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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창가림 Jul 10. 2022

남의 자식보다 내 고양이가 더 예뻐.

너네 아이는 언제 가져?

나보다 나이가 좀 더 있던 친구는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았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나긴 했지만 대화도 잘 통하고 무엇보다 둘 다 술을 좋아해서 친해지게 되었다. 날씨가 좋은 날이면 똥차를 끌고 나오는 친구는 에어컨이 되지 않아 창문을 활짝 열고 힙합을 크게 틀며 나를 데리러 왔다. 그렇게 소리를 지르며 좋은 차 못지않게 신나게 달려가 공원에 가 한참을 수다를 떨었다. 그러던 그녀가 아이를 가지게 되었고 그녀와 나의 인생은 정반대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녀가 아이를 가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똑같은 똥차를 끌고 와 그 사실을 고백했을 때 놀라기도 당황하기도 했지만 마음이 너무 뭉클했다. 그녀는 점차 안정적인 가정을 꾸리고 싶어 했고 아직 신나게 놀던 나는 그녀와의 연락이 조금씩 끊기기 시작했다. 나 또한 결혼을 했지만 아이가 없는 부부의 삶은 너무나도 달랐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그녀는 아이를 낳았고 그다음 날 친구 생각에 병원을 방문했다. 신나서 아이를 보여주는 그녀의 얼굴에는 이미 엄마의 미소로 가득했고 아이는 정말 작고 무서울 정도로 생명력이 강하다는 것을 그 작은 울음으로 표현하고 있었다.


아이는 빠르게 커갔다.


그리고 그녀와 나의 인생도 빠르게 달라졌다. 금요일 밤 술이 마시고 싶으면 무작정 연락하는 그런 삶과는 거리가 있었다. 나 또한 새로운 학업을 시작하고 내 진로와 내 가정에 중심을 두기 시작했다. 그녀의 하루하루는 sns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었다. 아이의 성장 과정과 소소한 에피소드들이 그녀의 정신없던 sns를 단일하게 채워주고 있었다. 나 또한 자주 아이 생각이 났다. 그 아이가 보고 싶었고 만지고 싶었다. 그렇게 가끔 연락을 해서 일 년에 한두 번씩 남편과 함께 그녀의 가족을 찾아갔다.


아이와 놀아주다 보면 지치기도 하지만 새로운 작은 생명의 움직임은 너무나도 신기했고 빠르게 성장하며 나를 기억하는 모습 또한 감동적이었다. 아이를 예뻐해 주는 모습을 보며 그녀 또한 굉장히 좋아했다. 가정의 소중함에 대해서, 아이의 기쁨에 대해서 하루 종일 신나서 얘기하는 모습을 보며 나는 신기해했다. 그리고 그녀는 항상 나에게 말했다. 너도 빨리 아이를 가져야 해. 그렇지 않으면 이 기쁨을 몰라. 그때 되면 고양이가 눈에 들어오지 않을걸. 이런 아이를 어떻게 고양이랑 비교해.


그렇지만 나는 여전히 우리와 함께하는 고양이가 더 예뻤다. 친구를 위해 '그렇겠지.'라고 답해 주었지만 나는 여전히 내 고양이가 더 예뻤다. 인간이라는 생명체의 아름다움을 어디에 비교할 수 있겠냐는 그녀의 확신도 신념도 이해하지만. 나는 대부분의 인간보다 내 고양이들이 더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한때 sns를 뜨겁게 달궜던 남의 집 아이 vs 나의 강아지 구하기 질문이 있었다. 한국뿐만 아니라 내가 살던 캐나다에서도 친구들은 각국의 언어로 공유하며 밈과 짤로 만들어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물론 비도덕적인 딜레마를 가진 문제이기에 이에 대해 답을 정의할 수 없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선택을 내리고 서로 싸우기 시작했다. 거의 5:5로 나뉜 싸움은 개판이 되었다. 캐나다나 한국이나 서로를 미친놈 미친년 취급하며 당장이라도 자신과 다른 답을 정의한 사람에게 사형제도정신학적 병명을 그리고 윤리의 기준을 내세우고 있었다.

 


트위터에 올라왔던 아이 vs 개 질문의 시작.
한 아이가 당신의 집에 몰래 들어왔다가 실수로 불을 냈다. 당신의 개가 집 안에 있다. 당신이 집에 왔을 때는 둘 중 하나만 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당신은 어느 쪽을 구하겠는가? 아이 48.2% vs 내 개 56.8%


고양이는 '나'의 가족이고 나의 세상의 일원이기에 나는 고양이를 더 높은 우선순위에 둔다. 그녀에게는 그녀가 직접 낳은 자식만큼 세상에 귀한 것은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그녀에게 아름다운 것은 나에게도 귀하고 아름다운 것으로 동급이 되길 바랄 것이다. 물론 귀하고 아름답다. 하지만 나에게 있어서의 우선순위는 그렇지 않다. 내 고양이를 넘어서 나는 여전히 '내'가 그녀의 자식보다 먼저였다. 그녀만 한 희생을 할 수도, 그녀 만큼의 애정도 생기지 않는다. 아이가 예쁘고 아름다운 것은 사실이지만 내 삶의 원동력도 주체도 아니다. 결국 '남'이다.


나와 남편은 그랬다. 아무리 봐도 우리 고양이가 더 예쁜 이유는 뭘까.

매일 봐도 예쁘고 사랑스러운 느낌을 그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고 말하는데 이 이상의 기쁨이 존재할까? 만약 존재하더라도 기준을 세울 수 있을까?

우리는 우리의 아이를 갖지 않는 이상 모른다.

누군가에게는 '무지'일 수도 있지만 우리는 이미 현재의 '최대치'를 경험하고 있음을 느낀다.

하루하루를 행복으로 채워주는 우리의 고양이에게 우리는 우리의 행복과 삶의 기쁨을 최대치로 느낀다.

왜 이를 '아니다'라고 부정하는가? 그렇다면 '아니다'의 증거와 기준은 무엇인가.

지금 느끼는 행복이 거짓이 혹은 낮은 단계의 가치가 될 수 있는가?


5:5로 나뉘는 싸움은 문제가 많다. 저 질문에는 어떠한 자세한 상황도. 무엇이 더 유리한지도. 가능성도. 나와 있지 않다. 질문 자체가 모순인 것이다. 불은 나고 있지만 강아지와 아이 중 문에서 누가 더 가까운 지도 우리는 모르고 싸우고 있다.


댓글들은 그랬다. '저 대답을 한 이들의 90프로는 애초에 그 누구도 구하지 않을 것.'


  댓글은 답을 말했고 나는 대답을 삼켰다.


우리의 고양이.


단기 알바를 뛰던 겨울,

나를 태워주시던 팀장님께 차에 걸린 아이의 사진을 물어보자 하신 말씀이 있었다.


"나는 세상에서 아이들이 제일 싫어요. 과거형이 아니고 아이라는 존재 자체가 너무 버겁고 지금도 너무 싫어요. 유일하게  아이는 예쁘더라고요.  아이는 무슨 진장 짓을 해도 너무 예뻐요. 그래서 아이 싫다는 사람한테 강요  하고  아이 진상짓이 싫다는 사람한테는  미안해 해야죠."


결론은 그랬다.

내 고양이도 누군가에게는 진상이고 별거 아니다. 그들에게도 강요될 우선순위가 아니다. 그리고 그들의 아이 또한 내 우선순위로 둘 필요가 없다. 그저 각자의 만족을 최고로 여기며 선을 넘지 않는 것이 이 사회를 사는 법이라 생각했다.


남편과 나는 아직 아이를 가져야 할지 모르겠다.

시댁의 바람도 친정의 호기심도 그렇게 중요하진 않다. 애초에 고민하지도 않는다.

현재로서는 우리의 최선은 우리의 고양이다.

그렇다고 고양이가 세상에서 제일 이쁜 생명체라는 정의를 할 수 없다.


그저 우리의 최선을 우리의 선 안에서 지키며 지금 나름의 행복을 지키는 것이 가장 큰 우선순위이다.

서로의 선을 넘으며 남의 행복을 깰 필요도 없다.


가치를 순위를 정하는 것도 우리 안의(만의) 합의로도 충분하고
그들 또한 그들의 합의가 만족 스럽다면 그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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