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랑하는 나의 친구 2
소미의 방은 이층이었다. 아래층에는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와 이모가 살았고 이층에는 소미네 가족이 살았다. 예전에 우리가 함께 누워 잤던 침대는 그대로 있었다. 저녁을 먹은 뒤 소미와 나는 이층 테라스에 앉아서 저녁노을이 지는 풍경을 지켜보았다. 나의 친구는 좀 더 뚜렷해진 얼굴을 붉은빛으로 물들였고 그 때문에 이미 성숙한 여자처럼 보였다.
“있지, 요즘 내가 무엇에 빠져있는 줄 알아? 연극이야. 봄부터 연극반에 들어갔어. 그런데 너무 재미있는 거야. 거기 모인 애들은 남다른 데가 있어. 다른 사람이 되어본다는 것이 내 가슴을 이렇게 뛰게 할 줄 몰랐어.” 눈을 반짝이는 나의 친구는 내가 모르는 어떤 장면을 떠올리는 듯했다. 그 장면은 깜깜한 어둠 속에 있을 뿐 내게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예전엔 그러지 않았는데. 소미가 말하는 모든 장면을 내가 알고 있었고, 내가 말하는 것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이제 소미는 나와 함께 할 만한 장면이 없어진 것 같았다.
여름밤의 어둠이 다가오고 간혹 바람이 불고 바닥에서는 뜨거운 열기가 올라왔다. 멀리 보이는 건물들은 모두 반짝이는 불빛 속에 서 있었다. 갑자기 내가 있는 곳이 주눅이 들 만큼 낯설었다.
“나는 연기를 계속하고 싶어. 이건 비밀인데 어떤 애들은 담배를 피우기도 해. 그곳에선 그게 뭐든 경험해야 한다는 분위기거든.”
나는 깜짝 놀랐다. 우리는 겨우 중학교 2학년이었다. 나는 학교에서 그런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서울은 모든 면에서 다를 뿐 아니라, 소미가 점점 더 멀리 다른 세계를 걸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사랑하는 친구는 이제 사라진 걸까? 소미의 얼굴에는 이전에 본 적 없는 달뜬 기대와 흥분이 피어났다.
“지금의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는 게 좋아. 그래서 그래.”
소미는 나를 향해 얼굴을 돌리더니 아름다운 미소를 지었다. 마치 이제 안녕이라고 말하듯이.
다음 날, 우리는 여의도 광장에서 자전거를 탔다. 소미 엄마가 친구가 왔는데 놀러 갔다 오라고 했지만, 더운 날씨 때문에 소미는 나가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러다 오후쯤 집을 나섰다. 대구에는 없는 지하철을 타고 것도 신기했고 한강 다리를 건너면서 보이는 풍경도 멋있었다. 소미는 “저기가 63빌딩이야. 엄청 높지?” 같은 말을 해주었다.
여의도 광장은 상상한 것보다 훨씬 넓었다. 끝이 아득하게 멀고 양옆으로 높은 빌딩들이 서 있었다. 여름인데도 불구하고 꽤나 많은 사람들이 자전거나 롤러스케이트를 타고 있었다. 우리는 자전거를 빌려서 뜨거운 햇볕 속을 달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우리는 그늘에 앉아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연극 공연은 언제 하는 거야?”
소미에게 물었다.
“이번 겨울에 ‘햄릿’을 공연할 건데 난 거기서 햄릿의 삼촌인 클라우디우스를 맡았어.”
“와, 멋지다.”
나는 ‘햄릿’을 아직 읽어보지 않았고 그래서 햄릿의 삼촌이 어떤 사람인지도 알지 못했다. 하지만 소미가 무대에 올라 연극하는 모습을 상상하니 꽤나 어울릴 것 같았다.
“우리 아빠, 돌아가셨어.”
소미는 아이스크림 껍질을 휴지통에 버리고 나서 갑작스럽게 말했다. 나는 소미의 말에 놀라 그저 멍하니 쳐다보기만 했다. 편지에도 없던 말이었다.
“언제?”
“서울 올라오고 나서.”
소미는 이런 이야기가 나를 부담스럽게 할까 봐 마음이 쓰였는지 연극 대사를 하듯 덤덤하게 말했다.
“예전부터 아프셨어. 엄마는 자세한 이야길 해주지 않아. 나는 부모님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잘 몰라. 내가 좀 더 자란 후, 엄마가 모든 걸 얘길 해주실까? 그건 모르겠어. 어른들은 나쁜 것들이 언제까지나 숨겨진다고 생각하나 봐.”
나는 아버지를 떠올렸다. 아버지가 죽는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 그러나 그런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죄를 짓는 것 같아 마음이 불편해졌다. 나는 차마 소미에게 그래서 넌 어떤 기분이니?라고 물어볼 수가 없었다.
“난 아버지가 없었으면 할 때가 많아.”
“왜?”
“그냥 좀 무서우셔.”
그러고 보니 소미에게 우리 집에 대해 얘기한 적이 없었다.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까. 우리는 정작 지하에 맴도는 어둠에 대해서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말해야 할지 알지 못하던 때였다. 그래서 더 친구가 필요했고 다른 세계를 갈망했다.
“우리 한 번 더 돌까?”
소미가 일어나며 말했고 우리는 조금 누그러진 햇볕 속으로 달려나갔다.
그날 저녁 식탁에는 소미의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 그리고 소미의 이모가 함께 앉았다. 소미 엄마와 동생은 무슨 일인지 외출하고 없었다. 나는 첫째 날 보지 못한 소미 집의 그늘을 조금 눈치채게 되었다. 그들은 온화하고 친절했지만 무언가를 누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조금이라도 방심했다가는 모든 게 흘러넘칠 것처럼. 나는 식탁에 깔려 있는 자수가 놓인 식탁보를 만지작거렸다. 식탁보 아래 있는 흉터가 드러나지 않기 위해 얼마나 애를 쓰며 살까. 그리고 우리 집은 그마저도 없어서 적나라할 때가 많지 않나. 흰머리를 점잖게 빗어넘긴 소미의 외할아버지는 작고 반짝이는 눈빛을 간직한 노인이었다. 노인은 강박적으로 식탁보를 되풀이하여 판판히 펴고 있었다. 나는 인생의 고통이나 얼룩을 대하는 방식이 집집마다 다르다는 걸 그때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가풍이라면 가풍일 수도 있을 방식들.
저녁을 먹고 나서 소미가 샤워를 하는 동안 나는 2층 테라스에 앉아 게임을 했다. 수첩만 한 크기의 게임기였다. 게임을 몇 번 하고 나니 소미가 내게 샤워를 하라고 불렀다. 나는 게임기를 테라스 난간에 두고 욕실로 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빗줄기가 뿌리기 시작했다. 머리를 말리는 동안 빗소리를 들었고 난간에 둔 게임기가 생각났지만 나는 그걸 가지러 나가지 않았다. 다시 생각해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나는 비가 내려 게임기를 적시고 그럼 고장이 나고 말거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그대로 있었다. 왜 그랬을까. 가끔 그럴 때가 있었다. 버스를 잘못 탄 걸 알면서도 내리지 않고 종점까지 갈 때라던가. 분명히 잘 못 될 걸 알면서도 가만히 있는 것. 오히려 잘못된 결과를 확인하겠다는 것처럼 말이다. 망쳐진 결말을 보고 나면 이제 바닥에 닿았다는 이상한 포기가 생겼다. 그리고 생각보다 큰일이 아니구나 싶은 마음도 들었다.
다음 날, 소미는 빗물에 젖어 고장 나 버린 게임기를 보고 동생에게 화를 냈다. 아니라고, 내 잘못이라고. 나는 사실대로 말하지 못했다. 나는 소미의 기분을 풀어주고 싶었지만 내 잘못이라고 알리고 싶진 않아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리고 우리는 강남 버스터미널에서 헤어졌다. 버스에 오르기 전, 소미는 나를 꼭 안아주었다.
“너를 봐서 기뻐. 내가 외로울 때 친구가 되어줬잖아.”
“클라우디우스가 된 너를 보지 못해서 아쉬워.”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우리는 미소를 지으려 애쓰며 다시 한번 포옹했다. 나는 버스에 앉아 나를 향해 손을 흔드는 소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내게 생각지도 못한 새로운 세계를 보여준 사랑하는 친구. 친구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시선이 멀어질 때까지, 그리고 서울을 벗어날 때까지 수많은 감정이 마음을 휘저었다. 다시는 소미를 볼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소미가 전학 온 날부터 지금까지의 기억들이 고속도로를 달리는 동안 하나씩 되살아났다. 나는 소미와 그의 집이 보여준 좀 더 안온하고 품위 있는 삶을 동경하게 되었다. 나의 결핍과 빈곤을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을 했고 그건 어쩌면 정신적인 면에 더 치중되었던 것 같다. 그리고 무엇보다 몸의 이동은 심리적 이동과 세계의 확장을 동반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당연히 나는 점점 더 먼 곳으로 가고 싶었다. 여름 산은 짙푸른 색으로 반짝이고 직선으로 뻗은 길은 아득하다가도 순식간에 내 앞에 다가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