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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젼정 Mar 19. 2023

희미한 순간

물안주의 날


우리 집에는 ‘물안주의 날’이 있다. ‘물안주의 날‘은 ’ 금요일 밤 대놓고 많이 먹고 살찌기로 작정한 날‘이다. 명칭은 아이가 정했다. 엄마는 맥주를 마시고 자기는 물(또는 음료)을 마시니까 ‘물안주’라고 마음대로 부르더니 금요일 오후만 되면 ‘물안주의 날’을 하자고 노래를 불렀다. ‘물안주의 날’ 참여자는 주로 나와 아이 둘이다. 더러 남편이 참여할 때도 있는데 남편이 근무나 약속으로 집을 비우는 날 ‘물안주의 날’은 제 옷을 입는다. 비밀모임이라도 되는 것처럼 우리는 그 모임에 임한다.


처음 몇 달은 꽤 긍정적인 마인드로 ‘물안주의 날’에 동참했다. 그러나 취침 시간이 점점 늦어지고 그것이 다음날까지 영향을 준다는 점, 평소보다 훨씬 많이 먹게 되는 바람에 살이 찐다는 점, 그런 점 때문에 나는 뒤늦게 ‘물안주의 날’에 반대표를 던졌다. 사실상 일방적인 통보였다. 두 사람이 전부인 모임에 한 사람이 빠지면 그 모임은 원래 없었던 것처럼 사라지고야 만다. 나는 물건을 쓰고 나서는 꼭 제자리에 두어야 된다는 식으로, 아이에게 그날이 지속될 수 없는 이유에 대해 설명했다. 그 무렵 나는 우리의 시간이 알 수 없이 망가져간다고 느끼고 있었다. 야릇하게 불안했다. 금요일 밤마다 볼록해진 배를 확인하며 원래 지내던 대로 그 시간을 돌려놓아야겠다고 다짐했다. 잘 시간이 되면 망설임 없이 꿈나라로 가야 키도 크고 건강하지 않겠는가. 나는 모범적인 어린이의 금요일 밤을 다시 꿈꿨다.




두어 달이 지났을까. 겨울방학이 되었고 어김없이 금요일이 돌아왔다. 앞서 했던 다짐과 생각이 흐려져 갈 무렵 자연스럽게 물안주의 날이 재개되었다. 방학이란 게 그렇다. 정해진 규칙이 희미해지고 자유로워진 시간에 마음도 느슨해진다. 8시가 조금만 넘으면 학교를 간다고 집에서 나서던 아이가 9시가 넘어서까지 잠을 쿨쿨 자고, 내일이 없는 것처럼 밤늦게까지 영화나 드라마를 본다. 물론 방학이라 해도 일주일에 한 번은 구몬 선생님이 오시고 평일에는 피아노학원에 가야 하니까 마냥 노는 것만도 어니다. 그러니 직장인들이 기다리는 금요일처럼 아이의 금요일도 조금은 마음을 풀어놓고 싶은 날이 아닐까 싶다.  


아이에게 득이 될 게 없다고 여겨졌던 날이었다. ‘물안주의 날‘을 금지하는 것이 부모로서 해야 될 현명한 판단이었다고 믿었었다. 정말 생각하기 나름이다. 어떤 날에는 아이를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다가 어떤 날에는 그 누구보다도 이해하는 나를 나는 이해할 수가 없다.


’물안주의 날‘에 중요한 것이 있다. 안주의 양이 충분해야 한다. 단둘이라 해도 둘 다 조금 먹어서 만족하는 편이 아니니 ’ 조금‘ 준비해서는 안 된다. 둘이 있어도 명절처럼 넉넉하게 준비해야 한다. 부족하게 끝나면 ’물안주의 날‘ 기분이 나지 않는다는 사실에 빨간 동그라미를 쳐줘야 한다. 배가 터지기 직전까지 먹을 것이 준비돼야 한다. 안주가 풍성하게 준비되면 각자 잔을 채우고 우리는 구호를 힘차게 외친다.


물안주를 위하여!


‘짠’이 끝나면 천천히 오래 먹기 시작한다. 금요일의 허전함을, 가족이 모두 모이지 못한 시간에 대한 아쉬움을 우리는 그런 식으로 채운다. 일주일 동안의 수고를 그런 식으로 위안한다. 씹고, 뜯고, 마시고 즐기고. 평일에는 괜찮은데 주말이 다가오기 시작하면 가족 모두 집에 없다는 사실이 적막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그래서 그런 날에는 일부러 자세히 보지도 않는 뉴스나 드라마를 틀어놓기도 한다. 입안 가득 무엇인가를 넣고 굴려가면서.




그날은 구들장(전기장판)과 함께하는 겨울방학 물안주의 날이었다. 엉덩이는 뜨시고 맥주는 시원하고 공기는 가볍고 소리는 선명했다. 음악은 없고 안주는 있고 시간은 희미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그날 아이는 ‘희미하다’의 뜻을 물었다. 만화책에 나온 ‘희미하다’라는 표현을 이해하기 힘든 모양이었다. 눈에 눈물이 반쯤 차올랐을 때 눈앞에 있는 글씨가 희미해 보이는 것, 노트에 글자를 쓰고 지웠는데 자국이 남아서 희미하게 형태가 보이는 것, 생각나는 대로 예를 들어주었다. 불분명하고 애매한 느낌이 들 때 쓰기도 한다고 덧붙였다. 내가 잘 설명해 줬을까. 우리는 각자가 만난 다양한 사람과 처한 상황을 내포해 언어를 배운다. 내가 배운 언어와 아이가 배운 언어는 다를 것이다. 우리는 모두 다른 언어를 쓰고 있는지도 모른다.


맥주를 마시다가 아이에게 ‘희미하다’로 문장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아이가 어떤 식으로 이해했는지 궁금해서였다.


자려고 눈을 감았는데 다시 눈을 떠보니까 아침이었어. 희미해. 기분이 이상해. 


아이의 문장을 희미하게나마 이해할  있을  같았다. 아이의 언어와 나의 언어가 만나는 지점이 희미하게 겹쳐 보였다. 길었던 겨울방학도 끝났다. 우리가 함께 하는 시간에 대해 쓰고 싶다. 겨울방학 아이와 함께  영화 ‘애프터썬 자꾸 떠오른다. 적막한 금요일 밤을 채우기 위해 우리가 했던 말들과 먹었던 음식들. 우리만 아는 ‘물안주의  촌스러운 구호. 쌓여가는 추억과 웃음. 언젠가  시간을 분명 그리워할  같다. 나는 여기 있지만 가끔은 그곳에 있는 나를   있을 것만 같다. 서로에게 맞닿아 있던 희미한 언어의 교집합을 나는 만질  있을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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