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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젼정 Jun 17. 2021

아이의 글에는 '척'이 없다

자신 없는 글쓰기를 계속 해내는 마음

화창한 일요일, 특별한 목적지 없이 아이와 함께 손을 잡고 집을 나선다. 도보로 갈 수 있는 거리에 있는 곳, 노키즈존이 아닌 곳, 좋은 음악이 흐르는 곳이면 된다. 6월의 한낮은 거의 여름의 얼굴을 하고 있다. 여름을 처음 맞는 사람처럼 우리는 낯설게 눈을 찡그린다. 볕이 뜨겁다. 몸의 그늘진 곳에서 땀이 나는 느낌도 든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이는 내 손을 꼭 붙잡는다. 언제까지 이렇게 손을 잡고 함께 주말을 보낼 수 있을까, 나는 아이에게 묻는다. 아이는 '엄마는 또 저런 질문을 하네?'라는 얼굴로 별 다른 말을 하지 않는다. 우리는 익숙한 동네의 풍경을 기억에 새긴다. 일요일이 지나가는 순간을 함께 한다.





언젠가는 사라질지도 모른다.
이곳이 어딘지 사람들은 모르겠지.


대부분 관심을 갖지 않는 좁은 골목길을 어여쁜 마음으로 바라보면서 생각한다. 나는 인적이 드문 길이나 골목을 발견할 때 가슴이 설렌다. 오래된 세월을 잊고자 덧칠한 오렌지색 벽에 멈춰 선다. 나는 아이를 그 공간에 세워두고 사진을 찍는다. 아이의 표정에서 더위가 느껴진다. 본격적인 여름이 오기 전, 우리가 함께 걷던 길에서 휴대폰 카메라 렌즈를 통해서 서로를 바라보았던 순간이 사진 속에 남는다. 벽에 새겨진 '식탁'이라는 단어가 사진을 더 돋보이게 한다.


배다리 헌책방을 지나 창영초등학교 방향으로 올라가다가 동네 공원에서 멈춰 선다. 아이는 더운지 이제 그만 카페에 가자고 보채기 시작한다. 나는 꽃밭을 지나칠 수가 없어 아이에게 사진을 찍어 달라고 부탁한다. 아이는 그림처럼 꽃 곁을 맴도는 나비들을 경계하며 마지못해 사진 기사가 된다. 아이 주먹만 한 민들레 홀씨가 도도하게 우리를 지켜본다. 동네에 이렇게 좋은 공원이 있으니 멀리 갈 필요가 없다 싶은데 의외로 사람이 없어 아쉽고 좋은 마음이 교차한다.





우리는 목적지에 들어가 각자의 음료를 주문하고 자리에 앉는다. 손님이 우리밖에 없다. 요즘 시국에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주말인데 이렇게 손님이 없어도 되나, 잠시 오지랖이 넓어진다. 카페에는 흔한 음악 소리도 나지 않고, 적막감이 흐른다. 카페 사장님은 짧은 커트 머리에 청바지 차림으로 상냥과는 거리가 먼 친절한 태도로 우리를 맞이 했다. 음악이 없으니 이상하다. 나와 아이의 움직임이 그 공간에서 'ASMR'로 재생되는 기분이다. 나는 사장님에게 음악을 틀어줄 수 있느냐고 묻는다. 카페 대형 TV에 홈 클래식 재생 화면이 멈춰 있는 걸 봐서는 무례한 부탁은 아닐 것이다. 이윽고 클래식 음악이 재생된다.


아이는 목적지에 도착했으니 뭐가 어찌 되든 상관없다는 얼굴이다. 카페에 갈 때면 챙기는 자신의 노트와 연필을 꺼내 열심히 끄적이기 시작한다. 한 장 쓰고, 바로 내게 보여준다. 다 하고 보여달라 해도 소용이 없다. 내 칭찬이 자신의 귀에 입력되어야 다음 장으로 넘어가는 규칙이 있는 모양이다. 아이의 재치 있는 글들에 나는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아이는 아까 보았던 오렌지색 벽과 닮은 색의 노트에 다양한 '나라' 이야기를 쓰고 있다. '이상한 나라의 꿈', '뜨개의 나라', '별 나라'의 이야기를 시작과 동시에 완결한다. 특히 '별 나라'에 대한 이야기가 흥미롭다. 나쁜 꿈을 동물들이 먹어주는 나라의 이름이 '별 나라'인데 자신의 나쁜 꿈을 힘들게 먹어주는 동물들에게 미안하다는 내용이다. 아이가 쓰는 이야기는 거침없고 발랄하다. 읽는 사람의 반응에 대한 기대는 있어도, 자신이 쓰고 싶은 이야기에 망설임은 없어 보인다.


요즘 나는 그렇지 못하다. 다소 따분하게 느껴질 정도로 성실히, 꾸준히, 글쓰기를 하고 있지만 점점 자신이 없다. 잘 쓰고 싶은데, 그냥 쓰기만 하는 기분이다. 글쓰기 관련 책을 봐도, 브런치 메인에 게시된 글을 봐도 그렇다. 명확한 콘셉트가 필요하다는 건 안다. 내가 하나의 브랜드가 된다고 생각하고 글을 써야 한다는 사실쯤은 알고 있다. 그걸 알면서도 앞으로 잘 나아가지 않는 느낌이 지속되고 있다. 사람들이 어떤 이야기를 듣고 싶은지도 잘 모르겠다. 내 글을 읽고 계속 '라이킷' 해주는 사람들도 내 글을 구독하지는 않는 걸 보면 더 혼란스럽다. 반대로 어떤 사람은 글이 몇 개 없어도 구독자가 많다. 내가 뭘 잘못하고 있나 자꾸 생각하게 된다.





아이가 쓴 글은 짧지만 재미있다. '못 이기는 척'이라는 제목의 '시+소설'이라는 장르의 글은 아홉 살이 보여줄 수 있는 재치를 듬뿍 담고 있다.


나는 요즘에 남자아이들에게 못 이기는 척을 많이 한다. 왜냐하면 아이들이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니, 애들이 그럼 못 이기는 척을 하라고 하는 거다. 그래서 왜냐고 물었더니 그러면 좀 예쁘게 보인다고 해서이다. 정말일까?


처음에는 못 이기는 척하는 이유를 쓰지 않아서 아이에게 뒷이야기를 더 써달라고 부탁했다. 당연히 아이가 친구에게 들은 말인 줄 알았는데 자신이 생각해서 쓴 거란다. 예쁜 척을 하는 것보다 '못 이기는 척' 하는 것이 더 예뻐 보인다는 말에는 많은 뜻이 담겨 있다. 사람들은 예쁜 척하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예쁜 척하지 않는 것을 좋아하지도 않는다. 못 이기는 척 예쁜 건, 그래, 괜찮아 보인다. '척'이라는 사전적 의미는 '그럴듯하게 꾸미는 거짓 태도나 모양'이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척'이라는 말이 붙으면 상대의 태도가 가식적으로 느껴진다.


아이의 글에는 '척'이 없다. 자신이 상상할 수 있는 것과 쓸 수 있는 것을 고스란히 종이에 적는다. 다 적고 나서 고칠 새도 없이 나라는 구독자에게 글을 건넨다. 나는 그 글을 읽을 때만큼은 아이가 작가라고 생각한다. 어떤 부분이 좋았는지, 아쉬웠는지 의견을 내기도 한다. 아이는 칭찬을 듣고 나면 신난 얼굴로 다음 글을 써 내려간다.


집에 돌아오는 , 아직도 밖은 환하다. 일요일이 아직 그만큼 남아 있다. 우리는 아이스크림 가게에 들려 각자 좋아하는 맛을 고른다. 집에 가는 내내 검정 비닐봉지가 걸음에 맞춰 흔들린다. 집에 도착해보니 비닐봉지가 찢어져있다. 비닐봉지는 모서리가 날카로운 아이스크림에게 속수무책으로 했다. 찢어진 비닐봉지는 미련 없이 버리기로 한다. 차가운 레몬맛 아이스크림이  입에서 소리 없이 사라진다. 아이는 복숭아  아이스크림을 입안 가득 넣었다 빼기를 반복한다. 아이가  이야기 속에 존재하는 별나라의 동물들은 아이의 나쁜 꿈을 대신 먹어준다.  글도 그랬으면 좋겠다.


당신의 마음에서 금방 사라진다 해도, 완벽하지 않아 비닐봉지 찢어지듯 외면당한다 해도, 나는 못 이기는 척 써야겠다. 아이와 손을 잡고 동네를 걷는 순간을, 인적이 드문 골목을 발견한 순간을, 태어나 가장 큰 민들레 홀씨를 보았던 순간을, 카페에 적막감이 흘렀던 순간을, 자신 없는 글쓰기를 계속 해내는 마음의 순간을, 6월의 일요일 여름에 못 이기는 척 담아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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