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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젼정 May 25. 2021

인생 총량의 법칙

파이팅 싫어


20대 초반, 나는 꿈이 없는 사람이 한심해 보였다.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은지도 모르다니, 그걸 모르고 살아가다니, 그렇게 사는 거 참 안 됐다 싶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지금 내가 그렇다. 세상 불행하고 우울한 사람처럼 살던 시절에는 하고 싶은 것이 있었다. 그 당시 나는 사실 앉아서 쉴 여유라는 게 없었다. 평일 낮에는 문구점에서 알바를 하고, 야간에는 전문대학을 가야 했으며, 주말에는 생과일 전문점에서 토스트를 굽고 과일을 손질해야 했다. 사실 그런 패턴의 삶이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아 때때로 숨이 막혔다.

 




알바를 그만두면 친구와 술을 마실 수도 없었고, 내가 사고 싶은 거 하나 제대로 살 수도 없었다. 잔고는 언제나 부족했다. 채워놓으면 거짓말처럼 돈이 사라지는 마법을 그 시절 경험했다. 왜 그랬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아르바이트비를 받으면 절반은 술값으로 썼다. 소주, 맥주, 맛있는 안주를 먹는 일이 20대의 의무인 것처럼 열심히였다.


친구와 일본식 주점에 마주 앉아 어묵탕이 끓어오르면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소주잔을 부딪혔다. 우리 집은 어려서부터 가난했었고, 이렇게 시작되는 노래처럼 나는 그 부분을 반복했다. 내 가난이 펜에 힘을 줄 것이라고도 믿었다. 그땐 확신에 차 있었다. 무슨 자신감이었는지 지금도 당최 알 수가 없다. 문예창작과에 재학 중이었던 나는 거의 내가 반쯤 작가가 되었다고 믿으며 살았다. 집 앞 도서관을 드나들며, 책을 빌리고 반납하며 생각했다.



'작가가 될 사람이라면 도서관에 열심히 드나드는 것이 매우 바람직한 일이지. 이쯤이면 작가가 되어도 어울리겠어.'



당연히 혼자만의 생각이다. 에쿠니 가오리의 '반짝반짝 빛나는'이라는 소설을 읽고 난 뒤 일본문학에 심취하게 된 나는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을 읽고 나서야 다른 쪽 서가로 방향을 바꿀 수 있었다. 그 당시 글을 읽다가 마음에 드는 구절을 발견하면 포스티 잇에 그 부분을 메모해서 방문 앞에 붙여놓았다. 문 앞에 붙어 있는 구절들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내 머릿속을 지배하는 글이다. 손발이 오그라드는 느낌을 피할 수 없는 생각임에도 그때의 나는 문 앞에 서서 자주 그런 생각을 하곤 했다. 간절했기에, 언젠가는 이뤄질 거라고 막연하게 생각해 왔던 내 꿈은 거짓말처럼 내게서 멀어지고야 말았다. 꿈은 손바닥에 쥐고 있는 모래알 같았다. 손에 움켜쥐고 있던 모래알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줄도 모르고 나는 자꾸만 나이를 먹었다.

 




방문에 촘촘하게 붙어있던 메모들은 이사 가는 날 사라졌고, 머릿속을 지배하는 생각도 흐릿해졌다. 장 폴 사르트르의 '구토', 야마모토 후미오의 '연애중독', 마루야마 겐지의 '소설가의 각오', 이외수의 '들개', 이 책들은 내 꿈과 함께 책장에 고이 꽂혀 있다. 시간이 멈춰 서서 가끔 내게 말을 건다.



'지금이야, 늦지 않았어! 아니, 늦었어!'


모두에게 그렇듯 시간은 일정하게 흐른다.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알바도 끝났고, 취업하면 죽을 때까지 행복할 것만 같았던 순간도 허무하게 지나갔고, 결혼하면 행복하기만 할 것 같았던 착각도 적당히 제자리를 찾았고, 아이를 낳으면 저절로 크는 줄 알았던 오해도 다 풀렸다. 우리가 느끼는 시간은 상황에 따라 탄력적으로 형태를 달리한다.


술 한잔 하면서 시간을 보낼 때는 그렇게 빠르게 가던 시간이 회사에 도착해서는 느리게 흘러갈 때, 우리는 그 형태를 느낄 수 있다. 꿈도 마찬가지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반쯤 작가가 되었다고 생각하며 자뻑하던 시절, 내 꿈에는 형태가 있었다. 그것을 하얀 도화지 위에 그려놓고, 채색을 하기도 전에 나는 그 형태를 잊어버린 것 같다. 어떤 모양인지 정확히 기억해 낼 수 없는 걸 보면 말이다.

 




그렇게 한심하게 생각하던 모습의 옷을 내가 입고 있다. '내가 그런 옷을 입을 리는 절대 없을 거야'라고 확신했었던 것이 무색할 만큼 나는 한동안 의욕도, 자신감도 없었다. 계속 이렇게 살아도 괜찮은 것 같기도 했다. 나는 아이를 키우느라 어쩔 수 없었다고 핑계를 댈 수 있으니 나쁠 것도 없다고 느껴졌다. 피곤해서 누워있는 게 나쁜 건 아니니까 말이다. 이렇게 말해놓고도 자꾸 그때가 생각난다. 누워있고 싶지만 작가가 되고 싶어, 이렇게 말했다가는 욕을 한 바가지 먹을 게 뻔하기 때문에 지금 나는 앉아있음을 밝힌다.


한심한 옷을 입고도 나는 여전히 도서관에 가서  책을 고르는 순간이 좋다. 신간의 책등에 당당하게 새겨진 제목을 읽으면서 느낄 수 있는 신선한 공기가 좋다. 새로 쏟아져 나오는 책들 속에서 나와 만날 이야기를 고르고, 시답잖은 생각들로 이야기의 틈을 채우다 보면 어느새 시간은 저만큼 가 있다.


그 무엇도 되지 못한 채로 나이를 먹고 있는 나를, 과거의 내가 알았다면 이래서는 안 된다고 하며 혼쭐을 내줬을까, 그런 상상도 해본다. 섬세한 시선이 살아있던 시절의 나는 모르는 게 두렵지 않아서, 실패해도 실패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아니다. 모르는 것이 두렵고, 실패하는 것이 싫다. 상처 받는 것이 싫고, 앞으로 당차게 나아갈 힘이 부족하다.




우리의 삶은 대체로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물론 계획한 대로 척척 이루며 살아가는 사람도 더러 있을 것이다. 적당한 타이밍에 공부를 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자신의 꿈을 이루는 시나리오에서 이탈했다고 해서 초조해할 필요는 없다. 꿈이 없다고 상대를 한심하게 보던 내가 지금은 그런 상태로 삶을 살면서도 괜찮다고 말하고 있으며, 그런 시간에서 그때의 나를 또 들여다보고 있지 않은가.


인생 총량의 법칙이 있다면, 지금 내게 이 시간은 꼭 필요한 시간이겠지 생각한다. 그런 시간을 나는 요즘 보내고 있다. 파이팅하지 않고 잘 살아나가 보겠다. 나는 나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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