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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창창한 날들 Sep 23. 2021

말러를 아세요

첫사랑


라디오에서 '어땠을까'가 흘렀다.

내가 그때 널 (내가 그때 널)
잡았더라면 (잡았더라면)
너와 나 지금보다 행복했을까
마지막에 널 (마지막에 널)
안아줬다면 어땠을까 (어땠을까)




고등학교 때 라디오에서 나오는 노래를 카세트테이프에 곧잘 녹음했다. 거의 대중가요였다. 가물가물하지만 정수라, 양수경, 전영록, 들국화였던 것 같다.

고3이 되었을 때 부잣집 딸 같은 이미지의 이쁘고 목소리가 고우신 화학 샘이 대학을 갓 졸업하고 부임해 오셨다. 입시생이라는 스트레스일랑 집어던지고 여고생들답게 첫 시간은 그분의 첫사랑 이야기에 달콤하게 빠졌다.

이야기는 키 작고 볼품없는 입성의 남자가 소개팅에 등장하는 장면으로 시작됐다.




여대의 학교 축제 기간이었다.

캠퍼스에 소개팅하러 들어온 남자는 말주변이 없고 끌려온 사람처럼 굴었다.

광장의 공연에서 사람들이 죄다 일어서 혼잡한 상태가 되었을 때, 화학 샘이 보고 싶어 발꿈치를 들며 안간힘을 썼다. 그 남자는 ‘앉자 앉자’를 연발했고, 길이 트이듯 그 남자와 화학 샘 앞이 확 트였다. 화학 샘은 얼굴이 화끈거렸지만, 모르는 척 공연을 즐겁게 감상했다.

꺄악~

남자의 배려심 넘치고 자신감 있는 행동에 그런 남자가 나타나면 당장이라도 사랑할 것처럼 소녀들의 탄성이 터져 나왔다.

교정을 나서며 남학생이 뜻밖의 질문을 했다.
 “클래식 좋아하세요?”
다음 날 두 사람은 클래식 다방에서 만나 음악을 함께 듣고, 라면을 먹고, 돌담길을 걸었다.

(그 시절의 이야기는 이런 식으로 도식화돼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야기에 빠진 소녀들의 감성이 촉촉하게 적셔졌다. 하루 13시간을 거의 움직이지 않고, 공부하다 졸다 도시락 두 개를 먹는 일상을 보내던 소녀들은 이대 나온 여선생의 낭만적인 사랑 이야기가 미래의 자기들 이야기인 것만 같았다. 몸뚱이는 천근만근이고 궁둥이는 펑퍼짐해지던 현실의 자기들을 돌아보고 싶지 않았다.

 

남녀의 결말은 우리에게 비극적인 카타르시스까지 선사했다. 남자가 집회시위 주도로 구치소에 들어가게 되면서 둘은 다시 만나지 않고 각자의 길을 걷게 됐다는...




아무튼 클래식.

화학 샘의 첫사랑 이야기 이후 대중가요 대신 클래식을 녹음하게 됐다. 학교에서 모차르트나 베토벤의 곡을 들려주고 무슨 악기가 사용됐는지, 무슨 곡인지 알아맞히는 시험을 질색하던 내가 클래식을 듣게 된 거다.

소설을 읽어도 주인공이 클래식을 듣는 장면에선 고개를 갸웃하다 건너뛰곤 하던 내가 그것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마침 강석경의 소설 ‘숲 속의 방’을 읽고 있었다. 소설 속에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과 3번(아마도)이 등장했다. LP를 사러 시내로 나가기도 어려웠고, 도구도 없었다. 언젠가 듣기를 바라던 중 라디오에서 그 곡이 흘러나왔다. 그 곡은 서정적이고 낭만적이었다. 단숨에 클래식의 세계로 내 발을 끌어당겼다. 그렇다고 제대로 클래식 공부를 한 건 아니었지만, 작곡가와 곡명을 들어봤다 정도는 할 수 있게 됐다.




대학 1학년에서 2학년으로 올라가는 겨울, 우리 동아리는 공부방 활동을 나가던 달동네에서 11박 12일 빈민활동을 함께했다. 세 학교가 공조하여 아직 철거되지 않은 빈 집에서 합숙하며 낮에는 그분들의 일을 도와 노점 활동을 나간다든지, 아이들을 가르친다든지, 동네 청소를 했고, 밤에는 한 자리에 모여 그날의 활동을 공유하고 반성하는 정리 토론을 했다.

며칠 밤이 지나면서 온수가 공급되지 않아 모두가 꾀죄죄해져 가고 있었다.(나처럼 서울이 집인 여학생들은 한 번씩 나가 씻고 들어왔다.)

그중 더 초췌해 보이는 한 남학생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그는 수십 명이 촘촘히 붙어 앉은 토론장의 분위기가 뜨겁든지 말든지 구석에서 웅크린 채 잠을 잤다.

“쟤는 뭐야?”

우리 동아리와 학교 사람들끼리 험담을 했다. 불성실한 사람은 별론데..

내 눈에도 그는 마뜩잖았다.

다음 날 밤 변소 앞 어둠 속에서 그 학생이 나한테 누나라고 부르며 무언가 물어보았다. 어딜 봐서 내가 누나냐고. 나도 저도 1학년이 고만. 나는 새침하게 답했다.

“저 누나 아니고요. 물어보신 건 저도 몰라요. 선배 누나들께 물어보시죠.”


며칠 뒤 그 남학생과 노점상 할머니의 일을 도우러 짝을 지어 나가게 됐다. 하필...

물건 사라고 호객행위를 하기는커녕 말수도 적은 그 남학생은 한나절이 지나도록 첫인사 외에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쭈뼛거리며 서 있었다. 할머니가 갑자기 집안에 일이 생겼다고 올라가신 후 둘만 남았다. 칼바람은 심해지고, 노점을 접어야 하나 하고 있는데, 남학생이 입을 떼었다.

혹시 클래식 좋아하세요?

그때까지 이름도 몰랐던 남학생이 수줍은 표정으로 빙긋 웃으며 물었다. 목소리가 딱 내 스타일이었다.(아 내게도 사랑이, 그 한 마디에 내 마음은 이미 휘리릭 넘어가 버렸는지 몰랐다.)

“얼마 전 라흐마니노프 곡을 우연히 들었는데 잘은 몰라요. 라디오를 듣기 시작했다 그 정도…”

처음으로 그가 웃었다. 만날 고개 숙인 채 잠을 자던 뒤통수와 낮의 경직된 얼굴만 보다가 그 학생의 웃는 표정을 보니 앳되고 귀여운 구석이 있었다.

그럼 혹시 말러도 아세요?

그곳에 가기 얼마 전 말러 교향곡을 들은 터였다. 어렵고 지루하긴 했지만 굉장히 강렬하게 남아 있었다.

"말러를 아는 사람 드문데 신기하네요."

그때부터 클래식 이야기.

오래도록 클래식을 사랑해 왔다는 이 남자는 어쩜 그리도 설명을 잘하는지.

여기까지가 내 첫사랑이자 짝꿍이 된 남자를 만난 이야기.

나는 클래식으로 준비된, 첫사랑 낚시꾼이었다.

그 사람이 지금은 남이 되었고.



https://youtu.be/FNHVqjgykoI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


Gustav Mahler - Symphony No. 3 (Lucerne Festival Orcherstra, Claudio Abbado) / EuroArtsChannel
https://www.youtube.com/watch?v=9Yr720ftja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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