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 따는 풍경 8

거룩한 글쓰기 시즌 8 - 37일 차

by 창창한 날들


술자리의 목소리들이 한껏 높아질 즈음, 성훈이 안방으로 들어오는 기척이 들렸다.

예주는 벽이 있는 쪽으로 몸을 돌려 누웠다. 성훈은 놀란 듯이 예주 곁으로 달려와 귓가에 속삭였다.

"자? 누구랑 통화하고 있는 줄 알았네."

성훈의 입에서 술 냄새가 진동했다. 예주는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말했다.

"뭐 더 필요한 것 있어?"

"아냐. 이제들 보내야지. 술 깰 음료를 마시고 싶어 하니까 내가 데리고 나갈게. 당신은 컨디션이 안 좋았다가 잠들었다고 할 테니 그냥 누워 있어."

성훈은 예주의 입까지 이불을 끌어올려 덮었다. 예주는 숨 막힐 것 같아 이불을 내렸다. 장난같지도 않은데 장난처럼 하니 뭐라 할 수도 없어 쓰게 웃으며, 성훈에게 베개 옆에 둔 파스를 허리에 붙여달라고 했다. 차가운 파스가 허리에 닿아 예주는 질색했는데 성훈은 아랑곳하지 않고 손바닥으로 두 번 탁탁 치더니 거실로 나갔다.

예주는 일어나 화장대 거울에 얼굴을 비추어 보았다. 낯빛이 누르스름했다. 생기 있게 보이도록 입술을 연한 색으로 바른 뒤 문을 열었다. 취기가 더 오른 소리로 시끌벅적했지만 부엌에 바쁜 볼일이 있는 것처럼 싱크대 앞으로 가 섰다.

"제수씨 얼른 오세요. 기다렸습니다."

김 교수였다. '생일도 늦은 자식이 자길 아우 대하듯 한다'라고 말할 때의 성훈 표정이 떠올랐다. 예주에게도 꼬박꼬박 제수씨라 부르는 김 교수가 신경 쓰였지만 예주는 모른 체했다.

캐모마일 티백을 넣은 찻잔을 들고 성훈의 뒤에 가 앉은 예주는 화장실에서 홍준기가 비틀거리며 나오는 모습을 보았다. 홍준기는 화장실 옆 벽에 걸린 그림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더니 인상을 찌푸렸다. 세 아이들이 엄마를 빙 둘러선 채 안아 달라고 하는 순간을 그린 그림이었다.

“이 그림 제목이 ‘Me Too’야. 다들 봤냐?”

“정말?”

“나도 나도 나도.”

홍준기가 정고은을 향해 두 팔로 어깨를 감싸 안은 채 안아달라는 시늉을 했다.

“근데 이 집에 걸린 그림마다 남자가 하나도 없는 거 나만 발견한 거냐. 여인과 아이들 천국이군.”

“어, 그러네. 뭐야? 남편을 빼놓은 거 제수씨 로망인가요?”

“아님 고성훈이 다산의 왕이 되려는 거야? 그림마다 애떼들이야. 현관 앞에도 애들 대여섯이 강강술래 하고 있던데.”

홍준기는 안방과 건넌방 사이, 현관에서 정면으로 보이는 벽에 걸려 있는 르누아르의 그림을 가리키며 이어 말했다.

“아까 누가 저 그림들 원본이 천억이 넘는다고 그랬지. 그런 사실이 우리 사는 데 무슨 의미라도 던져 주냐? 어차피 다 짝퉁이야. 진퉁은 소수의 있는 놈들과 제국주의자들이 다 약탈해 갔잖아. 그거 보자고 프랑스니 런던이니 뉴욕이니 여행 가서 외화 낭비나 하면서들 자랑하는 꼴이라니 참.”

“야, 홍 사장. 욕은 좀 삼가라. 나이가 몇 개냐?…… 누가 그걸 모른대?”

김 교수의 말을 듣자마자 홍준기는 맞수 만났다는 듯 눈을 부라리며 언성을 높였다.

“알면? 알면 달라져야지. 왜 만날 똑같은 모습으로 비비적거리냐고들, 씨발. 솔직히 이 세상에 짝퉁 아닌 사람이 몇이나 돼? 그러고선 자기는 아닌 척하지.”

예주는 성훈의 등이 들썩거리는 걸 느끼고 성훈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성훈은 예주의 손을 힘을 주어 잡아 옷자락을 놓게 하더니 홍준기에게 언성을 높였다.

“야, 남의 집 좋은 날에 왜 시비냐? 귀국해서 좀 산다고 뻐기려고 했는데 우리가 다들 자리 잡고 사니까 꼴 보이냐?”

"자리 잡기는. 지랄하네. 대출 80퍼센트가 자리 잡은 거냐? 너도 짝퉁이잖아. 새끼야."

예주는 다시 한번 성훈을 잡으려 했지만 손아귀에서 성훈이 사라지고 없었다. 예주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성훈이 홍준기의 멱살을 잡고 있었다. 따귀라도 올려붙일 기세로 씩씩거리는 성훈 앞에 홍준기가 내려다보는 형국이었다. 모멸스러웠지만 성훈을 잡았다.

김 교수가 성훈과 홍준기를 떼어놓았다. 잠잠해지는가 싶었는데 성훈이 홍준기에게 달려가 주먹으로 얼굴을 가격하며 소리를 질렀다.

"야, 새끼야! 우리 돈 내 놔. 천 만원."

“여보, 참아. 좋은 날이잖아.”

한 대 더 때릴 기세인 성훈을 잡아당기며 예주가 말했다. 예주는 허리가 금이 갈 것처럼 극심한 고통을 느꼈다.

정고은이 성훈과 홍준기 사이로 가 서더니 홍준기 쪽으로 몸을 홱 돌렸다. 그리고는 홍준기의 뺨을 세게 쳤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사과 따는 풍경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