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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창창한 날들 Dec 11. 2024

홧김에 무얼 하기 전 루비는

루비의 엉뚱 발랄 유쾌한 생존기 #1 쿠팡 일용직 체험




<820일 날씨 폭염주의보>


제목 : 쿠팡 일용직 아르바이트 가다


루비는 더 이상 발디딜 곳이 없다고 느꼈다.

국어논술 강사로서 가진 자격증 외에 아무것도 없는 루비는 아무 데서도 채용되지 않는 자신의 처지가 한심하고 점점 급해지기 시작했다.


정수기 회사의 내근직으로 자기보다 스무 살 정도 어린 팀장에게 면접을 보고 왔지만 소식은 없었다.

장애 학생 등하교 도움 아르바이트, 시니어 예체능 강사, 맞벌이 가정의 자녀 돌보기, 강아지 시간제 돌봄, 보험회사의 모니터 요원 아르바이트, 도시락 배달업체의 포장일 등을 당근으로 알아보았지만 쉽지 않았다. 업종마다 조금씩 다르게 자신을 포장해야 하는 피곤함도 가중됐다.  


루비는 구글에서'1분도 안 돼 지원한 수 있다'는 쿠팡을 발견했다. 이름과 전화번호만 쓰면 바로 채용되는 방식이었다. 셔틀버스도 있고 점심도 준다고 했다.  

루비는 눈 깜짝할 사이에 안산 2 센터로 배정되었다. 이렇게 쉽게 일자리를 얻는 일에 얼떨떨했다.


쿠팡에서는 하룻동안 일용직 체험을 한 뒤 아르바이트비도 받고, 1년 계약직에도 채용이 된다고 하니, 루비는 30년 동안의 사교육에서 쓰던 머리, 더 이상은 쓰지 않고 육체노동을 하는 쿠팡에서 일해 보리라 마음 먹었다.


쿠팡이 반노동적인 이슈를 계속 만들어내고 있다는 기사를 본 적 있지만, 가장 손쉽게 지원할 수 있다고 하니 눈 딱 감고 해 보기로 했다.

몇 달 동안 자기소개서를 요렇게 조렇게 바꿔 쓰던 피로감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도 컸다.


밤 늦게까지 셔틀버스 앱을 깔고 쿠펀치라는 쿠팡 앱을 깔아 이름, 전화번호, 주소, 계좌번호 등을 저장했다.

당일 실수하지 않도록 쿠팡 일을 해 본 이들의 후기도 몇 개 읽어보았다.


이튿날 아침 7시 20분 셔틀버스를 타고 쿠팡에 첫 출근을 했다.

버스를 기다릴 때도 그렇더니 버스에 탄 이후에도 사람들 표정이 무겁고 우울하고 피곤해 보였다.

루비는 가슴이 뻐근하게 아파다. 이런 기분으로 출근하기 싫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일단은 하루가 끝날 때까지 가 봐야 했다.


쿠팡 물류 센터라는 거대한 건물 앞에 버스가 섰다. 수십 대의 버스에서 수천 명이 쏟아 내렸다. '입장'이라고 표시된 화살표를 따라 들어가는 사람들이 컨베이어 벨트의 물건들 같았다. 그들의 발걸음은 매우 익숙해 보였다.

루비는 초조하고 우울한 표정으로 그 무리를 따라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2시간 가까이 신입 교육을 받은 뒤 입고에 불려 다. 전국에서 온 상품들을 어마어마하게 큰 물류창고에 쌓는 일이었다.

관리자가 선배에게 루비맡겼는데, 그 선배는 루비를 성가시게 느끼는 듯했다. 이십 대로 보이는 그녀는 세상 편안한 복장으로 머리를 느슨하게 묶은 채 몸을 능숙하고 재빠르게 움직였다. 베테랑의 냄새가 풀풀 풍겼다.


1시간 쯤 지났을 때 루비는 발바닥에서 불이 나는 듯했지만, 끽 소리 못하고 선배를 따라다녔다.

 관리자가 와서 루비의 선배와 뭐라 뭐라 말하더니 루비에게 따라오라고 했다. 출고하는 곳이었다. 그날 온 아르바이트 다섯 명을 급한 상품 출고에 몰아서 투입한다고 했다.  


폭염주의보가 내려진 날이었다. 거대한 에어컨이 돌아가고 있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트럭들에서 물건이 오르내릴 수 있게 건물의 한 쪽 면 전체가 열려 있었으므로 몹시 더웠다.


관리자들은 두 시간 정도 일한 일용직들을 에어컨이 있는 휴게실에서 20분 쉬며 포도당을 한 알씩 먹으라고 했다. 일사병을 예방하는 차원이라고 했다. 그때의 달콤한 휴식이란. 루비는 의자에 비스듬히 누운 채 잠깐 잠이 들었다.

다시 일이 시작됐을 때 루비는 점심 시간만 기다렸다.


옥탑 식당에 올라가니 점심이 뷔페로 제법 잘 나왔다. 공짜루비는 달게 먹었다.

식당에 줄지어 들어오는 사람들 표정 역시 웃음기가 없었다. 서로 아는 무리들끼리는 웃고 농담을 해도 모르는 이들에게는 싸늘할 정도로 무표정이었고, 서로를 피곤한 대상으로 여기는 듯 피했다.


루비는 공짜로 먹을 수 있게 비치해 놓은 아이스크림을 두 개 먹으면서 휴게실의 안마의자에서 20분쯤 널브러져 쉬었다.

오후에 세 시간 동안 루비가 맡은 일은 쌀 10kg을 봉지에 넣고 운송장을 붙인 뒤 컨베이어 벨트에 던지는 일이었다. 나중에 세어 보니 100포대가 넘는 양이었다.


이십대 여성과 삼십대 남성이 하루 아르바이트로 왔는데 기막히게 일을 잘했다.

루비는 그날 쿠팡에서 본 사람들 가운데 그 둘이 유일하게 표정이 밝다고 느꼈다. 그들은 각각 대학과 대학원에 다닌다면서 쉬는 날에 쿠팡 아르바이트를 해서 십 만원을 번다고 했다.

그들은 쿠팡 센터마다 특성이 다른 점도 꿰고 있었다. 루비는 두 사람에게서 미래지향적인 자세를 보고 기분이 좋아졌다.


루비와 함께 일한 아르바이트생들이 관리자 눈을 피해 서로 아픈 곳을 눈짓으로 표정으로 공유하기도 했다.

아픈 부위가 각자 달랐는데 누구는 허리, 누구는 팔, 루비는 발바닥이었다.


불이 나고 쪼개질 듯 아픈 발바닥을 몰래 몰래 스트레칭하며 일하는 루비 앞으로 면접관이 다가왔다.

"일은 할 만하세요?"

루비는 답을 하기 위해 잠시라도 발바닥을 쉴 수 있어 나직이 한숨을 쉬고는 답했다.

"네, 할 만합니다. 그런데 무겁긴 하네요."

"여기가 20kg 이상 중량을 다루는 센터라서 쉽지는 않아요. 근데 이 정도는 가벼운 거라... 앞으로 더 무거운 것들 작업하실 수 있으실까요?"

루비는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동그란 눈으로 면접관을 쳐다보았다.

"아, 그렇군요. 좀 무리가 될 듯하지만 차차 잘할 수 있겠지요."


오후 6시에 셔틀버스를 타고 20분 만에 집 근처에서 내린 루비는 저녁놀을 보며 천천히 집을 향해 걸었다.

루비는 왕복 교통비가 들지 않는 데다 저녁이 있는 삶이 괜찮겠다 싶었다.


루비는 청과물 가게에서 무를 하나 샀다. 무전을 부쳐 먹기로 했다. 하이볼도 한 잔 말아 마셔야겠다고 생각하며 하루의 노곤함을 풀 생각에 루비는 조금 설레기도 했다.


지난 30년 동안 오후 1, 2시에 시작해 11시까지 일하느라 퇴근하고 누리는 저녁 시간이란 존재하지 않았고, 주말은 보충 수업, 시험 준비 등에 반납했다.


루비는 아침에 출근하고 저녁에 퇴근하는 일반인의 삶, 주말이 있는 삶을 동경해 왔다.


1년 계약직에 합격하면 이른 아침에 출근하고 6시에 퇴근한 뒤 고요히 저녁을 먹는 삶, 산책하고 와서 독서하 이른 시각에 잠자리에 드는 삶, 일본 영화 '퍼펙트 데이즈'의 청소부 히라야마 같은 삶을 살고 싶다고도 생각했다. 시인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소박한 꿈에 부풀기도 했다.


웃음기가 보이지 않던 사람들의 얼굴이 떠올랐지만, 루비지금 아무 생각 없이 규칙적인 삶을 사는 것에 더 매력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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