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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창창한 날들 Sep 25. 2023

창창은 홍길동

한강 이야기, 세 번째 (거룩한 글쓰기 시즌 8 - 25일 차)




언니가 카톡으로 사진을 보내왔다. 달쿠샤라나 딜쿠샤라나. 인문학 스터디 모임 사람들과 백 년 넘은 서양식 건물을 견학하러 서울에 와 있단다.

안산에 사는 언니가 서울 종로구에 와 있다는 건 놀랄 일도 아니다. 하지만 동종업계 사람들과 독서 스터디를 한다는 사실이 놀랍고 그것도 모자라 그들과 견학을 왔다는 얘긴 더욱 놀라웠다. 그것도 연휴에 전철 타고 견학이라니. 그들과 함께 걸으며 밥을 먹고 차를 마시는 일, 생각만 해도 IS**형인 나 같은 사람에겐 피하고 싶은 일이기 때문이다.


최근에 좀 뜸해졌지만 언니는 합정동, 강남 일대를 나보다 자주 쏘다니던, 일명 홍길동 같은 여자다. 그 에너지가 어디서 나오는지 도무지 상상이 안 된다. 형부와 헤어지고 나서는 솟구치는 열정을 퍼내도 퍼내도 끝이 없는 사람 인증을 하고 있다. 원래 그런 에너지를 가진 사람이 이제야 제대로 발산하는 거겠지.


언니가 견학 온 사람들과 헤어지면 오후 다섯 시쯤 될 예정이니 한강에서 만나자고 했다. 귀가할 생각은 하지 않고 한강에서 만나자니!

언니가 만나자고 할 때면 나는 선뜻 답을 못한다. 늘 할 일이 쌓여 있다. 오늘도 모모(개) 산책을 해 주려 했고, 베란다 정리를 하려고 각 방에서 물건들을 끄집어다 산더미처럼 쌓아둔 상태였다. 그래도 한강에서 만나자는 언니의 제안에 따르기로 했다. 어버이날에 아버지댁에서 만나자는 언니에게 시댁에 가느라 못 만날 거라 얘기한 게 마음에 걸려 있던 데다 오빠의 이직 소식도 얘기 나눌 겸해서였다.

게다가 언니와 상의하고 싶은 말도 있었다. 남편과 냉전 중이라 도움말이 필요했다. 언니는 다혈질 경향이 있어 불쑥 화를 내기도 하지만, 대체로 내 말을 잘 들어주는 사람이니까.

그러고 보니 내 필요가 닿으니까 언니를 만나러 간다고 했구나. 그러거나 말거나 언니는 좋다고 할 사람이니... 참, 글쓰기 밴드 뒤풀이도 좀 해야겠다. 언니의 꼬임에 넘어가 매일 글쓰기를 하고 말았는데, 그 뒤풀이를 할 기회가 없었으니 오늘이 적당한 때인 것 같다.


언니가 1년 넘게 운영한다는 100일 글쓰기에 들어가게 된 건 맥주 몇 잔 마신 분위기 탓이었다. 몇 달 전 남편과 딸들 때문에 속상하고, 회사 일에서 자꾸만 작아진다고 하니 그런 내가 안돼 보였는지 언니가 매일 글을 써 보라고 나를 꼬였다. 몇 번이나 제안할 때도 한 귀로 듣고 흘렸는데 그날은 정말로 술기운 때문이었다. 코가 꿰어 들어갔다가 90일 넘게 글을 쓰고 말았으니 나도 참.(우리 언니 영업하면 잘할 것 같은데)

퇴근 후 화장도 못 지우고 곯아떨어졌다가도 후다닥 일어나 글을 쓰고 잠드는 날도 잦았다. 회식 끝의 술기운으로 해롱거리면서도 인증글을 올렸다. 나한테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오는지 신기할 정도였다. 그렇다고 언니처럼 시즌 몇 번을 갈 정도로는 못하겠어서 두 번째는 고사했다.


MZ 세대 직원이 글쓰기 챌린지를 하는 나를 새롭게 봤다며 엄지 척을 추어올려서 기분이 나쁘지 않은 경험이기도 했다. 그 동료는 내가 집과 회사만 오가며 모범생처럼 사는 게 답답해 보였다고 말하곤 했다. 워라밸을 주장하는 그녀 시선에는 내가 영 별로였나 본데 글 쓰는 모습을 보니, 그것도 매일매일 쓰는 걸 보니 멋있어 보였다나. 자기주장 강한 그녀의 입에서 “글 쓰는 사람은 무조건 존경스러워요.”라는 소리도 들었으니 언니 덕분에 뿌듯한 경험을 한 셈이었다.


얼마 전 회식에서 사장님이 내가 대학 때 과 대표도 맡고 동아리 회장도 했다고 하니 믿지 못하겠다고 했다. 나를 평생 샌님으로 살아온 사람인 줄 알았다는 것이다. 사장님에게 진심을 말할 수는 없으니 답답해서 통 입에서 당기지 않던 술을 과음하고 온 날이었다.

'제가요, 결혼하고 나서 한 번, 아이들 낳고 나서 또 한 번, 이 회사에 와서 다시 한번 나를 죽이고 살았거든요. 양쪽 다 죽게 할 수는 없으니까 나라도 죽는 쪽을 선택했던 거지, 어쩌겠어요.'

라는 말을 할 수는 없고 참...

얘기가 자꾸 샌다. 내가 이렇다니까. 언니 말대로 가지치기 좀 해야 하는데.


내가 글쓰기 챌린지 다음 시즌을 하지 않겠다는 것은 회사 일이 바빠질 것 때문이기도 했지만, 솔직하게 말하면 밴드 멤버들에게 위축감이 들어서였다. 날마다 회사와 가족 일 말고는 쓸 게 없는 나 같은 사람으로서는 보여줄 콘텐츠가 너무 빈곤해 다시 100일을 쓰라면 정말 자신이 없다. 밴드에 참여한 분들은 뭘 그렇게 재능과 취미들이 많은지. 독서와 영화 보기는 얼마나 다양하게 즐기고 리뷰들을 멋들어지게 쓰는지. 회사와 집만 오가는 나 같은 사람은 엄두도 못 낼 일을 하고들 사는 분들이 대부분이어서 놀랐다. 우리 언니만 에너자이저인 줄 알았는데... 비슷한 사람들끼리 인력이 작용해 모이는 것 같다.


언니가 집과 회사만 아는 내게 다양한 취미 밴드를 검색해 활동해 보라고 권유한 적이 있다. 내가 '가족과 대화하는 부모 모임' 같은 걸 검색했더니 언니가 웃었다. 취미 활동도, 하고 싶은 일도 가족 타령하는 내 모습이 웃겨서였겠지. 나는 그런 사람이다.

“뚝섬유원지역입니다. 내리실 문은 오른쪽, 오른쪽입니다.”

마침 언니가 전철에서 내렸다는 카톡이 왔다. 이 여자 병 안 날까 몰라. 나랑 두세 시간 놀고 헤어지면 안산에 자정 다 돼서 도착할 텐데, 그래 놓고 내일도 아침부터 일정이 꽉 차 있을 사람이다.

저쪽에서 언니가 환하게 웃으며 두 팔 벌려 다가온다. 어이구, 쑥스러운데... 포옹을 하자고 그래.


뉴스에서만 보는 한강 즐기기를 제대로 했다. 라면에 맥주도 마시고 일몰도 보면서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한가로웠고 내가 이렇게 여유를 즐겨도 되나 싶었다. 별세계 같았다.

어두워져서 이제 집에 들어가야 하나 생각하고 있는데 언니가 '자벌레'에 들어가 보자고 했다. 카페가 있었다. 사람도 별로 없고 조용하고 깨끗했다. 창밖 풍경을 보며 허브차를 마시며 좀 더 이야기를 나누다 밤 열 시가 다 되자 그제야 언니가 나를 놔주었다.

"다음에 세희랑도 같이 만나자."

글쎄. 중2 딸이 엄마랑 이모랑 놀려고 할지 모르겠지만 일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언니와 보낸 한나절의 여유가 짧은 여행을 한 것만 같아 돌아가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작년 오월에 동생과 뚝섬 유원지역에서 만나 놀았던 날의 이야기다.

온라인 글쓰기 모임에서 '가족의 관점으로 가족사, 혹은 당신을 서술하라'는 시제가 나오기에 동생과 한강 나들이 갔던 날, 동생의 관점으로 써 보았다.

동생은 취미 생활, 모임 생활로 바쁜 나와는 다른 차원으로 늘 바쁘다. 회사와 가족에게 헌신적인 성실파 자체다.

내 동생, 사랑하는 내 동생, 이 말만으로도 눈물이 나오는, 주위 사람들을 위해 자신을 죽이고 살아야 하는 걸 당연하게 생각해 온 내 동생.

동생아, 오늘 하루만, 또 오늘 하루만, 그렇게 날마다 행복하게 살자.

전철역에서 쑥스러워하며 내 품으로 다가오는 너, 소녀 같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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