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과는 물론 많이 다르겠지만
한국의 대학 입시에 대한 열정은 광풍이라 할 만하다. 모두가 하늘의 별이 되고자 한다. 하지만 별이 될 수 있는 자격은 모두에게 주어지지 않는다. 지금은 태평양 건너 먼 타국에서 살고 있기에, 한국의 입시는 나에게는 수십 년 전에 겪었던 학생 시절의 열정 정도의 기억으로 남아 있다. 하지만, 그것은 누구에게는 평생을 안고 가는 좌절의 기억이자, 다른 누구에게는 평생을 자랑스럽게 내세우는 트로피와 같은 경험이다. 나는 한국을 떠나오면서 내가 쌓아온 모든 것들을 한편으로 부정하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내가 이 땅에서 생존하기 위해 애써왔던 것이 얼마인데, 학업을 비롯해서 사회에서의 경쟁과 무거운 스트레스를 겪고 여기까지 왔는데 새로운 대륙에 가서 또 어떻게 생존을 해야 하나 걱정이 앞섰던 것은 사실이다.
나는 이미 대학을 졸업한 지도 한참이 지났지만, 정말 재미있는 사실은 대학 입시에 대한 사람들의 열정과 걱정 그리고 열망은 그때나 지금이나 또는 과거나 현재나 한치도 바뀐 것이 없다는 사실이다. 다만 모두가 선호하는 분야는 변화가 있었던 것 같다. 로스쿨이 생기고, 엔지니어가 설 자리가 제한되면서 이제 모두의 관심은 의학으로 옮겨진 것 같다. 이쯤 되니 몇 년이 지난 뒤의 관심은 또 어디로 옮겨갈지 궁금한 생각이 든다. 대학이 한국 사회의 화두가 된 것은 그것이 사회적 위치를 결정짓는 중요한 척도이자 시작점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과의 비교에 민감한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상식적인 이야기이기도 하다.
지금은 학생이 원하는 과목을 선택하고 수시의 폭도 넓어지면서 입시 제도가 다양화되었지만, 나는 불행인지 다행인지 수시도 없었고 모든 학생들은 수능을 치러야 했다. 선택과목도 없이 모든 과목을 통째로 (본인이 좋건 싫건) 공부해야 했고, 수능이 시작된 지도 몇 년 되지 않아 한정된 기출문제로 수능의 출제 경향을 예측해야 했다. 지금과 같은 인기 일타 강사들의 온라인 수업도 없었고, EBS를 통해 수강하는 방송 강의가 전부였던 시절이었다. 물론 그때도 대치동의 일부 과외나 학원들이 있었지만 지금처럼 성업하는 시절은 아니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런 환경이었기에, 조금만 신경 써서 공부를 하면 성적을 올릴 수 있는 기회가 있었던 시절이기도 했다.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반지하 집에서 살며 변변하게 과외나 학원 수강도 할 수 없었던 나에게는 오히려 기회였다.
나의 공부 방법은 매우 비효율적이었다. 학교 수업을 따라가기 바빴고, 특히 수학은 너무나도 실수가 많았다. 정답이 떨어지는 과정을 풀이해 낼만큼의 집중력과 창의력이 나에게는 없었다. 중학교 3학년에 들어서서 특목고 진학에 도전했지만, 내 공부법은 경쟁력이 없었다. 전국의 수많은 학생들과의 경쟁에서 앞서나갈 수 없었고, 나는 일반고에 진학해야 했다. 고등학생이 되었지만 나는 방황했다. 내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내가 어떤 가치를 추구해야 하는지, 친구들과의 관계는 어떻게 유지해야 하는지 잘 알 수 없었다. 한참 동안 공부와 담을 쌓는 생활을 했었다. 학교 수업이 끝나면 늦은 시간까지 자율학습을 하다가 집에 돌아왔는데, 하나도 집중이 되지 않았다. 왜 공부를 해야 하는지에 대해 답을 내릴 수 없었다. 요즘 유튜브를 보면 일타강사들이 학생들에게 동기부여하는 영상들이 많은데, 그때는 그런 이야기를 해주는 어른들이 많지 않았던 것 같다.
그렇게 한참을 지내다가 고2에 올라가면서 나는 왠지 모를 불안감이 나의 모든 것을 뒤엎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누구도 나에게 직접적으로 말하진 않았지만, 나는 대한민국의 사회 구조가 나에게 말을 건네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계속 이렇게 가다가 나의 마지막은 어떻게 될지, 이 사회에서 내 목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그대로 묻혀 버릴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고1이 끝나갈 무렵에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도전해 보고 후회할 일은 남기지 말자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해의 마지막 모의고사에서 반에서 1등을 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이때의 경험이 나의 이후의 생활을 통째로 바꿔버리게 되었고, 나는 더욱더 공부에 매진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날 이후로 깨어 있는 모든 시간은 모두 공부하는데 투자하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너무나도 무리하고 비효율적인 짓이었지만, 어쨌든 투입되는 시간이 많으니 조금씩 산출되는 결과가 생기기 시작했다.
고2에 올라가서 계속 반에서 1등으로 자리매김했지만, 그다음은 전교 석차에 욕심을 내게 되었다. 나의 전교 석차는 항상 4등이었다. 내 앞의 3명은 정말로 명석한 녀석들이었다. 그들은 나처럼 무작정 모든 시간을 공부에 쏟아붓지도 않았고, 나처럼 수학을 어렵게 여기 지도 않았다. 나는 모든 교과 내용을 암기하고 무조건 문제를 많이 풀어보면서 문제 유형을 익히려고 했던 반면에, 그들은 개념을 이해하고 창의적인 방식으로 문제 풀이를 하려고 했기에 공부 방법이 훨씬 효율적이었다. 당연히 적은 시간을 투입해서 더 좋은 결과를 낼 수밖에 없었다. 그 3명의 친구들이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어디서든 한 자리씩 하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고3이 되면서 정말 끝장을 볼 때까지 봐야겠다는 다짐만 남게 되었다. 아침에 눈을 뜨는 시간부터 잠드는 시간까지 문제 풀이를 하고, 오답을 정리하고, 모르는 개념을 정리하는 것으로 15분 단위로 계획을 짜고 생활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효과적인 공부 방법을 모르고 있었다. 다만 투입을 늘리는 전략만 계속해 나가고 있었다. 졸업하는 날까지 나는 내 앞의 3명의 명석한 친구들보다 앞서 나갈 수 없었다. 딱 거기까지가 나의 한계였다. 아무리 해도 안 되는 벽이 있다는 것을 태어나서 처음으로 깨닫게 되었다. 실제로 수능 시험을 치렀을 때, 수능이 시작된 이래로 처음으로 쉽게 출제가 되었다. 당시 사교육 시장이 커지면서 불공정 문제가 사회적으로 이슈화되면서 수능을 쉽게 출제해서 공교육의 기능을 강화하겠다는 교육부의 전략이었다.
나는 기존의 문제 유형에서 벗어난 공부방법을 추구하지 않았기에, 나에게 유리한 변화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시험을 망친 것은 아니었다. 내가 지원할 수 있는 대학과 학과는 내 수능 성적에 따라 결정되었다. 결국 내가 진학한 곳은 K대 문과대학이었다. 내가 목표로 했던 대학도 아니고 인기 있는 학과도 아니었기 때문에, 대학 1학년 1학기 내내 반수를 할지 말지 고민해야 했다. 하지만 경제적인 사정과 앞으로의 진로를 생각했고 굳이 반수를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그래도 태어나서 처음으로 마음고생했던 고3을 끝낼 수 있다는 게 후련했다. 아마 지금의 대학입시를 준비 중인 학생들은 그때보다 더 복잡해진 입시와 치열해진 경쟁으로 더 많은 고민을 하고 있을 것 같다. 만약 나에게 그 시절로 돌아가 고3 입시를 다시 경험해 보라고 한다면, 어떻게 하면 더 효율적으로 공부할 수 있을지를 더 많이 고민해 볼 것 같다. 요즘은 입시 전략을 컨설팅하는 서비스도 크게 유행이라고 하는데, 그런 것들을 활용해 보는 것도 도움이 될 것 같다.
사실 사회의 최상단에 성공을 이룬 사람들을 보면 모두 좋은 대학을 나온 사람들은 아니다. 좋은 대학이 성공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대학 시절을 보내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그 인연의 도움으로 조금씩 앞으로 나갔던 좋은 기억들은 여전히 가지고 있다. 세상을 살아가는 데 정답은 없다. 다만 오늘 하루를 보람차고 행복하게 보내기 위해서는 많은 사람들의 도움과 나의 의지와 열정 그리고 좋은 계획이 필요한 것은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