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혹시라도

노래방 애창곡

노래방에서는 다 된다

by 젼정


한때는 술 마시고 노래방 가는 건 거의 코스였다. 노래방을 본격적으로 가기 시작한 건 중학생이 된 이후였다. 초등학생 때는 주도적으로 갔다기보다는 어른들 모임 뒤풀이에 꼽사리를 끼는 수준이었다. 중학생 때는 달랐다. 아주 계획적으로 노래방에 드나들었다. 우리는 꼬깃꼬깃한 돈을 모아 1시간 노래방 이용료를 만들었다. 자주 가는 노래방도 정해져 있었다.


제물포 뒷 역에 있는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 노래방과 동인천 FM노래방, 일 번 출구 노래방을 한동안 꽤 자주 드나들었다. 사춘기 시절답게 늘 도전적인 선곡이 주를 이뤘다.


If you can be 바람 되어 불어 나의 몸을 감싸 안아주렴
그렇게라도 영원히 내게 있어줘
(중간 생략)
만일 내게 올 수 없다면 그대로 사라져 주렴
나 없이 너 행복한 것을 원치 않아

루머스의 '스톰


루머스의 스톰은 제목답게 노래방을 폭풍처럼 휩쓸었다. 노래를 잘하고 못하고는 중요하지 않았다. '나 없이 너 행복한 것을 원치 않아'라는 구절이 끝나면, 우리는 마음속으로 'If you can be 바람 되어 불어' 외쳤다. 누가 마이크를 잡고 있느냐 보다 우리가 함께 이 순간을 외치고 있다는 사실에 큰 의미가 있었다.

걸의 '아스피린'도 심심치 않게 노래방에 울려 퍼졌다. '끔찍한 일이 될 거야. darling. 어른이 된다는 그 상상만으로도 내겐 숨이 막혀버릴 것 같은 고통일 거야.'라는 가사로 시작되는 이 노래를 부를 때는 정말이지 상상도 못 했다. 어른이 된다는 것의 의미 따위는. 우리는 개의치 않고 '이런 제길'을 연발했다. 어쩌면 '이런 제길'을 외치기 위해 그 노래를 그렇게 불렀나 싶기도 하다. '아스피린'은 우리의 스트레스를 '이런 제길'로 치료했고, 분위기는 사뭇 달아올랐다.


터보의 '회상'도 빼놓을 수 없다. 지금은 '헬스'와 '운동'의 상징이 된 김종국의 직업이 원래 가수였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된다. 한 남자가 있어, 가수로 데뷔한 헬스인, 한 남자가 있어, 노래방에서 우리를 시험에 들게 했던 한 남자가 있어. 잊지 말자. 그는 가수다.


보이지 않니 나의 뒤에 숨어서 바람을 피해 잠을 자고 있잖아
따뜻한 햇살 내려오면 깰 거야 조금만 기다려
다시는 너를 볼 수 없을 거라는
얘기를 차마 할 순 없었어
하지만 나도 몰래 흘린 눈물 들킨 거야

터보의 '회상'


그의 노래를 따라 부르다 보면 어느 순간 엉망이 되는 기분에 헛웃음을 짓게 되는 수가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 속으로 따라 불러도 삑사리가 날 것 같은 조마조마한 이 기분을 어찌해야 할까. 난 한 번도 이 노래를 노래방에서 멋지게 부른 이를 본 적이 없다. 시작은 창대하였으나 끝은 어찌하오리까.


보이지 않니, 마이크 뒤에 숨어서 고음을 피해 후회하고 있잖아.

예약한 노래 표시되면 끌 거야 조금만 기다려


스스로 선택하고, 스스로 번번이 중단하고야 마는 이 노래를 우리는 알면서도 또 선택하곤 했다. 그만큼 터보의 노래와 김종국의 목소리는 유일무이했다. 그맘때 시작된 사랑과 이별은 그의 노래를 부르며 삑사리를 남발했던 내 모습과도 닮아 있었다. 그럴듯하게 시작해도 끝은 어설프고 서툴렀다.





내가 노래방에서 자주 불렀던 노래는 박정현의 '오랜만에', 애즈원의 '원하고 원망하죠'를 지나 페이지의 '이별이 오지 못하게', 태연의 '만약에' 이른다. 가끔 친구와 함께 쥬얼리의 '니가 참 좋아'를 부르며 어설프게 탬버린을 흔들어보기도 하고, 이자연의 '찰랑찰랑' 가사에 취해 닿지 못할 흥에 취해보기도 했지만 결국 나는 발라드가 좋았다.


나 이제 그대에게는 그저 오랜만에 만난
친구인가요 추억인가요
그대에겐 너무 쉬운걸

박정현의 '오랜만에'


박정현의 '오랜만에'를 부르면 가슴이 절절해졌다. 우연히 내 소식을 듣고 너무 반가웠다는 가사에 나는 정색하지 못했다. 상대에게 그 어떤 존재로도 남을 수 없었던 그 시절 나의 초라한 마음은 노래방에서 진가를 발휘했다. 이 노래를 부르기 위해 모든 아픔을 견딘 사람의 얼굴을 하고, 나는 노래했다. '오랜만에'에는 차마 털어놓지 못한 내 마음이었다. 누구에게도 쉽사리 말할 수 없었던 그때의 감정이 그 노래에 있었다.


애즈원의 '원하고 원망하죠'는 그야말로 '원망에 의한, 원망을 하기 위한' 노래였다. 노래는 체념하듯 시작한다. 상대와 내 마음이 같지 않을 때의 아픔은 엇갈린 차선을 달린다. 목적지가 다른 걸 알면서도 우리는 하염없이 멀어지는 상대를 바라본다. 어떻게든 붙잡아 보고 싶다. 나를 사랑해서 만나는 게 아니라는 걸 알지만 그의 곁을 떠날 수 없다. 상대를 원하고 원망하던 우리는 정신을 좀 차리나 싶다가 이내 제자리로 돌아오고야 만다. 내가 원하고 원망해봤자 상대의 마음은 내 곁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오직 노래만이 나와 함께 한다.

'이별이 오지 못하게'는 나의 귀가를 재촉한 드라마 '로망스'에 나왔던 노래다. 그 노래를 부를 때마다 김하늘이 여리여리한 얼굴로 눈물을 떨구던 모습을 떠올린다. 나의 다부진 체구를 잠시 잊고, 드라마 로망스의 김채원(김하늘) 선생님이 되어 본다. 그 기회를 놓칠 수는 없다.


내가 바보 같아서
바라볼 수 밖에만 없는 건 아마도
외면할지도 모를
니 마음과 또 그래서
더 멀어질 사이가 될까 봐

태연의 '만약에'


소녀시대 태연의 가창력을 여실히 보여주는 이 노래는 최근 놀면 뭐하니 MSG워너비(M.O.M)를 통해 다시 재조명되었다. 왜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는지. 미래를 알 수 없다는 말과는 다르게 때로는 눈에 그려지는 상황이 있다. 우리는 그 상황을 외면하지만 결국엔 알게 된다.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거절을 거절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상대의 거절은 내 마음을 아리게 한다. 그래서 우리는 '만약에'를 부른다. 상대의 마음을 알면서도, 그 마음을 묻는다. 바라보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하는 현실, 더 멀어지는 것이 두려운 마음은 점점 고조되고, 어쩔 도리가 없는 우리는 울지 않고 운다.


사연 없는 사랑이, 사랑이 어디 있으랴. 우리는 노래방에서 저마다의 아픔을 담아 노래를 부른다. 기쁘고, 설레는 애창곡이 많은 사람의 사연도 궁금해진다. 왜 그 노래를 좋아하게 된 건지, 노래를 부를 때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 사람에게 노래방의 애창곡은 어떤 의미인지 알고 싶다.


오랜만에 노래방 애창곡을 떠올렸다. 원하고 원망해도, 만약에 니가 참 좋으면 찰랑찰랑 이별이 오지 못하게 해도 될까? 노래방에서는 다 된다. 그러니까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목놓아 노래를 부르는 것이다. 노래방에서 노래를 혼자 부르다가 내가 힘들어하면 누군가 마이크를 켜고 거들어 주는 순간 우리는 우정과 화합을 확인한다. 1절이 끝나고, 2절을 기다리는 순간 허락 없이 누른 간주 점프와 종료 버튼은 미묘하게 서운한 마음을 드러내게 한다.

마지막 노래를 고르는 순간은 또 어떠한가. 노래방 주인이 추가 시간을 넣어줄 때 우리가 함께 환호했던 순간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노래방 주인과 밀당을 한지도 참 오래되었다.


노래방에서 내 앞머리를 잘라주던 헤어 디자이너 지망생은 중도 포기를 선언했고, 체리필터의 '낭만 고양이'를 함께 세상 떠나가라 불렀던 친구는 이제 멀어지고 곁에 없다. 퇴근 후, 오락실 코인 노래방에서 스트레스를 함께 풀었던 직장 동료들도 이제 각자의 길을 찾아 떠났다.

노래방 애창곡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아무리 신곡이 나와도 유독 노래방에서 통하는 노래가 있는 법이다. 노래방 추가시간이 더 이상 주어지지 않을 때, 우리는 마지막 노래를 예약해야 한다. 그 순간이 올 것을 알면서도 우리는 늘 허둥지둥 버튼을 누른다.


내가 오늘 마지막으로 고른 노래는 델리스파이스의 '고백'이다. 마지막 노래는 간주 점프 없이, 천천히 끝까지 불러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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