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박완서 작가의 에세이집 ‘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라는 책을 읽었다. 박완서 작가의 에세이를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한 건 이유가 있었다. 그 이유를 쓰면 낯부끄러워질 것이 뻔해 쓰진 않겠다. 유명한 작가지만 나는 박완서 작가의 글을 읽은 기억이 없었다. 독서를 제대로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읽는 속도 또한 느리기 때문에 읽지 않은 책이 너무 많아 기쁘고도 슬프다.
어린 시절 책은 나의 유일한 친구였어요. 책 읽는 것 외에 별다른 취미가 없었어요. 집에 책이 많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읽게 되었죠.
모두 나와 관련 없는 이야기다. 나는 책과 거리가 먼 유년 시절을 보냈다. (동네 도서대여점을 자주 다니긴 했다. 만화책을 빌려 보거나 놀기 위해서.)
박완서 작가의 글을 읽으며 독서가 주는 쾌락에 대해 말하고 싶어졌다. 그녀가 들려준 이야기를 통해 나는 또 다른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독서를 하다가 그 이야기에 빠져들 때 마음이 산책하고 있고 있음을 느낀다. 보이지 않았던 마음이 불쑥 나타나 점점 커지는 공간을 거닐기 시작한다. 한 번도 가지 못했던 곳으로, 앞으로 뒤로, 옆으로 대각선으로, 마음은 이리저리 방향을 바꿔 걷는다. 눈에 보이지 않아 만질 수 없다 하더라도 분명 마음은 각자의 공간에 존재한다. 독서는 그 공간을 풍요롭게 한다.
내가 책을 읽기 시작한 건 순전히 글을 쓰고 싶다는 욕망에서 비롯된 일이었다. 읽는 것이 좋았다기보다는 내성적인 탓에 늘 하고 싶은 말을 마음에 담아둔 내가 가고자 하는 세계가 거기에 있다고 본능적으로 찾아냈다고 해야 할까. 20대 초반, 당시 집 앞에 도서관이 있어서 열심히 그곳을 드나들며 일본소설을 빌려 읽었다. 사실 책을 읽는 것보다 도서관에 가는 것 자체를 더 좋아했다. 볕이 좋은 한낮 도서관 책상에 앉아 책을 읽는 사람들을 지나쳐 창가를 바라보는 순간을 나는 좋아했다. 살짝 열려 있는 창문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이 살결에 닿을 때, 그 바람이 다양한 책을 스치며 색다른 공기 냄새를 만들어 낼 때, 거기에 있는 모든 것들이 호흡하고 있음을 나는 알 수 있었다. 에쿠니 가오리의 ‘반짝반짝 빛나는’이라는 소설을 시작으로 야마모토 후미오의 ‘연애중독’을 읽었을 때 신선한 충격이 있었다. 아주 사소한 감정을 섬세하게 표현한 작품들에 매력을 느꼈다. 이후에는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 마루야마 겐지의 ‘소설가의 각오’를 읽었다. 인간이 가진 나약함과 강직함, 그 사이에서 방황하는 나의 감정을 즐겼던 것 같기도 하다. 장 폴 사르트르의 ‘구토’를 읽으며 사유의 형태가 글로 표현될 수 있다는 사실로 놀라기도 했다. 책이 좋아지긴 했어도 많이 읽지는 않았다. 책 읽는 것보다 술을 마시거나 쓸데없이 돌아다니며 시간을 보내는 것이 더 재미있었다. 그러니 탐독과는 거리가 먼 독서였다. 드문드문 읽긴 했으나 그마저도 현실과 맞물려 지속되지 못했다.
글쓰기에 대한 열망이 생기면서 다시 독서를 시작했다. 글쓰기에 대한 열망이 생긴 건 아이가 어느 정도 크고 시간적 여유가 생겼을 때다. 처음에는 무작정 쓰면서 내 글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결국 내 수준을 마주했고 괴로웠다. 그런 괴로움을 안고 책을 읽기 시작했다. 역시 잘 읽히지 않았다. 사람들이 책을 읽지 않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취미생활이든 뭐든 빠져들기 위한 과정에서는 지난한 시간이 요구된다. 단순히 글을 읽을 수 있다고 해서 독서가 가능해지지는 않는다. 그 사실을 깨닫는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어떤 것에 입문해 어느 정도 경지에 도달하기까지 요구되는 성실함이 독서에서도 필요하다. 평소 책을 읽지 않던 사람이 책을 펼치면 술술 읽힐까. 상상으로는 가능할지 몰라도 쉬운 일은 아니다.
나는 천천히 시간을 두고 책을 곁에 두었다. 동네서점을 드나들며 책을 사는 즐거움도 알아갔다. 독서를 다시 시작한 지 2년 정도가 지났다. 여전히 많이 읽지는 못하지만 이제 독서를 좋아한다고는 말할 수는 있다. 새로운 작가의 책을 읽을 때면 늘 적응하기까지 시간이 필요하다. 어떤 책은 물 흐르듯이 편하게 읽히지만 어떤 책은 난해해서 도무지 페이지가 넘어가지 않는다. 문장이 복잡해서 넘어가지 않을 때도 있지만 평소 전혀 하지 않았던 생각들이라 넘어가지 않을 때도 있다. 이를테면 SF나 과학 관련 도서가 그렇다. 아무리 읽어도 몰입이 되지 않아 읽다만 책도 많다. 그러다 내가 하고 싶었던 말들을 고스란히 담아놓은 책을 만나면, 그 쾌락이란. 정말이지 경험해보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감정이다.
밤에 몰래 도둑질하듯, 맛난 것을 아껴가며 핥듯이 그렇게 조금씩 글쓰기를 즐겨왔다.
그건 내가 뭐 남보다 특별히 바쁘다거나 부지런해서 그렇다기보다는 나는 아직 내 소설 쓰기에 썩 자신이 없고 또 소설 쓰는 일이란 뜨개질이나 양말 깁기보다도 실용성 없는 일이고 보니 그 일을 드러내놓고 하기가 떳떳하지 못하고 부끄러울 수밖에 없다고 내 나름대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쓰는 일만 부끄러운 게 아니라 읽히는 것 또한 부끄럽다.
나는 내 소설을 읽었다는 분을 혹 만나면 부끄럽다 못해 그 사람이 싫어지기까지 한다.
204p. /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 박완서 / 에세이
요즘 내 상태가 이렇다. 내가 뜨개질에 매달리는 이유는 그냥 좋아해서기도 하지만 결과물을 눈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이 더 크다. 뜨개질을 하면 그런 허전한 마음이 위로된다. 글쓰기라는 건 알아갈수록, 해볼수록 어려운 일 같다. 누구나 쓸 수 있지만 결과물에 대해 쉽게 말할 수 없다. 글이 완성되었다고 말하는 것 자체도 어딘가 이상하고 우습다. 나는 내가 작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누구나 작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나를 작가라고 부르지 않는다.) 실제로 그럴 만한 결과물도 없고 그럴 수 있는지에 대한 확신도 없다. 다만 내가 어떤 방식으로든 쓰고 싶어 한다는 사실만은 안다.
박완서 작가가 소설 쓰기에 대해 부끄럽게 생각한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그녀의 책을 읽지 않았더라도 ‘박완서’라는 이름만 대면 어렴풋이 그녀가 작가라는 사실을 많은 사람들이 안다. 그런 그녀에게도 소설 쓰는 일은 어려웠던가 보다. 나는 글을 쓰고자 하는 나 자신이 자주 못마땅하다. 잘하지도 못하는 주제에 괜히 나대는 것만 같아 보여서 못나 보인다. 아는 것도 개뿔 없으면서 쓰다 보면 결국 인생이라든지 인간관계라든지 살아가는 방법이라든지, 그런 것에 대해 아는 척을 하고 있는 것 같아서 꼴 보기 싫어진다. 내가 타인에게 무슨 말을 해줄 수 있을 정도로 괜찮은 삶을 살고 있나. 그렇지가 않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나는 쓴다. 서글픈 일이다.
이 책이 좋았던 이유 중 하나는 그녀가 보통의 인간처럼 느껴져서였다. 순전히 나의 편견으로 ‘작가’라고 하면, 저리도 유명한 작가라고 한다면 대단히 마음이 너그럽고 아름답기만 할 것 같은데 책 속에서 본 그녀는 그렇지 않았다. 적당히 이기적이고 현실적인 사람으로 느껴졌다. 인간이 가진 양가적 감정이 솔직하게 표현돼 있어 반갑기도 했다. 나는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면 된다고 생각해 왔으면서도 실제로는 그러지 못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럴듯한 상황과 느낌을 보여주고 싶었던 건 아닐까. 솔직하지 못했던 건 아닐까. 책 속에서 읽은 작가의 속마음에 내 마음을 비춰보았다. 어쩐지 부끄러웠다. 이 책을 읽으면서 몇 번이나 코끝이 찡해지고 눈시울이 불편해졌다. 울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책을 읽다가 그런 기분이 들다니 한편으로는 기뻤다. 책 한 권을 통해 나는 흐뭇했고, 부끄러웠고, 기뻤다.
거듭 말하지만, 내가 참으로 원했던 것은 나와 같은 세계에 사는 동질의 원형질을 가진 단 한 사람의 동료를 만나는 일이었다. 그를 만나 이 껍데기의, 그림자만의 세계를 성토하는 것이었다. 내가 발견하고 우리가 공유하고 있는 내밀한 지하의 세계를 대화로, 마음으로 누리는 것이었다. 그를 만날 수만 있다면, 아, 그럴 수만 있다면 모든 것이 가능할 것 같았다. 130p.
생의 이면, 이승우
올해 읽었던 책 중에 가장 좋았던 책은 이승우 작가의 소설 ‘생의 이면’이었다. 누군가 내게 가장 좋아하는 작가가 누구냐고 묻는다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이승우 작가’라고 대답할 것이다. 내가 표현하고자 하는 가장 유사한 형태의 문장이 그가 쓴 책 속에 있다. 나는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그의 책을 통해 알게 된다. 처음 그의 문장을 만났을 때 나는 적잖이 놀랐다. ‘나와 같은 세계에 사는 동질의 원형질을 가진 단 한 사람의 동료를 만나는 일(소설 ‘생의 이면’ 130p)’이라는 이 적절한 표현이 나의 쓰고자 하는 마음을 대변하고 있는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의 글을 읽을 때면 덜 외로워진다. 내가 책 속의 인물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책 속의 인물이 나를 이해해주는 것만 같다. 나는 줄곧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가진 누군가와의 깊은 대화를 원했다. 그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우리 모두가 얼마나 다른가. 오래된 친구와 만나 대화를 해도 할 수 없는 이야기들이 있다. 모든 것을 다 말할 수 있는 사이가 있을까. 모호하고 애매한 생각들, 차마 입 밖으로 꺼내기 힘든 이야기들. 나는 그런 것에 대해 누군가와 이야기하고 싶었다. 대화를 하면서도 해소되지 않은 대화의 갈증을 해소하고 싶었다. ‘내가 하고 싶은 대화가 이런 것이었나 보다’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이승우 작가의 작품은 나의 대화의 갈증을 해갈한다. 그래서인지 그의 작품을 읽을수록 나는 더 읽고 싶어 진다. 더욱 쓰고 싶어 진다.
‘대상을 두루 생각하는 일’을 ‘사유’라 일컫는다. 사유에는 쾌락이 있다. 미지의 공간에 서서 그 순간에만 볼 수 있는 느낌을 간직한다는 것, 신비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생각에 깊이가 있다 것도 그렇다. 정말 생각에 깊이가 있을까? 얼마나 깊어졌는지 스스로 느낄 수 있을까. 타인이 알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사유라는 것이 애매모호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예술은 수많은 애매모호함을 표현한다. 대체 이 감정이 뭘까. 나라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누구에게도 답을 구할 수 없는 질문들을 우리는 숙제처럼 안고 살아간다.
불러일으켜진 것만이 불러일으킬 수 있다. 131p / 소설가의 귓속말, 이승우
어떤 문장은 살아 있다. 살아 있는 문장은 기어이 말을 건다. 그것을 들을 수 있는 건 읽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쾌락이라고 생각한다. 독서의 쾌락, 그 쾌락의 값은 그리 비싸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