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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으로

by 젼정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에 가서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 누구나 한 번쯤은 하지 않을까. 누군가와 알아가지 않아도 되고, 그러므로 누군가와의 관계에 희망도 고민도 가지지 않아도 되는 인생, 그거 꽤 괜찮을 것 같다.

인간으로 살아가며 불가피하게 인간과 주고받는 상처와 사랑. 보이지 않는 것들을 주고받으며 살아가다가 그런 것들을 주지도 받지도 않는 인생은 어떨까. 문득 그런 생각을 해보았다. 아무래도 좀 외롭긴 하겠지만. 그러기엔 그런 것들에서 느껴지는 사랑이 나를 살아가게 하는 거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그럴 수 있다면 아래 소개할 영화 속 주인공 스즈코처럼 한 번쯤은 훌쩍 떠나보고 싶다.


영화 ‘백만엔 걸 스즈코’의 스즈코처럼 여기로 저기로 떠나가 스스로 고립되고 싶다는 생각을 가끔 한다. 스즈코는 사람들과의 이별이 두려워 그랬을지도 모르지만 내가 그런 생각을 하는 건 그저 나를 보호하고 싶어서이다. 스즈코는 사람들과 최대한 엮이지 않고 조용히 살아가기를 원한다. 그렇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뜻하지 않은 관계가 형성되고야 만다. 그들은 질문하며 스즈코를 궁금해하다 나중엔 멋대로 대한다. 스즈코는 그런 것들을 견디다 백만엔이 모이면 다른 곳으로 떠난다. 그걸로 다 해결되면 얼마나 좋을까. 스즈코는 자기 자신만의 삶의 방식으로 살아가려 애쓰지만 그 안에서도 불가피한 인연이 생기고 그러 인해 다양한 감정을 느낀다. (그것을 ‘고통’이라고 쓰려다가 마음을 바꿨다. 스즈코가 느꼈을 모든 것을 고통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 그런 감정이 고통의 상위에서 뻗어 내려왔을 리는 없다.) 스즈코는 고립 속에서도 사랑을 하고, 타인과의 관계에서 미묘한 감정을 느낀다. 그러다 변한다. 모든 게 그렇듯이 어떤 방식으로든 형태로든 변한다.


어떤 보존료를 넣지 않아도 유효한 마음이나 생각이 있었으면 좋겠다. 모든 건 결국 변한다. (그건 슬픈 일일까. 아니, 다 그런 건 아닐지도 모르지.)




그럴 수 있다면 아무 이유도 없이 바다가 있는 마을에 앉아 모래를 만지고 싶다. 모래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것을 느끼며 하얗게 이는 파도를 바라보고 싶다. 어느 날 꾸었던 꿈을 떠올리고 싶다. 오래전 서서 보았던 겨울 바다 냄새를 기억해내고 싶다. 바다가 있는 마을에 잠시 살아보고 싶다. 오가며 만나는 이웃들과는 가벼운 목례만을 나누며 지내고 싶다. 속마음을 이야기하지 않아 나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속을 알 수 없는 애’라고 한다 해도 괜찮다. 그저 내가 모르면 그만이니까. 알게 되면 괜찮다고 말하면서 속으로는 상처받을지도 모른다. (그럼 나는 나를 시시해하느라 또 시간을 허비하겠지.) 나를 설명하느라 많은 시간을 쓰지 않아도 되는 인생, 그런 인생이 필요한 순간도 있지 않을까. 오늘 이렇게 나를 설명해도 내일의 나는 어제와 다를 수 있기에 이따금 그런 세세한 자기 설명이 점점 부담스럽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나를 설명하고도 돌아서면, 스스로를 잘 설명했나 의심이 생긴다.


스즈코가 복숭아를 건네받고 다른 곳으로 떠날 때, 그냥 그 장면이 좋다고 생각했다. 장소를 옮기는 건 생각의 방향을 옮기는 일이기도 하니까. 잘 익은 복숭아의 까슬한 표면을 벗겨내고 부드러운 속살을 어렵지 않게 이로 깨물고 싶다. 깨물어도 상처받지 않고 그저 달콤할 수 있다면, 복숭아처럼 그럴 수 있다면. 나는 복숭아면 다 좋지만 그중에서 굳이 고르라면 딱딱한 복숭아가 제일 좋다. 연약해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은 게 마음에 든다. 스즈코가 복숭아를 다 먹어가기도 전에 새로운 삶은 시작된다. 그런 삶은 배를 타고 여기저기 표류하는 것과 비슷해 보인다. 지금은 목적지를 정할 수 있고 어디인지 알아낼 수 있지만 예전엔 그것조차 모르고 표류했던 사람들이 분명 있었을 것이다. 그러다 새로운 것을 발견한 이들이 이름이 붙여 놓으면 그곳은 그 이름이 되고야 마는. 어쩌면 이름만 있을 뿐 정말 그곳이 어디인지 우리가 안다고 할 수 있을까. 짐작만 할 뿐이지 알 수 없다. 그렇기에 우리 모두는 언제나 표류하고 있다고, 그렇게도 말할 수도 있다.


어떤 날에는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싶다. 잠든 얼굴이라면 더 그렇다. 잠든 사람이 가 있는 꿈속 어딘가를 상상해보고 싶다. 거긴 어딜까. 내가 영원히 닿지 못할 곳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원해보고 싶다.


아, 그런 것을 원한다고 말해도 될까.


이런저런 기분에 가끔은 자발적으로 고립되고 싶다. 생각지 못한 기분에 놓이고 싶다. 영화 한 편을 통해 기꺼이 이런 식으로. 잠시 어딘가로 멀리 떠나간 것처럼.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으로, 그렇게라도 훌쩍 말이다.

올여름 복숭아를 사서 집에 돌아가는 길, 나는 스즈코를 떠올릴 것만 같다. 어디인지 모르는 곳으로 떠나가는 스즈코를, 두려워 무리하며 지냈던 나날들을, 그리고 무엇인지 모르는 것들로부터 보호받고자 하는 나의 어떤 마음들을.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데려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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