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개월간 혼자 살며 느낀 것들
주재 생활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갔을 때 건강은 지나치게 악화되어 있었다. 고지혈증, 당뇨, 거북목에 기본 체력은 바닥이 난 상태였다. 한 번은 점심 식사를 하고 선임 부장님들이 계단으로 사무실에 오르자고 하였는데, 계단 오르기를 하다가 숨이 멎기 직전까지 갔던 경험을 하였다.
그래도 주재 생활을 마무리했다는 점에서 한 고비를 넘어왔다는 생각이 들어 나쁘지 않았다. 본사에 있던 분들이 내 소식을 모두 들어서 알고 있다는 점이 신기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내가 겪었던 일들이 나름 유명세를 타고 많은 곳에 전해졌다고 했다. 물론 흔하게 일어나는 일들이 아니었다.
부모님 댁에 기거하며 출퇴근을 했는데, 약 50km 거리를 매일 왕복을 하게 되었다. 회사에서 제공하는 통근 버스를 타고 가면 1시간 반, 대중교통을 이용하면 2시간이 걸리는 거리였다. 운전해서 가면 운 좋을 때 1시간 안에 갈 수 있었다.
한국으로 돌아오면서 와이프에게 3개월 안에 어떻게든 미국 취업을 해서 돌아올 거라고 약속을 했기 때문에, 부모님 댁에 머무는 것 이외에는 다른 방법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그 먼 통근 거리를 출퇴근을 해야 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출퇴근을 하면서 많은 생각도 하게 되었고, 심심하지 않게 보냈기 때문에 나에게는 나쁘지 않았다.
오래간만에 본사에 돌아와 보니 나름 격세지감을 느끼게 되었다. 먼저 조직 분위기가 예전과 많이 달라진 것을 느꼈다. 모두가 좀 더 편안해지고 느긋해진 느낌이 들어 좋았다. 반면 예전부터 알고 지냈던 분들의 머리가 좀 더 희끗해지고 주름도 늘어난 것을 보고 세월이 많이 지났다는 느낌을 받게 되었다. 사람에게 시간이 유한하다는 말이 와닿았다. 헛살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다시 들게 되었다.
낮에는 출근해서 일하고 밤에 집에 귀가해서는 이력서를 넣고 인터뷰를 보았다. 100군데 이력서를 넣으면 5군데에서 연락을 받았다. 그러면 항상 한국 시간 밤 10시-12시 사이에 인터뷰를 잡았다. 면접관의 시간이 맞지 않으면 새벽 1시-2시에 보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한 번은 11시에 면접을 보기로 되어 있었는데, 그날따라 너무 피곤한 나머지 10시 30분에 알람을 맞춰 놓고 수면을 취했다. 알람이 울렸지만 일어나기가 너무 힘들어, 10분만 자기로 다짐하고 눈을 붙였다. 잠시 후에 뭔가 싸한 느낌이 들어 시계를 보니 이미 시간은 10시 57분이었다. 아뿔싸! 나는 PC 앞에 앉아서 노트북을 부팅시키고 머리를 빗었다. 화상 프로그램을 론칭했지만 쉽게 열리지 않았다. 그러면서 내 모습을 거울로 보니 상의를 입고 있지 않았다. 한 손으로는 PC를 만지면서 한 손으로 옷을 입었다. 이미 시간은 11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당연히 그 면접은 망했다.
주말은 아내와 아들에게는 가장 힘든 시간이었다. 아들이 학교를 가지 않고, 아내가 온전히 24시간 육아를 했지만 체력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지탱하기가 쉽지 않았다. 문자와 화상 전화로 아내의 원망을 들어야 했지만, 주말은 온전하게 운동을 하거나 이력서를 넣거나 독서를 하는 데 좋은 기회였다. 처음엔 친구도 만나고 영화 감상도 했지만, 미국에 생활비를 계속 보내면서 재정이 바닥났고, 근처 카페에서 지원서를 쓰는 것으로 여가 생활을 만족해야 했다.
돈은 항상 부족했지만 그래도 세상엔 공짜로 즐길만한 것도 많았다. 회사에서 같이 일하는 동료와 쉬면서 고민을 들어주는 것도 그랬고, 식사 후 산책을 하면서 좋은 날씨를 즐기는 것도 그랬다. 회사 내에 마련되어 있는 도서관에서 책을 빌리는 것도 즐거운 일이었다. 일을 하다 짬을 내서 회사 지하에 있는 50m 풀에서 수영을 하고 나면 기분이 왠지 모르게 개운했다. 수영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운동이 되었다.
항상 마음 한편에 가족이 있었다. 낮에 일을 하고 밤에는 면접을 준비하는 일에 정말 최선을 다했다. 예상 문제를 조사하고 거기에 맞는 답을 쓰고 인쇄해서 책상 앞에 붙여 놓았다. 화상 면접을 하다가 막히면 참고하려고 만든 커닝 페이퍼였는데, 그것을 보고 읽을 만큼의 틈이 면접 중에는 잘 만들어지지 않았다. 답변하고자 하는 콘텐츠가 머릿속에 들어 있지 않으면 낭패를 보기 십상이었다.
아내에게는 3개월 안에 돌아가겠다고 했지만, 이 생활을 좀처럼 끝나지 않았다. 내 형편없는 영어 실력과 적은 인터뷰 경험으로 취업의 문을 통과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 생활을 마치고 가족에게 돌아가기 위해서는 반전과 기적이 필요했다. 이 생활이 길어질 거라는 것을 어느 정도 예감하게 되었다.
어쩔 수 없이 휴가를 내고 뉴욕행 비행기를 탔다. 가족들을 오랜만에 만나고 진정시키기 위해서였지만, 막상 도착해서는 시차 적응을 하느라 잠을 자며 1주일을 보냈다. 그리고 또 한국에 돌아와서 시차 적응 하느라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운 날이 많았다. 하지만 다행히 회사의 업무 강도는 감당할 만했기 때문에 힘들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해외 생활을 하면서 체득한 업무로 인해 더 즐겁게 일할 수 있어서 좋았다.
미국에 돌아온 지금 돌이켜 보면 힘든 기억보다는 즐거운 기억으로 남아 있다. 주경야독을 하는 학생처럼 밤에 인터뷰를 보며 답답한 마음이 많이 들긴 했지만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고, 그 안에서 마음이 짠한 순간도 몇 번 있었다. 내가 퇴사하고 미국으로 오기 전날에 모두가 응원하며 작별을 고했다. 그들을 두고 떠나는 마음이 작별의 아쉬움을 느끼도록 했다.
10개월이 짧은 기간일 수도 있지만, 나에게는 잊고 살기에는 어려울 만큼 강한 인상을 남긴 시간이었던 것 같다. 그 시간 동안 나는 선명한 꿈을 가지고 있었고, 그 의식이 나를 움직이게 하고 기도하게 했다. 꿈이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꿈이 있는 사람은 자신의 꿈을 이뤄줄 가치를 찾게 되고, 그것이 진실된 가치가 아니면 꿈을 이룰 수 없다. 앞으로의 인생에 남아 있는 시간을 어떻게 보낼지를 조금이나마 알게 된 소중한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