된 사람처럼 작은 언니는 늘 화를 잘 참았다. 외동인 수진은 그런 자매의 싸움이 낯설었다. 둘의 모습이 시트콤의 한 장면처럼 느껴졌다. 큰언니가 나쁜 말을 하고 자리를 비우면 작은 언니는 푸 소리 냈다. 참았던 숨은 작고 씁쓸한 형태로 방 안에서 흩어졌다. 작은 언니는 수진과 눈이 마주치면 이유도 없이 웃었다. 작은 언니는 그런 사람이었다.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가더라도 금방 내려올 수 있는 사람, 자신보다 어린 수진을 위해 자신의 감정을 뒤로 보내고 씩 웃어주는 사람. 작은 언니는 큰언니 앞에서만 보잘것없는 존재였다.

뒷방에 있던 헹거는 어디로 갔을까. 수진은 그 안에 가전과 가구, 사람 세 명이 들어갈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헹거가 덩그러니 있었던 그 방에 사람이, 그것도 세 사람이 살 거라는 가정은 할 수 없었다. 경아라는 아이가 그 집에 이사 오기 전까지 그 방은 무용한 존재였다. 그 방에 헹거가 있을 때도 옷방이라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쾌쾌한 먼지가 쌓여 오히려 옷 관리에 해가 될 것 같았다. 그 방에서 꺼낸 옷은 마당에서 번번이 어깨를 붙잡혔다. 옷은 공중에서 펄럭였고 오랜 잠에서 깨어났다. 마당 빨랫줄에 걸린 옷은 바깥 구경을 하며 자신의 하루를 기대했다. 수진은 마당 기둥 끝에 놓인 나무 의자에 앉아 그 광경을 지켜보곤 했다. 작은 언니는 카페라테를 닮은 플랫 슈즈를 신고 마당에서 전신 거울을 한참 들여보며 수진에게 말을 걸었다.


“괜찮나. 수진아. 이거 엄청 비싼 구두야. 이거 사고 엄마한테 얼마나 욕먹었는지. 너 오늘 오는 줄 알았으면 약속 안 잡는 건데 말이야. 이건 미리 약속된 거라 안 나갈 수도 없네. 저녁에 갈 거야?”


잘 모르겠다는 수진의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작은 언니는 다른 말을 시작했다.


“간식이라도 사줄까? 하긴 넌 간식 안 좋아하지. 그러니까 그리 말랐지. 우리 집안이 그렇게 살이 찌는 체질은 아니야.”


그럴 때마다 수진은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작은 언니는 가방에서 립스틱을 꺼내 입술에 발랐다. 작은 언니의 입술은 보기 흉하게 붉어졌고, 그 때문인지 구두는 아까와 달리 싸구려처럼 보였다.


“너무 진한가?”


“조금.”


수진이 처음으로 말을 열었다.


“에이, 말하다 보면 지워져. 언니 나간다. 다음에는 미리 연락하고 와.”


작은 언니는 빨랫줄에 걸린 체크무늬 코트를 걸치고 다시 한번 거울 앞에 섰다. 입술이 너무 진한가, 다시 한번 그 말을 했다. 작은 언니의 질문은 늘 자기 자신을 향해 있었다. 상대의 대답을 듣는 척하는 연기에 꽤 능숙해서 눈치채기는 쉽지 않았지만. 작은 언니의 입술을 큰언니가 보기라도 한다면 당장 미용티슈를 던져주며 지우라고 할 게 뻔했다. 그 말을 하는 큰언니의 입술은 더 야했을지라도 둘의 관계는 대체로 그랬다. 큰언니와 작은 언니의 관계는 불평등했다. 그 불평등은 일상적이고 지속적인 탓에 자연스러웠다. 저들의 부모는 불평등한 관계를 자세히 들여다보거나 고쳐주려 하지 않았다. 수진은 자신에게 형제가 없다는 사실에 안도하기도 했다. 자신의 부모가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큰어머니에게 경아가 뒷방에 산다는 비밀을 들은 후부터 수진은 자주 마당에 앉아 있었다. 나무 의자에 걸터앉아 빨랫줄을 보다가 거기에 걸린 구름을 보다가 수돗가 대야를 가득 채운 물에 비친 것들을 바라보았다. 그럴 때마다 ‘경아’로 보이는 아이가, ‘경아’라고 확신할 수밖에 없는 아이가 그 앞을 지나갔다. ‘경아’는 좁은 통로를 지나기 위해 미리 몸을 작게 구겼다. 그러다 곧 다시 거기서 나와 두리번거리다 파란색 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밖으로 나갔으니 한참 있다 오겠구나 생각하고 있으면 경아는 5분도 되지 않아 문을 열고 들어왔다. 달라진 게 뭘까. 수진은 경아 손에 들린 검정 봉지를 찾아냈다. 봉지 사이로 죠리퐁과 뻥이요, 콩나물 대가리가 보였다. 수진은 큰어머니 댁에 올 때마다 경아와 친구가 되는 상상을 했다. 엄마가 큰어머니와 큰소리를 내어 웃을 때마다 나도 경아와 마당에서 그럴 수 있다면 하고 생각했던 것이다. 생각했던 것과 현실은 달랐다. 수진은 경아와 친구가 되고 싶었지만 그렇게 되기 위한 노력을 적극적으로 하지 않았다. 마당에서 경아를 기다리면서도 먼저 말을 걸어 친구가 되는 과정을 시작하지 않고 있었다. 수진은 거기서 자신이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지 조차 몰랐다.


“경아야! 너랑 동갑이야.”


밖에 있는 화장실에 가려고 마당에 나온 큰어머니는 경아를 불러 세워 놓고 말했다.


“둘이 친구 하면 되겠네.”


큰어머니는 그렇게 말해놓고 쇳소리가 나는 화장실 문을 쾅 닫았다. 경아는 어른에게 인사를 하는 것처럼 수진에게 허리를 굽혔다. 수진도 얼떨결에 의자에서 일어나 비슷하게 인사를 했다. 경아의 인사 수준은 수진의 주머니에서 지폐를 꺼내기에 충분할 정도였다.  


“아직도 그러고 있어? 엄마 뭐하고 계셔? 저녁? 심부름했나 보네. 엄마 갖다 주고 마당에서 놀아. 친군데 같이 놀면 좋지.”


큰어머니는 화장실에서 미처 추키지 못한 바지를 고쳐 입으며 경아에게 랩을 하는 것처럼 다다다다 말을 했다. 수진은 큰어머니가 음을 높일 때마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코를 벌렁거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경아의 입가에 미소가 대야에 가득 찬 물에 실수로 떨어진 작은 꽃잎처럼 잔잔하게 머물렀다.


“이게 뭐지?”


경아는 빈손으로 나와 마당에 쭈그리고 앉았다. 혼잣말인지 수진에게 하는 말인지 중얼거리는 소리가 땅바닥에 발을 내딛을 때 볕 사이로 얼굴을 내미는 흙가루처럼 공중에서 희미하게 보였다 사라졌다. 수진은 조심스럽게 경아의 곁으로 다가가 비슷한 자세로 앉았다. 경아는 대야 위에 떨어진 낙엽을 만지고 있었다. 경아는 낙엽에게 묻고 있었던 걸까.


“뭐해?”


수진이 물었다. 경아는 별다른 대답 없이 웃었다. 볕을 받은 경아의 얼굴이 투명하게 빛났다. 동그란 눈, 동그란 콧볼, 동그란 손가락 끝, 동그란 입모양, 수진의 눈에 경아는 작은 구(球) 같아 보였다. 뾰족함이 없는 사람이 있다면, 그 누구도 미워할 수 없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모양이지 않을까. 귓바퀴로 넘겼던 머리카락 몇 가닥 삐져나와 경아의 시야를 가리고 있었다. 이렇게 모아서, 경아는 곁눈질을 하며 그렇게 말했다. 경아는 자신의 발 앞에 모아둔 낙엽을 손바닥으로 다독였다. 살아있는 것을 만지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경아를 수진의 집에 초대한 것은 수진의 엄마였다. 수진의 엄마는 마음 편히 볼일을 보기 위해 경아를 집에 초대했다. 외동딸인 수진을 혼자 집에 두기 불안했다. 친구가 있다면 세네 시간쯤은 무리 없이 보낼 수 있다는 수진 엄마의 생각은 꽤 합리적이고 효율적이었다. 평소 집에 친구를 초대하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던 수진의 소원도 들어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 수진의 엄마는 자신의 계획이 기특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학교 친구나 학원 친구를 부르라는 엄마의 제안에도 수진은 흔들림이 없이 ‘경아’의 이름을 말했다.  


토요일 오후 1시, 수진의 엄마는 경아를 데리고 왔다. 수진의 두 뺨은 미리부터 상기되어 있었다. 경아와 무엇을 할까. 잠자리에 들기 전부터, 아니 엄마가 경아를 초대했다는 말을 들을 직후부터 계속 수진은 그 생각을 그 시간을 생각했다. 큰아버지댁에서 경아와 놀 때 수진은 마당에서, 경아의 부모가 있는 장소에서 놀아야 했다. 놀이가 무르익어 비밀 이야기라도 할라치면 어른들이 나타나 얼굴을 들이밀었다. 어린이들에게 비밀 이야기란 얼마나 중요한가. 수진은 경아와 은밀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마음 깊숙이 숨겨놓았던 기분을 나누고 싶었다. 둘만의 공간에서, 둘만의 언어로. 이제 그럴 수 있는 시간이 왔다. 경아는 현관 앞에 서서 수진을 한참 바라보았다.


“들어와도 돼.”


수진이 꽤 낭만적인 목소리로 말하자 경아는 작고 부드러운 구(球)처럼 웃으며 신발을 벗었다. 수진의 엄마는 과자와 과일, 유부초밥, 오렌지 주스 등을 식탁 위에 올려놓고 수진에게 평소 만지는 것이 아닌 것들에 대해 호기심을 가지지 말 것을 당부했다. 수진은 엄마의 등을 밀며 빨리 나가라고 말했고 수진의 엄마는 소리 내어 웃었다. 그 모습은 자연스럽고 행복해 보였다. 티끌 없이 깔끔하게 정돈된 책상처럼 그들의 행복은 그 순간 완벽했다. 경아는 그 순간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수진은 경아와 둘만 남겨졌다는 그 사실 자체로 한껏 달아올라 있었다. 둘은 눈만 마주쳐도 요란하게 웃었다. 빨간 머리 앤이 다이애나와 단둘이 티파티를 할 때 기분이 이랬을까. 수진은 웃음을 삼키다 체한 사람처럼 몽롱해졌다가 이내 어느 때보다 정신이 맑은 사람처럼 마음이 깨끗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수진은 자신의 장난감을 모조리 꺼내 방바닥에 펼쳐 놓았다. 자랑하려는 의도는 없었다. 늘 가지고 있는 것을 자랑할 필요가 있겠는가. 무엇을 가지고 놀아도 상관없다는 뜻이었다. 경아의 방에는 장난감이 전혀 없었다. 초가을부터 붉고 검은 꽃이 지배하는 극세사 이불이 방 한가운에 펼쳐져 있었다. 그것으로 그 방은 가득 찼다. 더 이상 그 무엇도 거기에 들어설 수 없었다. 수진은 경아의 집이 집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그곳으로 매일 경아가 돌아가야 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수진은 경아가 언제나 거기에 있을 것이라고 상상할 수 없었다. 경아의 엄마는 대체로 졸린 얼굴로 벽이 기대앉아 있었다. 옷 위로 그대로 드러난 뱃살을 이불로 가릴 때도 있었는데 번번이 이불은 뱃살 아래로 내려왔다. 경아의 아빠도 방에 있었다. 경아의 아빠는 세상을 잘 모르는 순진무구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얼굴에 그렇게 쓰여있었다. 수진은 아빠의 얼굴에서 볼 수 없는 면을 경아 아빠의 얼굴에서 발견하곤 했다. 경아의 아빠는 수진이 오면 다정하게 인사를 해주고는 금세 텔레비전 프로그램으로 빨려 들어갔다. 경아와 수진은 나란히 앉아 허벅지 위에 올려놓은 종이에 그림을 그리거나 함께 만화책을 읽었다. 다 읽었어? 넘겨도 될까? 경아가 하는 그 말들은 경아의 아빠와 무척이나 닮아 있었다. 다정함을 보고 배운 사람의 언어가 얼마나 부드러운지 수진은 그때 알았다. 만화책을 한 권, 두 권 읽다 보면 바깥에서 수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집에 가야지, 수진의 엄마 목소리에는 그 다정함의 결이 없었다. 수진아, 집에 가야지. 가끔 경아는 그 말을 따라 했는데 수진의 엄마가 말한 그 문장과는 전혀 다르게 느껴졌다. 아쉬움이 담긴 그 말, 어린이가 어린이에게만 줄 수 있는 사랑보다 큰 우정이 그 문장에 존재함을 수진은 온몸으로 느꼈다. 경아는 문지방을 밟고 수진을 배웅해주었다. 좁은 길을 따라 나오면 수진의 엄마가 보였다.


늘 그렇게 헤어져야 했던 수진과 경아에게 주어진 둘만의 시간과 공간은 그 어떤 것보다 특별했다. 수진의 기분이 한껏 달아오른 것과는 달리 경아의 표정은 목이 마른풀처럼 시들했다. 장난감 하나 없이 히죽거리며 웃었던 둘이었는데 뭐가 잘못된 걸까. 수진은 알 수 없이 불안해졌다. 자꾸 경아의 눈치가 보였다.


"다른 장난감 가져올까?"


"장난감이 또 있어?"


"베란다에 어릴 때 가지고 놀던 게 남아 있어. 플레이 도우 좋아해? 아니면 퍼즐 맞추기? 맥포머스로 같이 기찻길 만들까?"


"어떻게 그런 게 집에 다 있어?"


"생일이나 크리스마스 때 선물 많이 받잖아. 너도……"


수진은 재빨리 말끝을 흐렸다. 경아의 방에 장난감이라고 여길만 한 건 없었다. 알맹이 없이 남겨진 과자 봉지, 텅 빈 막걸리병, 경아의 실내화 가방, 보라색 손톱깎이, 그런 것들이 경아의 방에 있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경아의 방도 아니었다. 경아의 가족이 사는 방이었다. 수진은 자신의 삶이 남들보다 나은 위치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학교나 학원에서 만나는 친구들의 삶은 수진과 비슷해 보였다. 유행에 걸맞은 옷차림과 장난감 하나 정도는 다 가지고 있었다. 그렇지 않은 아이라 해도 그 아이가 어떤 처지에 놓여 있을 거라고 수진은 가늠할 수 없었다. 수진은 그런 나이였다. 자신이 보는 세상 외에 다른 세상에 쉽게 접근할 수 없는, 이해할 수 없는 그런 나이.

경아는 평소와 달리 말이 없었다. 벽시계를 보며 엄마가 돌아올 시간을 체크하며 초조해진 수진은 어떻게라도 경아의 입을 열고 싶었다. 엄마가 오기 전까지 경아와 재미있게 놀고 싶다는 생각, 그것이 수진을 극한의 상황으로 몰아넣고 있었다. 수진은 엄마가 식탁 위에 준비해둔 간식을 방으로 가지고 왔다. 경아는 유부초밥을 손으로 집어먹고 그 손으로 귤을 까서 입에 넣었다. 과즙이 입에 퍼질 때 경아는 평소처럼 잠깐 웃었다. 경아는 소포장된 과자를 가리키며 집에 가져가도 되냐고 물었다. 수진은 다 가져가도 된다고 경아를 안심시켰다. 경아는 과자를 좋아하는 엄마에게 그것을 주고 싶다고 했다. 저런 건 그냥 사 먹으면 되지 않나, 수진은 입 밖으로 낼 수 없는 말을 숨기려다 더 큰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하긴 너네 집에서는 이런 거 안 먹지? 한 번도 못 본 거 같아. 과자를 안 좋아하시나."


경아의 엄마는 과자를 좋아했다. 그래서 늘 바닥에 빈 과자봉지가 굴러다닌 사실을 수진은 진작에 알고 있었다. 알고 있으면서도 말이 왜 그렇게 나왔을까. 애쓰면 애쓸수록 엉망이 되는 분위기를 수진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경아는 대답 없이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우리 비밀 하나씩 말하자!"


경아가 고개를 끄덕이자 수진은 심호흡을 하며 비밀을 꺼낼 준비를 했다. 후, 하, 후, 하. 후, 다음 차례에 수진은 무엇을 말할지 결심했다.


"너 정말 아무한테도 말하면 안 돼. 저기 책상 보이지? 저 책상 두 번째 서랍에 돈이 있어. 돈이 생기면 난 거기에 넣어둬. 나중에 사고 싶은 게 있으면 사려고. 꽤 많이 모았어. 보여줄까?"


자신의 비밀 이야기에 기분이 고조된 수진은 두 번째 서랍을 당기며 비밀을 확인시켜주려 했다. 그것은 너에게 내 모든 걸 보여줄 수 있다는 증거였다. 경아는 괜찮다며 손사래를 쳤다. 그러더니 경아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나는 아빠가 없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자주해. 내가 학교를 갈 때 아빠는 자고 있어. 엄마가 아침 일찍 일을 나갈 때도 아빠는 늘 자고 있어. 내가 학교에서 돌아왔어. 그때도 아빠는 자고 있어. 달라진 건 방에 빈 술병이 생겼다는 것. 엄마가 숨겨둔 내 간식을 아빠가 다 먹어치웠다는 것. 사실 숨겨봤자지. 어디에 숨기겠어? 뻔하지. 아빠가 숨을 쉴 때마다 방에 술냄새가 퍼져. 나는 최대한 아빠와 떨어져 앉아 텔레비전을 봐. 그래도 아빠는 계속 자고 있어. 텔레비전도 지겨워지면 마당으로 나가. 마당 수돗가에서 나는 혼자 놀아. 운이 좋은 날에는 너를 만나. 너랑 놀다 보면 나는 다 잊어. 내가 다시 집으로 돌아가야 된다는 사실도, 너를 언제 다시 만날지 전혀 모른다는 사실도."


"그래도 그런 생각은 좀……"


"우리 아빠는 사실 다정해. 너무 착해. 술에 취해도 다정하고 착해. 그래서 사람들이 다 이용한다고 엄마가 그랬어. 근데 우리 엄마도 착해. 그래서 난 나빠지고 싶어. 나라도 나빠져야 하지 않나 그런 생각을 가끔 해. 자주는 아니야. 이런 생각을 자주 하지는 않아."


수진은 경아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의 아빠가 없었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경아가 낯설게 느껴졌다. 늘 자신을 보며 포근하게 웃는 경아의 얼굴에서 그 말이 나왔다는 사실을 믿기 어려웠다.


"그래도 그런 생각은 나쁜 거잖아."


"나도 알아."


이해한다고, 너와 내 삶이 다른 것을 이해한다고, 수진과 경아는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나이가 아니었다. 그들은 너무 어렸다. 둘은 자신의 삶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도 알 수 없는 나이에 놓여 있었다. 수진은 옳고 그름이 중요한 아이였다. 경아가 자신과 다른 처지라 해도 나쁜 생각을 한다는 건 용납할 수 없었다. 경아는 자신의 경험으로 본 세상을 말할 뿐이었다. 경아는 어렵게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았다. 자신의 생각이 나쁘다는 것을 알면서도 경아는 그것을 수진에게 이야기했다. 수진에게는 말해도 된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이해받을 수 있다고도 기대했던 걸까. 경아는 수진의 말이 마음에 걸렸다. 그래도 그런 생각은 나쁜 거잖아, 경아는 마음속으로 그 말을 따라 해 보았다. 나도 알아, 경아는 알고 있었다. 자신의 생각이 나쁘다는 사실을, 아빠가 자고 있는 모습을 볼 때마다 차라리 없다면 하고 생각하는 자기 자신이 끔찍하다는 사실을.

비밀 고백은 그렇게 끝나버렸다.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든지, 수학 시험을 10점 맞았다든지, 학교에서 방귀를 뀐 적이 있다든지, 바지를 거꾸로 입고 학교를 간 적이 있다든지, 그런 사소한 비밀이었으면 어땠을까. 두 사람이 털어놓은 비밀은 무거웠다. 마음이 가벼워지는 비밀이 아니라 말해지는 순간 그 주변에 있는 것들이 다 그 말을 듣고 있는 것만 같은 그런 무거운 비밀이었다. 수진과 경아는 왜 그런 비밀을 말하게 된 걸까. 누구나 한 번쯤은 있는 그대로를 말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모두에게 숨기더라도 단 한 사람에게는 그것을 말하고 싶어질 때가 있다. 솔직해지는 기분, 발가벗겨져 순수해지는 기분, 이 세상에 나를 진짜 아는 사람이 한 명 정도는 존재했으면 하는 기분, 그런 기분이 주는 자유를 그들은 알고 싶었다. 그것은 본능에 가까웠다.


수진의 엄마가 약속 시간보다 빨리 도착했다. 수진의 얼굴은 일그러져 있었다. 자신이 원하는 만큼 놀지 못한 수진은 엄마에게 괜히 심술을 부렸다. 우리 집에서 자고 가라며 경아의 팔을 잡아당기고, 장난감을 경아의 품에 억지로 안겨주며 조금만 더 놀다 가라고 졸랐다. 경아는 눈과 입을 부자연스럽게 움직이며 웃기만 했다. 수진의 엄마는 수진을 안방으로 따로 부른 다음 문을 닫았다. 오늘 저녁에 약속이 있어서 거기에 가야 한다며 수진을 타이르기 시작했다. 수진은 엄마의 말을 다 듣고도 같은 말을 반복했다. 난 제대로 못 놀았어, 엄마가 너무 일찍 왔어, 내가 오늘 얼마나 기대했는지 알잖아, 엄마 너무해, 엄마는 친구 마음대로 만나잖아, 저녁에 엄마 혼자 가, 나는 더 놀고 싶어. 수진과 수진의 엄마의 언쟁은 길어졌다. 경아는 수진의 방에 홀로 남아 있었다. 자신의 품에 안겨 있는 장난감을 바닥에 내려놓고 경아는 수진의 방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수진에게 익숙한 이 방이 경아에게는 낯설었다. 평생 이런 방을 한 번이라도 가질 수 있을까. 경아는 자신의 삶이 그렇게 될 수 있을까에 대해 생각했다. 아무래도 어렵지 않을까. 그 생각 끝에 경아는 자신의 아빠 얼굴을 떠올렸다. 경아는 수진의 책상 서랍을 열었다.




수진이 아무리 졸라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경아는 수진의 엄마가 챙겨준 종이가방을 들고 순순히 차에 탔다. 수진이 보기에 경아는 전혀 아쉬워하지도 않는 것 같았다. 오히려 집으로 가게 돼 기쁜 것 같아 보이기도 했다. 수진의 엄마는 경아를 큰아버지댁 안까지 데려다주고 다시 차로 돌아왔다. 수진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모든 것이 황량해 보였다. 살아있음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다양한 색으로 자신을 뽐내던 식물들도, 활기가 느껴지던 거리도, 댄스음악이 늘 플레이되고 있었던 것 같은 계절도 사라졌다. 분명 거기 있었는데 하고 수진은 생각했다. 엄마는 적막해진 분위기를 의식하고 라디오를 틀었다. 라디오에서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어떤 사람들에게선 향기가 난대

나도 뒤에 붙어 보았지만

훔칠 수 없는 향기란 걸 알고 있지


처음 듣는 낯선 목소리가 차 안을 가득 채웠다. 수진은 계속 달라지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차는 서다 가기를 반복했다. 어디로 가는 걸까. 수진은 알 수 없었다. 엄마가 가고자 하는 곳에 수진은 가있게 될 것이다. 수진이 알 수 있는 건 그 정도였다. 경아는 지금 무얼 하고 있을까. 수진은 소고기를 파는 대형식당에 도착했다. 식당 2층에 들어서자 큰아버지와 큰어머니, 사촌언니가 보였다. 안녕하세요, 수진은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큰아버지는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고 뒤적거리다 구겨진 만원 짜리 지폐 한 장을 꺼냈다. 구겨진 걸 주면 어떡해. 큰어머니가 핀잔을 줘도 큰아버지는 흔들리지 않았다. 수진이 구겨진 지폐를 받으며 고맙습니다, 인사했다. 그 모습을 보던 작은 아버지도 지갑을 꺼냈다. 수진은 ‘고맙습니다’라는 말의 높낮이와 고개 숙임의 각도에 차이가 없도록 주의하며 그 지폐를 받았다. 수진의 엄마는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연신 소리 내며 웃었다. 작은 언니는 능숙하게 고기를 구워 수진의 접시에 놓아주었다. 수진은 고개를 숙여 바닥을 일부러 쳐다봤자. 작은 언니는 구두가 아닌 나이키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운동화 옆에는 강아지의 오줌이 희미하게 묻어 있었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얼룩이었다. 수진은 경아와 함께 그 순간을 목격했었다. 갑자기 피식 웃음이 났다. (언니는 아무것도 몰라.) 식당 안은 연기와 사람들의 웅성거림으로 복잡했다. 사람들은 벨을 눌러 사람을 아무 때나 불렀다. 조금이라도 늦게 오면 화를 낼 준비를 하고서. 식사가 다 끝나갈 때쯤 작은언니가 케이크 상자를 꺼냈다. 순식간에 긴 초에 불이 붙었고 모두 생일 축하 노래를 불렀다. 식당에 있는 사람들이 수진이 있는 쪽을 힐끗거리며 쳐다봤다가 이내 시선을 거두었다. 큰아버지가 초를 끄자 모두 박수를 쳤다. 식당 앞에 나와서도 어른들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수진은 작은 언니 옆에 서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작은 언니는 수진의 잠바 지퍼를 목까지 올려주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수진은 습관적으로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지폐 두 장이 있는지 확인했다. 거기에 그대로 있었다. 큰아버지가 담배를 다 태우자 모임은 끝났다. 수진은 아빠가 오늘 왜 안 온 건지 엄마에게 물으며 자신의 애매모호한 기분을 가까스로 추슬렀다.


집에 오자마자 샤워부터 하라는 말에 수진은 어쩐 일로 옷을 벗고 욕실로 직행했다. 평소 미적거리는 탓에 혼나고 나서야 들어가는 게 순서였기에 수진의 엄마는 놀란 눈치였다. 수진은 뜨거운 물을 틀고 눈을 감았다. 손에 바디워시를 짜서 거품을 만들었다. 손을 비비며 여기저기 거품을 묻히다 잠바 주머니에 넣어 놓은 지폐를 떠올렸다. 빨리 목욕을 하고 나가 지폐를 서랍 안에 넣어야 된다고 수진은 반복해서 생각했다. 목욕은 평소보다 일찍 끝낸 수진은 알몸으로 뛰쳐나와 자신의 잠바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머리카락 끝에 고인 물이 바닥에 뚝뚝 떨어졌다. 수진은 발바닥으로 물을 뭉개며 책상 앞으로 갔다. 엄마는 누구와 통화 중인지 수진의 행동에 크게 관심이 없었다. 수진은 두 번째 서랍을 열었다. 철제 필통을 열었고 알았다. 그 안이 텅 비어있다는 사실을.




수진은 한기를 느꼈다. 필통 안에 돈이 없었다. 반년 이상을 모았으니 못해도 10장은 넘었으리라. 그 돈이 거기 있다는 사실을 아는 건 한 사람밖에 없었다. 바로 경아였다. 경아를 의심한다고. 이 상황에 의심 안 할 수가 있나. 통화를 마친 엄마가 자신을 부르자 수진은 황급히 서랍을 닫고 고깃집 직원처럼 달려갔다. 옷도 안 입고 뭐했어, 엄마는 헤어드라이어를 들고 준비해 둔 잔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따뜻한 바람이 살결에 닿았다. 수진은 엄마에게 돈이 없어진 사실을 말해야겠다고 생각하다가 혹여라도 경아가 돈을 가지고 갔다면 말하지 않는 편이 나을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경아가 그 돈을 가져갔다면 이유가 있다고 믿고 싶었다. 나보다는 경아에게 그 돈이 더 필요할 수도 있지 않겠느냐고 수진은 머리끝에 고인 물기가 다 사라질 때까지 그 생각을 반복했다. 경아를 만나면 웃으면서 물어봐야지, 수진은 자신이 그럴 수 있다고 믿었다. 그만큼 수진에게 경아는 소중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자신이 알고 있었던 자신보다 더 자신을 깊게 알게 된 수진은 경아를 만날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오해는 풀릴 것이었다.


일주일이 지나서야 수진은 경아를 만날 수 있었다. 둘은 마당에 마주 앉아 있었다. 손바닥 만한 강아지들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나는 다 이해해. 우리는 친구잖아. 나중에 갚아도 돼.”


수진이 활기찬 목소리로 말했다.


“뭘?”


“내가 돈 모아둔 거. 그거 가져갔지? 내 비밀 너만 알잖아.”


수진은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말했다. 자신의 배려가 완벽하게 적용되는 순간에 감탄하며. 경아는 눈에는 금방 감고 나온 머리끝에 맺힌 물방울처럼 눈물이 맺혀 있었다. 경아는 금방이라도 울 것만 같았다.


“돈?”


“그래. 돈! 그냥 말하지 그랬어. 나는 돈보다 네가 더 소중해. 우리는 친구잖아.”


“아니야.”


경아는 울듯한 얼굴을 거두었다. 경아의 눈빛은 선명해져 있었다. 그 눈빛 안에 무슨 말이 들어 있는지 수진은 알 수 없었다.


“친구가 아니라고?”


경아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다. 열한 살 우정은 고작 그 정도였다. 수진은 이 사실을 엄마에게 말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수진은 상황을 바로 잡아야 했다. 그 돈의 주인이기에 수진에게는 그럴만한 권리가 있었다. 수진은 잠들기 전 엄마에게 고백하듯 돈이 사라졌다고 말했다. 엄마는 꽤 당황한 표정이었다. 그 돈을 가져간 사람이 경아가 아니었다는 사실은 수진에게 퍽 충격이었다. 엄마는 그날 현금이 필요해서 잠깐 쓰고 다시 넣어놓을 생각이었는데 어제야 그 생각이 났다고 했다. 수진은 벌떡 일어나 책상 서랍을 열었다. 필통 안에 돈이 그대로 있었다. 수진은 경아의 마지막 표정이 무슨 의미였는지 알게 되었다. 경아를 만나면 사과부터 할 것이라고 수진은 다짐했다. 그렇지만 수진은 경아에게 끝끝내 사과할 수 없었다. 수진의 부모는 바빴고, 큰아버지 댁에 수진은 혼자 갈 수 없었다. 경아를 만나야 한다고 말할 때마다 수진의 엄마는 기다리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수진은 애가 탔다. 경아가 얼마나 자신에게 실망했을지 짐작도 할 수 없었다. 실망한 경아의 마음을 되돌릴 수 있을지 불안해질 때마다 수진은 자기 자신을 원망했다.


“경아? 엊그제 이사 갔어. 경아 아배가 계속 놀잖아. 경아 엄마가 더 이상은 못 산다고 소리를 소리를 지르더니 다음날 방을 빼 달라고 사정을 하더라고. 갑자기 어디로 갈 거냐고 하니까 시골로 가야겠다고, 엄마 곁에 가서 경아를 맡기고 농사일이라도 하는 게 마음 편할 것 같다고 하면서 울더라고. 큰돈은 아니니까 바로 빼줬지. 경아랑 인사를 못해서 그렇구나. 경아는 시골로 갔어. 그 작은 방에서 쓰레기가 어찌나 많이 나오던지.”


큰어머니는 그렇게 말했다. 그 모든 일이 예상되었던 것처럼 담담한 말투였다. 수진은 마당에 주저앉아 한참을 울었다. 마당에 있는 대야 옆에 이름 모를 풀이 얼굴을 내밀고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101번 나왔나요?


30대로 보이는 남자는 방금 잠에서  얼굴로 점원에게 물었다. 점원은 한심하다는 표정을 마스크 안에 숨긴  제대로  대답도 없이 종이봉투를 남자에게 내어주었다. 남자는 다시 한번 자신의 번호표를 확인하고 종이봉투를 품에 안았다. 경아로 보이는 여자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수진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경아를 찾았다. 경아일까. 경아였을까. 수진은 그런 생각을 하며 자신의 주머니에 있는 번호표를 손으로 확인했다. 경아일까. 수진은 애써 찾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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