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 정신과에서 받은 약물은 생각보다 눈에 보일 정도의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다.
이전에 비해 감정적인 부분을 조절하는 데 있어 크게 달라진 점이 있다거나, 눈에 띄게 좋아진다 하는 것도 없었다.
다만, 그저 전보다 조금은 잠이 많아지는 느낌이었고 몸이 나른해지는 듯한 느낌이 자주 있었다.
그런 증상은 곧 무기력함으로 다가오기도 했다. 일을 하지 않거나 쉴 때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 하고 싶지 않았다.
몸도 마음도 모두 그냥 내려놓고만 싶었다.
그래서인지 처음 상담을 시작할 때만 해도 상담하는 동안 느끼는 것들과 변화하는 내 모습을 기록으로 남기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상담 후에 병원까지 다녀오면 몸도 마음도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만큼 지쳐 버릴 때가 많았다.
어딘가를 다쳤을 때처럼 병원에 가서 수술을 하거나 꿰매는 등의 치료가 아니기에 육체적인 피로감은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심리 치료를 하는 과정은 생각보다 몸과 마음을 힘들고 지치게 만드는 일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한 시간 가량 나 스스로의 상처를 드러내며 아파하고 힘들어했던 과정을 다시 한번 되뇌며 글로 써 내려가기에는 상담하는 동안 느꼈던 감정들을 한번 더 느껴야 하는 일이기에 더더욱 힘들었다.
반드시 해야 하는 일도 아닌데 굳이 압박감과 스트레스를 느끼며 하지는 말자고 생각했고, 상담을 다녀온 후에는 가능하면 몸도 마음도 편하게 쉬려고 노력했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고 또 한 달이 지나면서 상담을 받고 약을 먹는 것에 대해서는 점점 익숙해지고 있는 듯했다.
처음 상담을 가면서 뾰족하게 돋아냈던 마음속의 가시는 조금씩 무뎌지고 있었고, 약을 복용하는 것도 '그저 통증 때문에 먹는 진통제' 정도로 생각하려고 노력했다.
그 과정은 마치, 수년간 치료는커녕 밖으로 드러내지도 않고 꽁꽁 감춰 두어 깊게 곪아버린 상처를 터뜨리고 이제 막 소독을 시작하는 기분이었다. 곪아 있던걸 빼내고 소독을 시작하면서 극심한 통증이 느껴지는 것 같았지만, 그래도 어느 순간 '이제는 약을 바르고 치료를 시작할 수 있는 상태가 되어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런데, 극심한 통증은 점차 사라지고 치료만 하면 될 거라 생각하고 있던 어느 날 갑자기 또 한 번 머리를 한대 얻어맞은 것 같은 일이 일어났다.
그날은 출근을 했던 날이었고, 퇴근 후 집에 가기 위해 지하철 역을 나설 때였다.
계단을 올라 밖으로 나오니 멀지 않은 곳에 붕어빵을 파는 곳이 있었는데, 나도 모르게 그 앞에 서서 기다리고 있던 남자에게 시선이 꽂혔다. 그런데, 그 사람을 보는 순간 갑자기 가슴이 조여 오면서 뭔가 '쿵'하고 부딪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일순간 머릿속에 한마디가 스쳐 지나갔다.
'죽여 버리고 싶다.'
머릿속에 죽여 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것과 동시에 입 밖으로 '헉' 소리가 날 정도로 나 자신에게 놀라는 게 느껴졌고, 그대로 그 자리에 서서 굳어 버렸다.
분명 내가 한 생각이었다. 내 머릿속에서 내가 한 말이었다.
단 몇 초밖에 안 되는 잠깐의 시간 동안 극도의 분노와 그 감정에 놀라는 나 자신의 모습을 동시에 느꼈고, 나도 왜인지 알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그 생각에 너무 놀라 그대로 멈춰서 버렸다.
스스로 '내가 미친 건가'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멍하니 서서 그 사람을 바라보다가 이내 이유를 찾아냈다.
크지 않은 키에 유난히 배가 볼록 나온 통통한 체형, 민머리, 렌즈가 두꺼운 뿔테 안경, 이목구비가 뚜렷하면서도 큼직하고 무엇보다 약간은 돌출되어 보일 정도로 유난히 크고 쌍꺼풀이 짙은 눈...
내게 안 좋은 기억을 심어 주었고 상처를 주었던, 몇 년간 내가 그렇게 죽여 버리고 싶다고 생각했던 그 사람과 닮은 모습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아무 상관없고, 심지어 나를 쳐다본 것도 아닌데 죽이고 싶다니.. 미친 건가? 이게 정신병인 건가? 왜 이러지?'
단지 닮았다는 이유 하나로 일면식도 없던 사람에게 한순간 살기를 뿜어내는 나 자신이 소름 끼치도록 무섭고 이해가 되질 않았다.
그러면서도 그 남자를 향해 쏟아지는 분노와 경멸 섞인 눈빛은 거둬내지 못하고 있었다. 분노에 찬 눈빛으로 그 사람을 노려 보고 있자니 구역질이 날 정도로 감정이 요동치고 있었다.
그대로 그 사람을 바라보고 있는 것도, 그 사람 옆을 지나는 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아 골목길로 발길을 돌렸다. 돌아가는 길이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고, 그래야만 했다.
집에 도착해서도 한참 동안 마음이 가라앉지 않았다.
처음 상처를 드러내기 시작했을 때처럼 극심한 분노와 통증이 느껴지는 기분이었다. 거기에는 나 자신에 대한 감정도 섞여 있었다.
스스로 기억을 닫아 버리는 바람에 몇 년 만에 뒤늦게 상처를 드러내서 아프게 하더니, 이제는 상처를 좀 치료하려고 하니 갑자기 또 말도 안 되는 감정에 휩싸여 다시 또 상처를 긁어내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자 분노 섞인 감정은 더더욱 겪해 지고 있었다.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다가 그대로는 안될 것 같아 TV를 켜고 오락 프로그램이 나오는 채널을 찾았다. TV 속에 나오는 사람들이 시끄럽게 웃고 떠드는 소리를 빌어, 격해졌던 감정을 조금씩 가라 앉혔다. TV 속 내용이 눈에 들어 오지는 않았지만, 혼자 멍하니 앉아 있는 것보다는 도움이 되는 것 같았다.
그렇게 겨우 마음을 진정시키고 잠이 들었던 그날, 처음으로 상담하는 날이 기다려졌다.
오래전 기억이 갑자기 떠올랐을 때 스스로 멍청이냐고 물으며 자책했지만 그럴 수 있는 일이고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상담사의 말에 위안을 삼았던 것처럼, 말도 안 되는 감정이지만 이것도 '그럴 수 있는 일'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과 기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그날의 상황 설명을 듣던 상담사는 내가 기대하고 바랐던 것처럼 '그럴 수 있는 일'이라고 했다.
오랫동안 잃어버렸던 기억이 그와 관련된 대화를 하면서 문득 떠올랐던 것처럼, 트라우마를 만든 어느 한 요소가 보이거나 느껴지면 그 당시의 감정과 기억이 다시 떠오를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 요소는 장소, 사람, 상황, 냄새 등 기억을 떠올리게 만들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될 수 있었다.
나는 그중에서도 '사람'으로 인해 만들어진 상처와 트라우마였던 만큼, 외적으로 그와 비슷한 모습의 사람을 보면 기억이 떠오르면서 분노의 감정이 느껴지는 것이 가능하고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일이라고 했다.
다만 실제와 구분하지 못하고 관계가 없는 사람에게 직접적으로 그 분노를 표출한다면 문제가 되고 물리적인 통제가 필요할 수 있겠지만, 나는 그나마 스스로 잘못됐다는 점을 인지하고 감정을 통제했기 때문에 그 자체가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고 어떻게 보면 자연스럽고 필요한 과정이 될 수도 있다고 했다.
원했던 대답이었고,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 순간 느꼈던 살기와 분노의 감정은 나 자신도 무섭고 섬뜩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런 내가 싫었다.
오랜 시간 누군가에게 분노 섞인 감정으로 죽이고 싶다는 생각에 휩싸여 있던 적이 있기는 하지만, 이렇게 나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사람에게 느껴지는 분노는 스스로도 이해하기 어려웠다.
‘앞으로 또 비슷한 상황이 생기면 어떻게 하지?’
괜한 불안감마저 생겨 버렸다.
비슷한 상황이 생길 것 같은 두려움뿐만 아니라, 그런 상황이 반복될수록 내 감정이 격해지고 그러다 결국엔 그 분노가 밖으로 표출되면서 전혀 무관한 사람에게 피해를 줄 것만 같아 나 자신이 두렵고 불안해졌다.
상담사는 내 성향과 현재의 심리적 상태가 그 정도의 문제를 만들 정도는 아니라며 나를 위로하고 안정시키기 위해 노력했지만, 그 뒤로도 얼마간은 불안정한 느낌을 유지한 채로 생활하며 상담을 진행했다.
‘그 사람을 또 길에서 마주친다거나 비슷한 느낌의 사람들을 마주친다면 어떻게 할까?’
‘내가 또 관계없는 사람들에게 분노를 느끼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 분노가 언젠간 밖으로 드러나진 않을까? 언젠간 내가 미친 사람처럼 누군가에게 이유 없이 달려드는 건 아니겠지?’
나 조차도 이해하지 못할 감정과 분노가 뿜어져 나오는 것을 경험하고 나니 한동안은 여러 가지 생각과 불안감을 가지고 생활을 했었던 것 같다. 하지만 다행히도 그 뒤에는 그 정도로 격한 감정 상태를 보이는 일은 없었다.
처음 상처를 드러 냈을 때 큰 통증이 있었지만 하루하루 시간이 지나면서 그 상처에 조금씩 무뎌지고 치유할 준비가 되고 있다는 것을 느꼈던 것처럼, 어떤 특정한 요소로 인해 과거의 기억이 불현듯 떠오르게 된다고 해도 처음처럼 감정이 격해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한두 번 그런 상황이 반복될수록 스스로 평정심을 찾으려 노력했고, 현실과 구분하기 위해 이성적으로 생각하려고 무던히도 애를 쓰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한번 인식된 몇 가지 요소들은 내 성격과 성향을 바꿀 만큼 머릿속에 각인되어 버렸다.
그중에서도 가장 크게 자리한 것은 남자의 외형이었다.
단순히 이성관계의 남자뿐만 아니라, 사회생활을 하면서 만나게 되는 사람들조차도 특정 외모에 대해 굉장한 반감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면 안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쉽사리 고쳐지지 않았다.
그리고 여전히 '남자'라는 존재에 대한 불편함이 남아 있었다. 비슷한 외모가 아니라고 해도 내겐 언제나 늘 불편한 존재였다.
이런 내 모습은 상처를 치유하는데에 있어서 가장 큰 문제이자, 가장 먼저 치유해야 할 부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