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건 적응해도 이건 좀 힘들어
우연의 일치일까.
제가 오랜 기러기 생활을 마치고 집에 오자, 기다렸다는 듯이 숨겨져 있던 문제들이 수면 위로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마치 이 날을 기다렸다는 듯이 말이죠.
먼저 그동안 멀쩡했던 건조기가 말썽이었습니다. 모터가 작동은 하지만 열이 가해지지 않았기에 건조기로서의 역할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한국에서 애써서 들고 온 노트북은 전원을 종료하고 나니 다시는 켜지지 않습니다. 집안에 고이 모셔두었던 모니터는 그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원을 켜면 검은 화면만 보여줄 뿐 아무 소식이 보이지 않습니다.
지인과 약속이 있어 우버를 타고 이동해야 하는 날에 물가를 다시 한번 더 실감합니다. 한국에서 택시비를 타도 만원 정도로 갈 수 있을 듯한 거리를 $50을 줘야 움직입니다.
미용실에 가야 하는 날에도 그렇습니다. 2만 원을 내도 커트하는데 아무런 불편함이 없었는데, 팁까지 포함하여 $40~$50은 내야 별다른 무리 없이 커트를 할 수 있습니다.
거기에 한국에서 당연하게 생각하는 건강보험은 사치인 것 같습니다. 3인 가족 기준으로 한 달에 $2,000이 넘게 들어가는 건 기본이었습니다.
이곳은 모든 것이 비싼 나라입니다. 보통은 비싼 것이 있다면 싼 것도 있어야 하는데, 모든 것이 비쌉니다.
이번달에 납부해야 하는 전기세, 수도세 고지서, 모기지, 그리고 재산세는 정말 순간적인 좌절을 경험하기에 충분합니다. 사실 10개월가량 되는 기러기 생활을 청산하게 만든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한국에서 받는 월급으로 이 미친 물가를 감당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달러-원 환율은 오늘로 1380원, 앞으로도 나아질 기미는 좀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일단 오늘은 건조기를 수리하기 위해 기술자를 불렀습니다. Service Fee $80이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오산이었습니다. 그는 중요한 부품을 교체해야 한다고 했고, 수리에 들어간 총비용은 $295 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시원하게 지출을 하고 나니 노트북이나 모니터를 고쳐야겠다는 생각은 접게 되었고, 아내가 과거에 쓰던 오래된 노트북을 가져와, 이걸로 대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래도 다행히 오늘 날씨는 너무 좋았습니다. 이런 고민들을 잠시나마 있게 해 줄 정도로.
사실 이런 환율 차이와 물가 차이가 아니었으면 미국행을 고민하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매달 가족들에게 들어가는 생활비와 모기지와 보험을 한국의 월급으로는 감당하기가 어려웠기에 결단을 내리지 않으면 안 되는 순간이 도래하게 되었습니다. 이 차이가 새로운 도전을 하도록 저를 밀어준 것이기에 먼 훗날에 돌이켜 보고 정말 잘한 선택이었다. 그런 상황이 되어서 오히려 감사했다라고 생각하는 날이 오기를 바라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