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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생활 3개월 반

비일상이 일상이 되어가다

미국에 도착한 지 이제 3개월 반이 되어간다. 처음 왔을 때만 해도 전형적인 가을 날씨였다. 오래된 자전거를 끌고 동네 한 바퀴 돌거나 산책을 하는 것이 가능했지만, 지금은 매일 그날의 최고 기온이 얼마인지를 습관적으로 확인하게 된다. 어떻게 보면 시간이 참 빠르기도 하다.


여기에서 가장 많이 바뀐 것은 생활 패턴이다. 한국에서 직장 생활을 할 때는 아주 이른 시간에 집을 나서지 않으면 셔틀버스에 오르기 힘들었다. 때문에 새벽 공기를 마시며 한참을 걸어 공사장의 인부들이 조식을 먹으러 식당 앞에 서 있는 광경을 보며 버스에 오르곤 했다. 출근 시간이기 때문에 1시간 30분 정도 걸려 회사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 식당에 들러 그날 먹을 것들을 챙겨 사무실로 들어갔다. 그리곤 자리에 앉아 그날 해야 할 일들을 하나씩 해결하다 보면 다른 동료들이 찾아와 회의도 하고 커피도 마시다 보면 점심시간이 찾아왔다. 나는 주로 매번 점심 약속을 잡기가 번거로워서 식사는 10분 안에 마치고, 회사 안의 헬스장을 이용하곤 했었다. 한국의 업무는 임원의 지침과 지시 사항을 수행하는 것이 가장 중심이 되었기 때문에, 그것들을 어떻게 만들어 낼지 고민하고 회의하는 것이 주된 일과였다. 하루 종일 그것들과 씨름하고 나면 저녁이 찾아오고 가끔 동료들과 회사 근처의 맛집에서 저녁을 보내거나, 부서 회식비를 소진하면서 보내곤 했었다. 딱히 행복하지는 않았지만 심한 스트레스를 받지 않았고, 다만 매일을 그렇게 보내면서 나에게 얻는 것은 별로 많지 않았다. 자기 성장에 대한 큰 기대를 안고 입사한 후배들은 그것들과 매일 씨름해야 했다.


미국에서의 생활은 조금 다르다. 일단 내 차가 없으면 이곳에서 출퇴근은 불가능이다. 그렇다고 한국보다 주유비가 싸거나 보험료가 싼 것이 아니지만... 어쨌든 가구 성인 1명당 1대씩이 필요하다. 우리 집은 도심 외곽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이곳에서는 대부분의 업무가 미팅을 하면서 팀 전체가 움직이도록 흘러가기 때문에 의사소통에 더 집중하게 되는 것 같다. 미팅으로 일정이 가득 찬 날은 다소 정신이 없지만, 그렇지 않은 날은 문서 작업을 하거나 다른 미팅을 준비하면서 보내기도 한다. 이직해서 일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되기 때문에 이곳에서 친한 사람은 별로 없다. 대부분 점심시간에는 혼밥을 하지만 전혀 개의치 않는다. 짧은 시간에 식사를 하고 근처 산책을 하면서 만보계의 걸음걸이를 늘리거나, 아니면 벤치에 앉아 경제 유튜브를 듣곤 한다. 그러다 보면 짧은 점심시간이 훌쩍 가버린다. 이직한 곳은 한국회사의 미국 법인이기 때문에 한국 문화와 미국 문화가 공존하지만, 때로는 두 문화가 섞일 수 없는 지점이 있다. 퇴근 시간이라던가, 가끔씩 벌어지는 주말 출근, 그리고 재택근무 같은 미국 특유의 업무 바이브는 한국적 마인드와 섞일 수 없는 부분이 있다. 정확히 말하면 경영자 위치에 있는 구세대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지점이 있는 것이다. 이것으로 인해 스트레스를 가장 많이 받는 부류는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는 신세대 어린 사원들이다. 현상 이면에 어떤 이유가 있는지 제대로 알지 못한 채, 모든 페널티를 받아야 하는 입장은 유지하기 쉽지 않다.


영어를 쓰는 일은 아직도 어렵다. 현지인들과 동일한 콘텍스트에서 소통을 하는 것은 여전히 나에게 숙제로 남아 있다. 솔직히 이 사람이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 많이 있다. 상대방은 내가 맞장구를 쳐주던지 내 의견을 어떻게든 이야기해 주기를 기대하고 말을 건네겠지만, 그 기대에 부응하지 못할 때가 종종 있다. 그럴 때면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나는 40년이 넘게 한국에서 살았고 고국의 마인드를 버릴 수 없다. 아직 나에겐 배울 것이 많이 남아 있다. 특히, 퍼블릭 스피킹은 한계를 느낄 때가 정말로 많다. 오히려 그런 때일수록 굳이 길게 이야기하기보다는, 내 생각을 심도 있게 정리해서 짧게 이야기하는 게 효과적일 때가 많다. 연습이 정말 많이 필요한 영역이다. 그래서 지금은 오히려 실수할 것을 각오하고 부딪쳐 보고 뭐든 배워 보자는 식으로 접근한다. 오늘 망하면 내일은 그래도 조금은 나아지겠지. 이렇게 익숙해지는 것 아닐까 라는 다소 독단적인 생각을 갖고 도전해 보는 방법밖에는 없는 것 같다.


이곳의 물가는 정말 비싸다. 한국은 그래도 많은 분야에서 공공의 지원을 받는다. 건강 보험, 수도세, 전기세, 재산세 등등 한국은 이곳에 비하면 앞서가는 복지국가다. 서울 시내에서 노숙인은 최근에는 그렇게 많이 눈에 띄지 않는다. 하지만 뉴욕 시내에만 나가보더라도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밤늦게까지 자유롭게 돌아다니고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환경이 가끔 그립기도 하다. 미국에 온 지 3개월이 넘어가는 지금, 많은 것이 결핍되어 느껴지고 한국이 그립기도 하지만, 어느 곳이든 장단점이 있고 극복해야 할 부분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오늘은 눈이 많이 온다. 이런 날은 앞마당을 치워 놓아야 하는데, 이것은 시간과 노력이 드는 일이다. 돈을 받고 집집마다 눈을 치워 주는 사람도 있지만, 그 역시 너무나 임금이 비싸다. 내 몸을 움직여서 뭐든 하는 것이 지출을 절약하는 길이다. 돌이켜 보면 내가 살아오면서 내 의지로 뭔가를 강력하게 선택해서 진로를 틀어본 일은 많지 않았다. 초등학교를 졸업하면 중학교에 진학하고, 이후에 고등학교와 대학교에 진학하는 식이었다. 직업을 선택할 때도 남들이 다 지원하는 회사에 지원에서 그곳에 터를 잡고 일을 해온 것뿐이었다. 하지만 이번은 그런 삶에 결별을 선언하고 내가 가야 할 길을 선택한 어떻게 보면 최초의 사례였던 것 같다. 가족이 내 삶의 가장 우선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고, 우선순위를 명확하게 하다 보니 여기까지 오게 된 것 같다. 그럼 지금 내 삶의 우선순위는 어떻게 생각할 수 있을까? 2순위와 3순위는 어떤 것들이 오게 될까? 미래에 일어날 일들이 한편으로는 두렵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예비된 길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그저 걸어가는 수밖에. 인생은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항로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나는 자유롭고 용기를 가진 존재 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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