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창수 Feb 11. 2024

교감으로 산다는 것, 감정을 쏟아낼 곳이 없을 때

일 년에 한 권 업무용으로 다이어리를 얻는다. 1년 치 분량이다. 두꺼운 편이다. 처음에는 의욕이 있어 뭔가를 채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자주 열어 끄적거린다. 시간이 지날수록 다이어리보다 다른 곳에 메모하게 된다. 값비싼 다이어리가 찬밥 신세가 된다. 시간이 지날수록 천덕꾸러기 신세가 된다. 애물단지가 되고 만다. 그해만 쓸 수 있도록 날짜가 인쇄되어 있어 이월해서 쓰기가 쉽지 않다. 결국 오래 묵혀 놓았다가 근무지를 옮겨야 할 때 책상을 정리하는 겸 오래된 다이어리를 과감히 버린다. 겉으로 보면 완전히 신상품처럼 보여 버리기 아깝다. 다른 용도로 쓸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다가 일기장으로 사용해 보았다. 햇수로 4년째다. 대만족이다. 


   나의 라이프 스타일은 단조로운 편이다.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반복된 일상을 살아간다. 매일 같은 삶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기록할 것이 넘친다. 가끔 기록한 것을 한 장 한 장 넘겨 본다. 그곳에는 특별한 만남이 기록되어 있고 기억에 남을 만한 사건이 빼곡히 적혀 있다. 힘들었던 일, 속상한 감정도 짤막하게 기록되어 있다. 만약 기록으로 남겨 두지 않았다면 기억의 파편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말았을 것이다. 교감으로 살아가면서 기억하기 싫은 일도 머릿속에 담아두어야 하고 얼굴 보기 싫은 사람도 만나야 한다. 감정을 쏟아낼 곳이 없을 때 일기장에 풀어낸다. 

지나온 삶 속에서 여러 종류의 일기를 잠깐잠깐 썼다. 전라남도 장성군 육군보병학교에서 O.B.C(초급장교 과정) 시절 투박한 일기장에 병영 일기를 썼다. 703 특공연대 소대장으로 복무하면서도 가끔 띄엄띄엄 썼다. 25년이 넘은 최고령 일기장이다. 다만 아쉬운 점은 1996년 9월 강릉 무장공비 침투사건에 투입되었던 4개월간의 생생한 경험을 기록으로 남기지 못한 점이다. 세 자녀를 키우면서 쓴 육아 일기도 기억에 남는다. 첫째 아이는 돌까지 썼다. 둘째 아이부터는 조금씩 시들해졌다. 초임 교사 때 쓴 교단 일기도 보관 중이다. 공통점은 힘들었던 감정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다는 점이다. 감정을 쏟아낼 곳이 없어 일기장에 쏟아냈던 것 같다. 


   교감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여러 사람의 감정을 받아내야 하는 일이다. 성인군자가 아닌 이상 교감도 감정을 쏟아내야 한다. 속상한 감정은 참 오래간다. 감정을 쌓아 두면 병이 생긴다. 기록이 쌓이면 속이 시원해진다. 쏟아낼 곳이 있어 참 다행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교감으로 산다는 것, 기억에 의존할 수 없는 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