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한때 너 따위를 좋아했다는 게 정말로 부끄럽다. 아직도 나쁜 손은 여전하고. 나쁜 인간.”
정고은이 돌아서 예주에게 다가오더니 손을 내밀었다.
예주는 엉겁결에 정고은의 손을 잡았다. 그녀의 손바닥이 거칠었다. 손등도 터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을 하고 살았던 걸까 예주는 처음으로 정고은의 눈을 마주 보았다. 정고은은 거친 호흡을 누그러뜨리느라 손바닥으로 가슴을 꼭 누르고 다정한 눈빛으로 말했다.
“예주 씨, 옛 친구들 한 번 보고 싶어서 왔는데요. 추억을 함께한 친구라도 어떤 친구들은, 아니 어느 때는 안 만나는 게 좋은 것 같아요. 소란 피워 죄송해요."
정고은은 고개 숙여 인사하고 현관 밖으로 나갔다.
"씨발. 그 돈 날아갔다고. 이제 와서 지랄이야."
홍준기의 입가에 흰 거품이 고였다. 김 교수가 홍준기의 등을 떠밀며 나가자 성훈이 신발을 꿰어 신고 다급히 그들을 따라 달려 나갔다.
예주는 남은 음식을 모조리 쓰레기통에 버렸다. 보통 때라면 두어 숟가락 남은 양도 냉동고에 보관했다가 아껴 먹었는데 아무것도 남기도 싶지 않았다. 설거지할 것들은 싱크대에 얼기설기 쌓고 침대에 가 누웠다.
차가운 시트 위에 닿은 몸의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이불을 머리 위까지 덮고 손을 비볐다. 정고은이 남기고 간 온도가 손바닥에 남아 있었다. 까닭 모를 눈물이 베개로 흘렀다. 뒷목에 닿은 베개가 축축해졌을 때 성훈이 안방 문을 열고 예주의 눈치를 살폈다. 예주는 자는 체하고 눈을 감았다.
성훈은 전등 스위치를 끄고 문을 소리 나지 않게 조심하며 닫았다.
어둠 속에서 예주는 쉴 새 없이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안방의 열린 창틈으로 성훈이 누군가와 통화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 정도면 고은이한테 약하게 복수당한 거지. 옛날에 지가 먼저 찼으면서 고은이 연애하는 것마다 훼방 놨던 거 기억 안 나냐. 용서 대상은 아니지. 고은이? 몰라. 왜 온다고 한 건지 나도 미스터리야. 우리 중에 걔 짝사랑 안 했던 놈 없었지. 여전히 봐 줄만은 하더라."
성훈의 목소리가 이어졌지만 점점 멀게 들렸다. 예주는 꿈일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밝은 빛이 비치는 곳으로 더듬더듬 다가갔다. 사과나무와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두 번의 겨울이 지난 일요일 오후, 민재는 친구들과 구립 실내 체육관에서 배드민턴을 치기로 했다면서 운동화를 야무지게 신고 말했다.
"엄마, 내가 팔 차선 건너 친구들 만나러 갈 때면 엄마 심장 쪼그라든다고 그랬잖아. 이젠 그러지 않으니까 좋지?"
민재는 한 달에 한 번씩 제 아빠를 만나서 자고 오는 날이 늘수록 어른스러워졌다. 예주는 그것이 아렸지만 결핍 없이 크는 아이는 없다고 믿고 싶었다.
민재가 현관문을 닫고 나간 뒤 예주는 집을 휘 둘러보았다. 이전에 살던 동네로 이사한 지 한 달이 조금 넘었다. 사십 년이 다 되어 가는 낡은 연립이지만 민재와 둘이 살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거실 벽에 '사과 따는 풍경' 그림이 걸려 있었다.
일곱 명의 아이들과 힘을 모아 커다란 무명천에 사과를 담고 있는 엄마의 표정처럼 예주도 미소를 지어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