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사람 '윤가은'에 스며든 밤

윤가은 감독과 나눈 화상 대화 후기

by 창창한 날들




작년에 육 개월 동안 격주로 '씨네 페미니즘' 토론회에 참여했다.

페미니즘의 시각으로 영화를 보고 토론하고 강연 듣고, 글 쓰는 교육 일정이었다.

특별행사로 윤가은 감독을 초청하여 대화를 나누었다.

<손님>, <콩나물>, <우리들>, <우리집>을 만든 윤가은 감독과 온라인으로 대화를 하다니!

고난의 코로나 시국에 단비 같은 소식이었다. 오프라인이었다면 가능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120분의 대화 시간이 너무 짧았다.

처음엔 어색해하던 윤가은 감독도 대화 시간이 길어질수록 카페에서 친구들과 즐거이 이야기 나누듯 얼굴이 펴지고 시종일관 웃는 낯이었다. 신나서 말할 때 그러듯 말하는 속도도 조금 빨라졌다.


한동안 윤여정 배우에게 ‘윤며들었던’ 나는 그것과는 다른 결로 윤가은 감독에게 ‘윤며들었다'.
윤가은 감독은 어떤 질문에든 최선을 다해 답변했다.

‘정성’으로 사람을 대하는 것이 얼마나 가치 있는지 그의 말 한마디 한 마디에서 느낄 수 있었다. 누가 됐든 섣불리 판단하지 않으려는 자세가 우리와의 대화에서도 그대로 나타났다.

윤가은 감독의 영화도 좋았지만, 그날의 대화를 특별히 기다린 건 그날의 강연을 준비해 준 활동가가 '성인 배우들이 지켜야 할 촬영 수칙'을 공유해 준 덕이었다.

한국 영화계에서 이러한 내용의 촬영 수칙이 문서로 공개된 것은 처음이라고 한다.

윤가은 감독이 영화 촬영 전 과정에서 어린이 배우들을 진심 어린 태도로 대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성인 배우와 스텝들 틈바구니에서 자칫 무시될 수 있는 어린이 배우들의 인격을 존중하는 윤가은 감독의 자세가 인상 깊었다.

총 9개 수칙은 윤가은 감독이 ‘우리들’을 촬영하며 겪은 시행착오의 결과물이라고 했다.

1. 어린이 배우를 프로 배우로 존중하기
2. 머리 정리 등 신체 접촉을 할 때 미리 알리기
3. 촬영 준비를 충분히 할 수 있게 배려하기
4. 어린이 배우 앞에서 욕하지 않기
5. 외모가 아닌 행동에 대해 칭찬하기
6. 정해진 시간 내에 촬영 마치기
7. 건강 문제 인지하면 보호자 등과 공유하기
8. 이동 등 어떤 경우에도 혼자 두지 않기
9. 말과 행동에 모범 보이기


놀랍게도 윤 감독은 “수칙을 충분히 지키지는 못했다.”라고 고백했다.

어느 감독도 그런 전례를 보여준 이가 없기에 시도 자체가 놀라운 일인데, 실천된 정도를 부끄럽다고 말하는 모습을 보니, 다음 영화에서는 더욱 섬세하게 어린 배우들의 인권을 고민할 것 같다는 믿음이 갔다.



윤가은 감독은 촬영하기 전과 촬영 중, 후의 다양한 에피소드를 가감 없이 들려주었다.

"모든 과정은 배우들과 스텝들과 함께 만들며 깨지며 다시 세우는 실수의 연속이었습니다."

작지만 단단한 목소리로 차분하게 고백하는 모습을 보며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조금의 과장도 용납하지 않는 사람이구나 싶었다.

배우와 스텝들에게 '성폭력 예방 교육'을 하자는 한 후배 감독의 제안을 받아들였다는 데에선 다른 사람들을 존중하고 존경하는 자세가 엿보였다.

윤가은 감독은 캐스팅도 특별한 방식으로 시도했다. 어린이 배우들을 직접 만나 대화하고 즉흥극 놀이를 하는 과정을 통해서였다.

성인배우들이 하는 오디션 방식은 어린이 배우뿐 아니라 감독 자신에게도 폭력적이라 느껴져 피했단다.

윤가은 감독은 인생 영화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아무도 모른다>를 최고로 꼽았다.

자신의 영화가 사람(혹은 배우)을 판단하거나 평가하지 않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철학에서 영향받았다고 했다.

한때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에 심취했던 터라 더 반가우면서도 내가 왜 좋아했는지 그 이유는 흐릿했는데 윤가은 감독의 말에서 공감했다.

윤가은 감독은 더불어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도 추천했다.

윤가은 감독은 평생 홈드라마만 만들었다는 ‘오지 야스지로’ 감독의 “나는 두부 장사라 두부밖에 못 만든다.”라는 말을 인용하면서 강의를 마무리했다.

자신도 당분간 어린이나 청소년에 대한 영화를 만들 것 같다며. 그 말을 할 때 장난기 어린 표정이 되었다. 오래오래 대화를 나누고 싶은 사람이었다.




어린 나이에 배우나 뮤지션이 되는 경우 빨리 어른이 된다고 한다.

윤가은 감독과 함께한 어린이 배우들이 어른인 척하지 않아도 되어 다행이고 감사했다.


모든 과정은 바람직한 방향을 찾아가기 위한 질문과 자신이 찾은 해답에 걸맞게 행동해야 한다. 특히 예술 창작은 그러하다. 그런 점에서 건강한 촬영 전, 중, 후를 걸으려고 노력한 윤 감독의 정직한 자세에 신뢰가 갔다.

게다가 오래된 관습을 바꾼다는 건 한 세계를 뒤집는 일이므로 시도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을 것이다.

당연하기에 들춰 생각해 보지 않은 일을 당연하지 않게 여기고 조금이라도 자리를 바꿔 보려 한 윤가은 감독, 앞으로도 응원하고 싶다.


연예인 또는 유명인을 좋아할 때 처음엔 그의 유명세를 만들어준 능력이 기준이 되기 쉽다.

그러나 애정과 존경심이 오래 가게 하는 건 그가 지닌 인간미나 철학이다.

소도시에 있는 소규모 단체 사람들의 초대에 응해준 것도 고마운데 아무런 선입견과 판단 없이 우리들의 질문을 귀 기울여 듣고 진심으로 답해 준 윤가은 감독에게 이제라도 감사함을 전한다.

오프라인으로 만날 수 있는 날, 함께 술자리 하자고 했더니, 기꺼이 응하겠노라 얘기해 준 거 잊지 않고 있다. 그날이 어서 오기를.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