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구덩이에 빠졌을 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더 구덩이를 파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서 얼른 빠져나오는 일이다.
영화 ‘메기’ 중에서
우리는 각자의 구덩이를 판다. 그 구덩이를 가장 깊게 팔 수 있는 사람은 타인이 아닌 나일 확률이 크다. 이런저런 일들 속에서 우리는 각자만의 선택을 한다. 구덩이를 깊게 파지 말자. 언젠가부터 반복해서 생각했다. 슬퍼지는 것도 습관이 된다. 우연히 일어난 일들에 불행을 끼워 맞추다 보면 슬픔의 구덩이도 깊어진다. 그 깊은 구덩이에 빠져 슬퍼하는 것도 때로는 필요한 일일 것이나 그것에 나를 선물하듯 내어 놓을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문득 들기 시작했다. 무척이나 슬프고 우울하게 살아왔다고 할 수는 없지만 나 스스로 내가 밝고 명랑한 사람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거의 없다. 그렇게 보이는 부분이 있을 수도 있지만 그런 사람에 가까울 리는 없다는 사실을 스스로 알고 있다. 모든 감정을 있는 그대로 마주하겠다는 자세로 지내고 있다. 침잠하는 기분이 들면 그것을 단순히 슬픔이라던지 우울이라던지, 그런 식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생각이 깊어져 마음이 조금 무거워진 것 같아. 다시 구덩이 밖으로 나올 수 있어. 그런 식으로 느낀다. 그것이 요즘의 나와 가깝다. 예전에는 구덩이를 깊게 파는 것이 안전하다고 느꼈다. 그 아늑한 곳에 들어가 때때로 온전히 혼자가 되고 싶었다. 그러나 그 구덩이에서 나와야 할 때, 그것이 깊어졌다고 느꼈을 때, 나는 인간이면서도 알지 못하는 인간의 존재, 덕지덕지 만들어낸 의미에 둘러 쌓인 무가치함, 열심히 뜯어 보면 괴상한 듯한 인간의 생김새에 의문을 품었다. 집에서 나와 바깥공기를 들이마실 때마다 세상은 무의미하고 괴상하고 두려운 곳이 아닐까. 중얼거리듯 생각하다 이내 그것을 잊었다. 인간의 눈이 원래 하나였다면, 인간이 영생할 수 있었다면, 미간이 없는 얼굴과 죽음이 없는 각자의 인생을 가끔 상상한다. 다른 생각을 채운다. 구덩이가 평평해진다.
바깥공기를 마신다. 맞은 편에서 걸어오는 인간을 피해서 걷는다. 별 일 없을 거야, 하며 음악을 재생한다. 구덩이의 흔적이 연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