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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창창한 날들 Aug 11. 2023

김 씨 집안에 조가의 더부살이



보령의 시부모, 서울 자양동의 시숙, 뚝섬의 우리 커플, 세 집이 안산에 모여 살게 됐다. 미혼의 큰아들과 결혼식도 올리지 않은 스물넷 작은아들 커플을 슬하에 거둔 시아버지는 지금의 내 나이인 오십 대였고 시어머니는 사십 대였다.

임신 개월이  나는 혼자 아이를 키울 자신이 없어 X의 반대를 무릅쓰고 시부모와의 동거를 결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X는 군도바리 상태여서 가명으로 학원에서 수학을 강의하며 나와 동거했는데, 우리에게 새 생명이 생긴 것이다. 우리는 아이를 밝은 세상에서 이름을 갖고 살게 하려면 입대가 불가피하다고 판단했다. 급히 결혼식도 치르고 백일잔치를 치른 일주일 뒤 그는 입영하기로 하였다.   


집에서 백일잔치를 치른 날 저녁 남편의 대학 친구들 대여섯 명이 방문했다. 그들은 젊은이들만의 시간을 보내고 싶어 호프집으로 간다면서 내게 함께 가자고 하였다. 나는 뒷정리를 해야 하므로 따라나서지 못했다. 나의 친구들이기도 한 그들은 여러 번 전화를 걸어 합석하라고 재촉했다. 친정부모 두 분 다 술을 좋아해 밤늦게까지 친구들을 불러 술을 마시고 그 상을 그대로 두었다 아침에 치우곤 했던 모습을 보고 자란 나는 남은 건 내일 하겠지, 하고는 어머니더러 "쉬고 계세요" 당부하고, 시아버지 품에 안긴 아이 얼굴을 일별한 뒤 못 이기는 척 맥주를 마시러 나갔다.


아이에게 젖을 주어야 하니 맥주는 마실 수 없었지만 함께 학생 운동하던 동지들을 만난 기쁨과 일주일 뒤 동거인과 헤어질 걸 생각하니 마음이 춤을 추었다. 그래도 한 시간 남짓 지나자 엄마를 찾을 아이가 떠올라  오롯이 그 자리를 즐길 수 없었다. 아들 생후 일 개월부터 출근한 엄마 때문에 아이는 화장실에 들어간 엄마에게 안겨 있어야 울지 않았고, 배나 등에 딱 달라붙어야만 잠이 들었다.


아이 때문에 집에 가 봐야겠다고 친구들에게 어렵게 말을 꺼냈다. 시간의 제약 없이 회포를 푸는 남성 동지들은 나를 이해하지 못해 자꾸 붙잡았다. 대학 때 인간 해방의 길로 가는 동지라면 평등 커플, 평등 부부로 살아야 한다고 외치던 내가 애엄마로서 며느리로서 먼저 귀가하는 모습을 보이는 게 부끄러웠다. 시간이 좀 더 지체되어 어른들께 야단 맞을 구실만 키우고 현실은 내 발길을 집으로 향하게 하였다.


집에 들어가니 어머니의 성정대로 모든 게 완벽히, 깨끗이 정리돼 있었다. 시부모에게 잘 주무시라고 인사하려고 안방을 노크하니 시아버지 품에 잠든 아이가 보였고, 시어머니는 화장실에서 씻고 막 나오고 있었다. 시어머니는 내 얼굴도 보지도 않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시아버지는 아이를 우리 방에 눕히고는 나를 안방으로 불렀고 어머니는 아버지의 이야기가 길어질 것을 알았는지 슬그머니 거실로 나갔다.

"어머니를 도와 끝까지 정리를 해야지 애어멈이 이 밤에 어디라고 거길 나간 거냐. 친구들이 불러도 형식상 부른 거겠지. 나갔어도 잠깐 앉았다 와야지. 아무리 철이 없어도 그렇지."


그때부터 시아버지의 연설이 시작됐다. 남편은 돌아오지 않고 나는 무릎이 저려 발을 바꿔가며 앉아 야단을 맞았다. 한 시간이 넘고 두 시간이 되어가는데 아버지의 연설은 끝날 줄 몰랐다. 아이가 중간에 울었을 텐데 시숙이나 시어머니가 대신 안고 달랬는지, 그건 기억나지 않는다. 가서 자라는 마지막 명을 받았을 때 펴지지 않는 무릎을 겨우 펴서 절룩거리며 우리 방으로 돌아왔다.


남편이 친구들을 역 주변 여관으로 들어가게 하고 들어와 나를 안으려 했지만 그를 받아줄 푼푼한 마음이 리 없었다. 입대를 앞둔 남편(남편이란 말이 어색할 만큼 우리는 아기 인형을 안고 소꿉놀이하는 '친구'였다. 그런데 그 놀이가 상상 이상으로 고행이었던 거지.) 입대를 앞두고 절실했을 테니 틈만 나면 나를 안으려 했는데 시부모 눈치 보느라, 아이 돌보느라 그럴 마음의 여유가 내겐 없었다.  


시아버지는 며느리로서, 애어멈으로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수시로 가르치려고 했다. 흩어져 살던 두 아들을 모으니 객식구인 나까지 기강을 잡으려고 했던 듯하다. 시아버지가 어려웠던 나는 안방이나 거실 소파에 앉은 시아버지의 부름을 받으면 무릎을 꿇고 앉아 경청하는 자세를 취했다. 친정아버지의 성함을 함부로 부르며 '*** 씨, 이렇게 저렇게 좀 해 줘.'하고 자란 내가 시아버지 앞에서 자동으로 무릎 꿇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엄숙한 분위기 탓이었을 것이다.


아이가 걸음을 뗄 무렵 이 년 만에 서울 친구 모임에 나간 날, 밤이 늦었기에 시댁에 전화를 걸어 친정에서 자고 가도 좋으냐 허락을 구했다. 마뜩잖아하는 시어머니의 승낙을 받은 뒤 밤새 우는 아이를 달래며 쪽잠을 잔 다음 날 아침 허리가 아파 끙끙대는 나를 안쓰럽게 보던 친정 엄마가 용하다는 한의원에서 침을 맞고 가라고 했다. 미용일로 딸과 손주를 봐주지 못한 엄마의 미안한 마음도 이해되고, 친정에도 돌잔치 이후 일 년이 넘은 뒤의 방문이라 엄마와 더 있고 싶었던 나는 2박 3일 만에 시댁에 돌아갔다. 그날도 두 시간 동안 혼이 났다.


친정아버지는 버럭하고 소리 지르면 끝인 분이어서 두세 달에 한 번 꼴로 시아버지한테 야단맞는 일을 평생 처음 겪은 나는 내가 한 행동이 그렇게나 혼날 일인지 구분하지 못하는 어리바리한 소녀였다. 군대로 가 버린 남편을 그리워하며 훈육 소나기를 언제 맞을지 몰라 전전긍긍하며 살았다. 남편이 있었어도 부자지간의 전쟁이 되어버리기 때문에 그것도 불편한 일이었는데, 남편 없이 맞는 폭탄은 내가 고아 같다는 생각이 들게 했다.


내 편이 되어줄 남편이 군대에서 태권도 다리 찢기로 고통스럽다며, 날마다 나를 그리워하며 탈영하지 않고 제대 날짜를 세고 있다는 편지를 보내올 때였다. 거실에 한 대 있는 전화로 친정이나 친구에게 마음대로 걸 수도 없었고, 남편에게 전화가 와도 시부모에게 금세 빼앗겨 오래 통화하지 못하여 그리움만 키웠다. 밤마다 육아 일기와 군대 간 남편에게 편지 쓰는 일로 적과의 동침을 견뎌야 하는 마음을 달랬다.


우리 방 문을 열면 바로 부엌이었다. 아이가 늦잠 자길 바라며 겨우 잠든 새벽, 여섯 시쯤이면 전업주부인 어머니의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고 내 가슴은 쿵덕쿵덕 뛰었다. 아이는 너무 예민하여 밤이고 낮이고 잠을 잘 안 자고 칭얼댔다.

밤 아홉 시에 퇴근하고 새벽 두 시 넘어까지 아이를 재우다 시간마다 잠이 깨어 아이 젖을 주거나 업어서 재우던 나는 오전 내내 몽롱한 상태로 어기적거리며 다녔다. 스물네 살, 한창 잠이 많을 나이의 철없는 어미였다. 생후 이십사 개월이 넘을 때까지 밤낮이 바뀐 아기 때문에 어미는 몸무게가 사십 킬로그램 초반에 빈혈로 몇 번 쓰러지더니 급기야는 출근길에 계단에서 굴러 정강이를 이십 바늘 꿰매기도 했다.


시아버지는 자칭 신사였고 주위 사람들에게 신망이 두터운 분이었는데 성격이 급했다. 아침에 아기 칭얼거리는 소리가 들리면 방문 밖에서 듣고 있던 사람처럼 노크하기 무섭게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아가야, 더 자라.”며 아이를 데려갔는데 나는 더 잘 수 없었다. 어머니가 아침을 준비하는 걸 뻔히 알고 더 잘 배짱이 없던 나는 무거운 몸을 이끌고 잔뜩 부은 얼굴로 "어머니 저 뭐 할까요?" 하고 어머니 뒤를 졸졸 따라다녀야 했다. (그때 내가 아침을 차릴 때까지 잤더라면 고부갈등이 덜 있었을까.)


내 남편이자 그분들의 작은아들은 공부를 잘했다. 가끔 그들의 처지가 되어 생각하면 얼마나 기가 막혔을까 싶다. 아들이 성공 가도를 달리기 바랐는데 웬 여자애랑 산다더니 '애아범'이 된다는 반갑지 않은 소식까지 들어야 했던 시부모를 생각하면, 첫 손주라고 우리 아들을 극진히 사랑하고 예뻐했던 게 감사한 일이다.

젖을 먹이기가 무섭게 시아버지가 트림시킨다고 데리러 들어오면, 그 기척에 놀라 벗은 상반신을 감추느라 아이의 입에서 젖을 억지로 떼어 아이가 자지러지게 운 적도 잦았다.


아이는 군대에서 제 아빠가 휴가 나오면 낯선 사람 대하듯 밀쳐내고 울어댔다. 나와 제 아빠가 안고 있는 모습을 보면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우리를 떼어놓아서 우리는 안지도 못했다. 내가 원할 때는 아이를 빼앗았던 시부모는 정작 남편과 둘만 있을 수 있는 시간을 만들어 줄 만큼 마음의 여유가 없었나 보다. 당신들도 아들이 보고팠을 테니 집안에서 놀기를 바랐다. 우리 둘에게 영화라도 보고 와라, 호텔이라도 다녀와라, 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남편 제대 후 우리는 분가했다. 맞벌이하는 동안 아들이 수두에 걸리고, 크고 작게 다치는 바람에 의정부로 이사 간 시부모에게 맡기는 일이 생기면서 시부모는 다시 안산으로 이사를 와 같은 아파트 단지 옆 동에 살게 됐다. 그로부터 시부모와 매일 만나는 일은 십여 년 지속되었다.

시부모의 극진한 손주 사랑 덕을 많이 봤지만, 애초에 우리 두 사람 힘만으로 키웠다면 우리는 지금 다른 모습으로 살고 있겠지.

내 인생의 절반 혹은 핵심을 뚝 떼어 남에게 맡긴 탓에 대가를 치르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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