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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젼정 Feb 09. 2023

나의 세계


사람들은 자신이 보고 싶은 것을 보고, 듣고 싶은 것을 듣고, 읽고 싶은 것을 읽는다. 우리는 모두 그런 식으로 자신만의 세계를 만든다. 그 세계는 시간이 지날수록 견고하고 복잡해진다. 어떤 사람의 세계는 자주 변한다. 어떤 사람의 세계는 늘 비슷하다. 어떤 사람의 시간은 흘러가고 어떤 사람의 시간은 멈춘 것처럼 보인다. 지금 살아있다는 이유로 우리가 같은 세계에 살고 있다고 느끼는 건 착각일지도 모른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우리는 습관처럼 자신이 본 것을 전부라고 믿는다. 전부가 아닌 전부를, 전부지만 전부일 수 없는 수많은 것들을 붙들고 평생을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다


어떤 세계는 나이가 듦에 따라 채색이 바뀐다. 우리는 지나고 나서야 본다. 과거에 자신이 보았던 색에 대해 희미하게 떠올린다. 순간은 기억이 되고 어떤 기억은 인생의 전부가 되기도 한다. 당장 알 수 없는 것들에 둘러싸인 채  우리는 살아간다. 그 나이에만 보이는 것들이 있고, 그 나이에만 경험할 수 있는 일들이 있다. 그것을 지나 도착한 나이에 보게 되는 세상은 미묘하게 좀 달라져 있다. 40대에 들어선 내가 알게 된 사실 중 하나는 아빠가 무심코 했던 말이기도 한데 몸이 늙고 나이가 먹는다고 마음까지 그리 되진 않는다는 것이다.


얼마 전 차 앞을 천천히 걸어가는 할머니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나는 조수석에 앉아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우리도 저렇게 늙겠지? 노인이 되는 걸 피할 수는 없겠지. 그걸 알면서도 나는 내가 저렇게 되지 않을 것만 같아. 웃기지.”


혼잣말에 가까운 그런 말이었다.


“다 저렇게 되지.”


남편이 별다른 감정 없이 대답했다.


할머니의 걸음이 비현실적으로 느리다는 생각이 들었다. 늙으면 다 저렇게 한 걸음 한 걸음 느려지는 걸까. 발목에 모래주머니라도 달아놓은 것처럼 할머니의 걸음걸이는 불편해 보였다. 그 속도가 지루하게 느껴졌다. 빨리 비켜줄 수는 없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고 스스로를 타이르면서도 나는 할머니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기 전까지 그런 생각을 했다. 차 안에 있을 때면 차 밖에서 벌어지는 그런 상황이 갑갑하게 느껴진다. 차 밖에 있을 때는 기다릴 줄 모르는 운전자가 야속해 보인다. 내가 어디 있느냐에 따라 모든 게 달라 보인다. 안과 밖에서 같은 사람이고 싶다는 생각을 할수록 그것이 얼마나 불가능한 일인지에 대해 확인하는 기분이 든다.




10대 시절 40대가 된 나를 가끔 상상했다. 그때까지 내가 살아 있긴 하려나 그런 생각도 자주 했다. 10대였던 나에게 40대는 너무 멀게 느껴졌다. 그 나이에 도착하기 전에 내가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도 그리 두렵지 않았다. 그 나이의 나는 그랬다. 언제나 내가 학생일 것 같았다. 뭐 하나 열심히 하지도 않으면서 나이 먹는 것을 두려워할 줄도 몰랐다. 그 시절 나는 나의 세계를 표현해 낼 방법을 찾지 못했다. 방황하면서도 그것이 방황인 줄도 모르는 나이에 서서 자주 웃었고 자주 울었다. 그저 살아 있었기에 그날들을 살아냈다. 그때의 나는 스스로 죽음을 생각할 만큼 불행하진 않았지만 스스로 창창한 미래를 그려낼 만큼 희망적이지도 않았다. 그러면서도 40대에 내가 살아있다면 뭔가 되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막연한 기대감이 있었다. 내가 하고자 하는 것에 대해 어느 정도 가까워지긴 했을 것이라고, 지금보다는 훨씬 나은 날들에 있을 것이라고, 10대의 나는 40대의 나를 그런 식으로 상상했다.  


나는 죽지 않고 40대에 도착했다. 간밤에 뭘 먹고 잔 것도 아닌데 늘 빵빵한 모양을 하고 있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볼살은 어느새 사라졌다. 미간 사이 일자로 난 주름은 점점 선명해지고 있다. 감정은 얼굴에 흔적을 남긴다. 언제 이렇게 미간을 찡그렸을까. 언제 이렇게 이마에 힘을 주었을까. 40대가 된 나는 덜 웃고 덜 운다. 여전히 무엇도 되지 못한 채로 지나간 시간을 반추하고 있다. 채색하지 못한 나의 세계를 안타까워하는데 많은 힘을 쏟고 있다. 무책임한 인생을 살고 있는 것만 같아 두려운 마음이 자주 든다. 조바심 낼 필요는 없다고 자신 있게 말하고 싶은데 자신이 없다. 조바심 낼 필요 없다고 쓰는 순간에도 조바심이 난다. 그런 지경이다.


노인의 발걸음이 무거워질 수밖에 없는 것은 모든 기억을 안고 살아가기 때문이 아닐까. 지나간 시간을 통해 많은 것을 알게 되었음에도 다가올 시간에 대해 전혀 예상할 수 없는 인간의 삶은 모두에게 공평한 불친절함을 제공한다. 노인의 몸에는 살아가며 보고 듣고 읽었던 많은 시간들이 축적돼 있다.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는 순간들이 있을 것이고 기억하려 해도 기억해 낼 수 없는 순간들도 있을 것이다.


모양이 정해진 사물처럼 살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관찰한다. 그래야만 하는 현실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사람들의 시간들에 대해 쓴다.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한 작품들을 감상한다. 가볍고 무거운 노래를 듣는다. 취향이 쌓인다. 나의 세계를 그린다. 다양한 물건이 있는 잡화점처럼 호기심 가득한 세계에서 나는 주인이 되기도 하고 손님이 되기도 한다.


낯선 곳에 가고 싶다. 생각의 방향을 바꾸고 싶다. 내가 전부로 여기는 세상을 다르게 보고 싶다.


노인은 천천히 걷는다. 그렇지만 그 노인의 마음까지 그런 속도라고 확신할 수는 없다. 우리는 그때까지 살아있다면 모두 늙어갈 것이고, 축 늘어진 피부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의 마음은 겉과 같지 않을 것이다. 겉과 안이 다를 수 있다는 건 신비한 일일지도 모른다. 나의 세계는 어떤 색일까. 현재가 어떤 색으로 채색되고 있는지 미래에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미래의 나는 차 앞을 가로막고 천천히 걷고 있을지도 모른다. 누군가 차 안에서 그런 나를 보며 답답해할지도 모른다.


다 그렇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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