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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기억의 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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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젼정 Nov 28. 2022

애매한 불행을 안고 사는 사람들

짧은 소설



제가 가진 불행은 어딘지 모르게 애매했습니다. 불행, 이렇게 갖다 붙이면 제법 불행해 보였지만 저렇게 갖다 붙이면 그다지 불행하지 않은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것은 불행하다고 느끼는 저보다 더 불행한 사람들에 의해 변형 또는 조작되었습니다. 이만하면 불행하다 해도 되겠지 싶을 때 더한 불행이 얼굴을 내밀며 그 정도로 불행하다고 말하는 건 불행의 규칙에 어긋난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저는 불행하다고 믿고 있었던 나 자신을 꾸짖었습니다. 매일 아버지가 술에 취해 게슴츠레한 눈을 하고 있어도, 엄마가 인간을 신처럼 믿으며 살아있는 지금보다 사후 세계를 더 기대한다 해도, 저는 그 모든 것들을 견뎌야 했습니다. 그것을 견디고 외면하는 법을 배워야 했습니다.

불행을 일상으로 포장하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이보다 더한 일은 없다. 그것은 감사한 일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저는 감사해야 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내뱉는 것으로 보고 듣는 것을 왜곡시켰습니다. 저는 저를 속이는데 능한 사람이 되어 갔습니다. 그러면서도 저는 불행 앞에서 불행을 말할 수 없는 사람이 되는 건 아닐까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그 두려움은 하늘에 흐르는 바다, 그 이상한 착시현상과 비슷했습니다. 감사할 리가 없는 일상에 감사를 말하는 것이 익숙해진 날도 있었습니다. 어쩌다 불행을 말하는 순간이 오기라도 하면 누군가 등 뒤에서 손바닥으로 제 입을 막았습니다. 그럼 저는 순식간에 태도를 달리했습니다. 이보다 더한 일은 없잖아, 여전히 감사합니다, 하며 눈을 감았습니다.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은 진정으로 불행해질 수 없기에 불행은 (이만하면) 감사한 일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2년에 한 번, 운이 좋으면 4년에 한 번 이사를 할 때도 저는 불행을 떠올릴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집주인이 떠나야 한다고 하면 그래야 했습니다. 여기서 저기로, 저기서 저기로. 동네에 적응할만하면 저는 그 동네를 떠나야 했습니다. 이사가 결정되면 작고 깨끗한 종이 박스를 준비했습니다. 서랍에 있는 물건들을 담으며 낙오되는 것들과 함께 가는 것들을 구분했습니다. 그런 식으로 추억도 분류되었습니다.   


엄마는 두 눈을 감고 감사기도를 했습니다. 아빠가 늦는 날이면 그 기도는 얼굴이 있는 사물처럼 나타났습니다. 마음속이 바깥으로 나와 소리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제 앞에 놓인 음식들이 식어가는 동안 엄마는 계속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누구에게 감사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허공에 왜 그렇게나 많이 감사하다는 말을 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엄마가 수저를 들고 ‘이렇게 저녁을 함께 먹을 수 있으니 참 감사한 일이지?’라고 제게 물으면 저는 습관적으로 고개를 주억거렸습니다. 이 정도면 감사해야 하는 거구나. 사춘기에 접어든 저는 그 말을 믿었다 불신하기를 반복했습니다. 기분이 좋은 날이면 두 손을 모으고 감사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지만 술을 머리끝까지 찰랑이게 따라 마신 아빠가 제대로 걷지 못하고 바닥에 픽 쓰러지기라도 하는 날이면 그 감사하는 마음은 애초에 없었던 것처럼 사라졌습니다. 그것은 자국이 남는 그런 식의 감사가 아니었습니다. 연필로 감사라고 쓰고, 지우개로 지웠다면 감사라는 말은 존재한 적이라도 있을 텐데 그 감사는 본래 없었습니다. 거짓말이었기 때문입니다. 엄마가 단정한 차림으로 자주색 싸구려 가방을 들고나가 날이 저물 때까지 집에 돌아오지 않는 날이면 저는 맹목적인 믿음이 주는 삶의 안정감을 증오했습니다. 그것은 불안의 마취제 같아 보였습니다. 아빠가 선명한 눈을 하고 세상을 바라보지 못하는 것처럼 엄마 또한 그랬습니다. 그 세상은 자신이 보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 보이는 것이었기에, 곁에서 무슨 말을 해도 듣지 않기로 작정한 사람처럼 엄마는 변해버렸습니다. 언제부터 변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아주 오래전부터 그랬던 두 사람을 부모로 여기고 살아가는 저에게 불행은 마음만 먹으면 쉽게 손에 넣을 수 있는 그런 단어였습니다. 불행해지기 위해 노력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꽤 특별하게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투덜거리는 것을 듣기 싫을 때마다 저는 제 불행을 호프집에 나오는 서비스 강냉이처럼 내주었습니다. 그래도 상대가 수그러들지 않으면 마른안주 정도로 서비스의 강도를 높였습니다. 제 불행으로 상대가 안심하기를 바랐습니다. 제가 그들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일은 그런 것들이었습니다.


그보다 더한 일이 없다는 사실은  불행을 사소한 행복으로 바꿔주기도 했습니다. 달고나에 찍힌 모양을 전체에서 떼어내기 위해 저는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그러나  노력을 조롱하기로 작정한 것처럼 인생은  모양을 내어주지 않았습니다. 번번이 그것들은 부서져 형태를 잃었습니다.  모양을 얻으면 대체 무엇을 주는 건지 저는 끝내   없었습니다. 머리를 단정하게 빗은 아이가 주머니에서 오백 원짜리를 꺼내 투명한 페트병에 넣으며 달고나 모양을 얻어냈을 때의 표정을 저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세상을  얻은 듯한 표정, 불행이라는 단어를 마주해본  없는 표정, 그런 표정을  아이는  달고나를 들고 문구점으로 들어갔습니다.  아이는 오른쪽 주머니가 불룩해져서 나왔습니다. 그다음 주변을 돌아보며 위대한 일을 해낸 사람처럼 미소를 지었습니다. 부서지지 않은 달고나를 입에 넣고 와작 깨뜨려 먹는 아이의 탐욕스러운 입술을 저는  오랜 시간 지켜보았습니다. 그러는 동안에도  아이는  손으로 자신의 주머니를 붙잡고 있었습니다. 불룩한 바지는  안에  것과 아이가 붙잡은 손에 의해 벗겨질 것처럼 헐렁거렸습니다. 비스듬한 바지춤 옆에 빌붙어 있는 다른 아이는 평생을 그런 삶이 자신 앞에 놓여있는 사람처럼 비굴한 표정으로 자신의 차례를 기다렸습니다.  아이는 바지 안을 불룩하게 만든 것이 무엇인지 확인해야만 집에 돌아갈 것처럼 집요한 눈빛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싶어서가 아니라 단지 무엇인지 궁금해서  아이는  시간을 인내했습니다.   번을 조르고 기다려야  아이는 불룩해진 주머니에 손을 넣었습니다. 사실 저도  순간을 기다렸습니다. 옆에  아이처럼 집요하게  자신이 없어 저만치 멀리 있었을 , 속으로는 당장  아이의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어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습니다. 그렇지만  아이는 끝내 그것이 무엇인지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사람은  멀리 달아났습니다. 인간이었던 그들은 멀어져 가며 점이 되었고, 나중엔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들에게 불행이 있는지 저는 궁금했습니다.

문구점 가판대 위에 놓인 투명한 페트병 안에 동전이 절반쯤 들어가 있었습니다. 저는 그것을 한 움큼 집어 주머니에 넣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만큼이면 불행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 궁금했습니다. 페트병 안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 안에 볕이 들어 있었습니다. 손바닥으로 볕을 가리자 페트병 안이 어두워졌습니다. 제가 그러고 있는 사이 문구점 주인아저씨가 나와 페트병을 집어 올렸습니다. 거인이 아닐까. 저는 거인의 손을 보았습니다. 그 손은 페트병을 감싸 쥐고 있었습니다. 볕은 가판대 위에서 여전히 반짝이고 있었습니다.


저는 더 불행해지지 않기 위해 살아왔습니다. 행복해지기 위해 살아왔던 것이 아니라 ‘그보다 더한 일은 없잖아’라는 말을 기도처럼 외우며 살아왔습니다. 행복해지기 위해 불행을 외면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바지가 불룩해진 아이가 그날 집에 돌아가 꺼낸 것이 무엇이었을지 저는 아직도 모릅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그 아이를  쫓았던 아이는 그날 그것을 보았을까요. 저는 그 아이가 페트병에 넣은 동전으로 얻은 것에 대해 여전히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날 제 손바닥을 스친 볕의 따스함을 떠올리고 있습니다. 그 페트병을 집어 든 거인의 손톱에 낀 검은 선은 제게 경고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네 것이 될 수 없다고, 남의 행복을 훔쳐보거나 손에 쥐려고 해서는 안된다고. 저는 불행하다고 말하기 애매한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이제 감사 기도는 하지 않습니다. 감사, 그것을 종이에 쓴 적이 없다는 사실을 엄마에게 들켰기 때문입니다. 애매한 불행은 여간해서 태도를 바꾸지 않습니다. 불행을 어떻게 갖다 붙여볼지 고민이 됩니다. 이렇게 저렇게 시도 때도 없이 변덕을 부리는 불행을 저는 타이릅니다. 더한 일은 없잖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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