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상담을 마무리하면서 상담사는 내 상태에 대해 조금 더 전문적이고 정확한 진단이 필요할 것 같다며 검사지 하나를 건넸다.
300여 가지가 넘는 질문이 적혀 있는 검사지였고,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심리검사 방법이라고 했다. 집에 가서 검사지에 체크를 한 후 팩스로 전송하면 다음 상담 전에 검사를 완료해 그걸 토대로 상담을 진행하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하지만, 첫 상담을 진행했던 날에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쓰러지듯 잠이 들었다.
다음날에도 아무것도 하기 싫었고, 할 수 없을 만큼 몸과 마음이 모두 지쳐 있었지만 다음 상담을 위해 필요하다는 상담사의 말 때문에 검사지를 펼쳐 들고 작성하기 시작했다.
'네', '아니오' 중에 하나를 선택하는 것뿐이지만 300개가 넘는 질문을 읽고 답을 한다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심리검사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질문의 내용을 보면 '어떤 것을 선택했을 때 결과가 안 좋게 나오겠구나.' 싶은 부분들이 있었다. 가능하면 내 상태 그대로를 표현해야 하는 게 맞다고 생각하면서도 왠지 무슨 시험을 보는 것 마냥 조금이라도 좋은 쪽으로 결과가 나오길 바라는 마음에 최대한 좋은 방향으로 선택하려고 고심하며 답을 체크하고 있었다.
하지만, 두 번째 상담에서 마주한 심리 검사 결과는 그런 작은 노력은 아무 의미 없다는 것을 그대로 보여 주었다.
상담실에 문을 열고 들어서자 상담사는 처음보다 더 걱정과 근심 어린 표정으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표정에서 어느 정도 검사의 결과를 예상할 수 있었다.
마치 성적표를 받기 위해 선생님과 마주하는 학생처럼 약간의 긴장과 함께 상담사의 표정을 살피며 자리에 앉았다.
상담사의 손에는 검사 결과지처럼 보이는 종이가 들려 있었지만, 일주일간 잘 지냈냐는 안부 인사를 시작으로 두 번째 상담이 진행되었다.
상담을 받은 후 심리적, 육체적 변화와 어려움에 대해 있는 그대로 얘기했다. 한 번밖에 진행하지 않았지만 꽤나 힘들고 어려운 시간이었고 크고 작은 후유증도 느꼈다고 했다.
내 말에 상담사는 정도의 차이겠지만 앞으로도 그런 상태는 계속 나올 수 있을 거라며 자연스러운 것이니 염려하지 말라고 했다. 그리고 곧이어 ‘그런데..'라는 말과 함께 줄곧 내 시선이 꽂혀 있던 검사지를 들어 보였다.
걱정 어린 표정으로 검사지 몇 장을 훑어 넘기다 그래프가 표시된 페이지를 내 앞에 펼쳐 보였다.
전문 용어 같은 단어 몇 개와 숫자만 표시되어 있어 들여다봐도 무슨 의미인지 한눈에 알기는 어려웠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유난히 높이 치솟은 곡선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알 수 없어 궁금해하는 찰나, 상담사의 한마디에 그 곡선의 의미를 예상할 수 있었다.
"결과가 생각보다 안 좋아요."
그때까지만 해도 나름대로 덤덤하게 듣고 있었다.
'뭐.. 오랫동안 힘들었고 죽고 싶다는 생각까지 했던 나니까.. 그럴 수 있지..'
하지만 결과는 생각보다 심각했다.
검사지에는 글로 설명된 부분들과 그래프 형식의 수치로 나타내는 부분 등 여러 가지가 표기되어 있었는데, 어차피 전문가들이 보고 이해할 수 있는 내용 이기에 중요한 사항만 설명해 준다고 했다. 몇 가지 설명이 이어지고 다시 그래프를 펼쳐 보인 상담사는 잠시 말을 멈추고 옅은 한숨을 내뱉었다.
상담사의 한숨이 지나고 이어진 설명에서 현재 내 상태는 심각한 수준의 우울증이라고 했다.
그래프는 두 개가 있었는데 하나는 나와 비슷한 연령대의 사람들이 겪는 스트레스나 우울감 및 행복감 등 여러 가지 감정에 대한 평균 수치이고 , 다른 하나는 나의 상태였다. 그 두 개의 그래프는 한눈에도 확연히 차이가 났다.
그리고 단번에 내 시선을 사로잡았던 그 곡선이 바로 우울증의 척도를 나타내는 수치였다. 평균적인 수치가 50 정도라고 하면 나는 80을 훌쩍 넘긴 상태라고 했다.
조금은 극단적인 비유지만, 있는 그대로 설명을 하자면 어느 순간 밖에 나가 지나는 차에 뛰어들어도 이해가 될만한 수치라고 했다. 지금 당장 스스로 생을 포기한다 해도 다른 사람들이 그랬다면 '그 친구가? 갑자기 왜?'라고 하며 놀랄 일이지만 내 상태라면 '아.. 결국엔 그랬구나..' 하며 이해가 될 정도라는 것이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었다.
나는 한동안 힘들고 아파했었다.
늘 분노가 있었고, 삶에 대한 의지도 없었다.
그런 나를 스스로 인지하고 있었고 잘 알고 있었기에 나의 심리적 상태가 좋지 않을 거라는 생각은 했었다. 그래서 심리상담을 받기로 결정하고 시작하면서 이런 내 모습이 어느 정도 드러날 것이라고 예상했었다.
하지만, 객관적인 심리 검사를 이용해 받아 든 결과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적나라하게 나를 보여주고 있었다.
예상은 했었지만 상담사의 설명과 결과지를 들여다보고 있자니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어느 정도의 우울감과 무기력함이 스스로도 느껴질 때가 있긴 했지만, 그게 이 정도의 상태였다니..
멍하니 앉아 있던 내게 상담사는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현재의 내 상태는 심리상담뿐만 아니라 물리적인 치료도 필요한 상황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소견서를 작성해 줄 테니 빠른 시일 내에 병원으로 가서 약을 받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했다.
‘약... 을.. 먹어야 한다..?’
몸이 아파서 약을 먹는 건 익숙하고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런데 마음이 아파서 약을 먹는 건 왠지 낯설고 두려웠다.
‘그 약이 내 감정을 조절하는 건가? 그래서 내가 가진 우울감을 낫게 한다는 건가? 내 생각이고, 내 마음인데 그걸 약으로 조절한다..? 가능할까? 나를 더 이상하게 만드는 건 아닐까?’
온갖 걱정과 두려움으로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한 체 멍하니 앉아 있었다.
상담사는 그런 내 모습에서 걱정하는 마음을 읽었는지, 약물 복용에 대해 너무 부담을 갖거나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말을 했다. 약을 복용한다고 해서 그 약이 나를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화시키거나 내 의지와 상관없는 행동을 하게 되는 건 절대 아니라고 했다.
그저 내가 가진 심리적 불안과 긴장에 대한 완화 효과를 주고, 상담을 진행하면서 몸과 마음을 조금 더 편하게 해주는 역할을 하는 정도라고 생각하면 된다고 했다.
심리적 압박과 불안에서 이어지는 감정 기복 및 우울감에 대한 물리적인 도움이 반드시 필요한 상태이기 때문에 가능하면 약물 복용을 병행했으면 좋겠다며, 단호하면서도 부탁의 말을 이어갔다.
상담 전에도 상담을 진행한 후에도 내가 상담소에 찾아오기까지 쉽지만은 않은 결정을 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기에, 그런 내가 신경 정신과에 가서 약을 복용하는 것 까지 받아들일 수 있을까 싶은 걱정이 있었던 것 같았다.
예상보다 심각한 결과와 병원 치료까지 권유받고 나니 조금은 놀랍고 당황스러운 혼란의 마음이 생긴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물리적인 치료까지 권유받아서 놀라운 것보다 더 놀라고 당황했던 건, 결과에 대해 놀라워하고 당황해하는 나 자신의 모습이었다.
‘예상했던 일이야.’라고 생각했지만 너무나도 적나라하게 드러난 내 상태를 듣고, 보고 있자니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머리로는 예상했던 일이라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잘 감추며 지냈던 일이 들켜 버린 것만 같아 허무하고 가슴은 답답해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멍해졌다.
‘나 그래도 나름 잘 버티며 살아왔는데, 나 괜찮은데..’
예상했다고 하면서도, 나름 잘 감췄는데 들켜 버렸다는 두 가지 생각이 겹치자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조심스레 병원 치료를 권유하고 내 의사를 묻는 상담사의 말이 아주 멀리서 들려오는 것처럼 선명하지 않고 귓가에 맴도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으니 상담사는 다시 한번 조심스레 내게 물었다.
"약물을 복용하는 게 정 내키지 않는다면 천천히 결정하셔도 됩니다. 다만, 하루라도 빨리 치료를 하고 개선되길 바라는 마음에 말씀드린 거예요."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다가, 상담사의 말에 정신을 차리고 다시 상담사를 바라봤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한마디를 뱉어냈다.
"아니요. 약, 먹을게요. 소견서 써주세요."
별 생각이 없었다.
좋고 싫음에 대한 감정이 없었다.
그저 상담을 시작하면서 믿어 보기로 결심한 상담사의 권유였기에 시키는 대로 따르겠다는 생각만 있었다.
여전히 마음 한구석에는 ‘이게 무슨 소용이야…’ 싶은 괜한 반감이 남아 있긴 했지만, 어차피 상담을 받겠다고 결심하고 시작한 이상 말 그대로 ‘전문가’라는 사람을 믿어 보기로 했다.
마음의 치료라는 과정이 아직은 어색하고 불편한 일이지만, 그걸 하기 위해 많은 시간 공부하고 노력한 사람들이라고 하니 믿어 보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렇게 상담 두 번째 만에 신경 정신과 약물 복용 및 치료가 결정되었고, 상담과 물리적 치료가 동시에 시작되었다.
상담 후 며칠 뒤에 방문한 신경 정신과에서는 추가적인 검사 몇 가지가 진행되었다. 간단한 지면 검사와 기기를 이용한 뇌파검사 등이 진행되고 곧바로 원장님과의 진료가 있었다.
진료실에 들어서니 상담실에서 보내온 소견서와 검사 결과를 보던 원장님 역시 상당히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검사 결과를 토대로 몇 가지 질문과 간단한 상담이 시작되었고 약물에 대한 설명이 이어졌다. 그리고 약 처방에 대해 설명하는 원장님에게 한 가지 부탁을 했다.
약물 복용이 필요하다면 해야 한다고 생각해 여기까지 오기는 했지만, 약물이 너무 과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다행히도 원장님 역시 첫 약물 복용이라는 점을 감안해 너무 과하지 않게 처방될 것이라는 설명을 했다.
신경 정신과에서의 상담은 아주 간단했다. 상담이라기보다는 문진에 가까운 수준으로 간단한 질문과 답이 오가고 내게 맞는 약이 처방되었다.
그렇게 약을 받아 들고 집으로 돌아와서는 한참을 약봉지만 뚫어져라 쳐다봤었다.
몸도 마음도 모든 것이 지금 보다는 나아져야 했고, 그러기 위해 시작된 일들이었다. 누구보다 나 자신이 잘 알고 있었고 그래서 결국 이렇게 약까지 받아 왔다.
하지만, 두려웠다.
상담사의 말대로 이 약 한 봉지로 내가 다른 사람이 되는 일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두렵고 무서웠다.
약을 받아온 첫날, 그 약 한 봉지를 입에 넣기까지 한참의 시간이 걸렸다.
한동안 약봉지를 노려보면서 멍하니 앉아 있다가 결국 약을 삼켰고, 약을 먹은 이후에는 한참 동안 나 자신의 변화를 느껴보려 애를 썼다. 몸에서 느껴지는 물리적인 변화 혹은 심리적으로 느껴지는 변화가 있는지 느끼기 위해, 마치 명상을 하듯이 눈을 감고 한동안 그대로 앉아 있었다.
하지만, 당장 약 한 봉지로 뭔가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약물 복용을 하고 한 달 정도가 지났을 때는 첫날의 그 일을 생각하면 헛웃음이 나오고 나 자신이 너무나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처음 신경 정신과 약을 받아 들었을 때는 모든 것이 두렵고 걱정되는 마음뿐이었다.
그렇게 처음 신경 정신과 약물을 복용했던 나는, 신경 안정제가 들어 있는 약을 먹고도 오히려 신경이 곤두선 채로 한참의 시간을 보내고 나서야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