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태로운 청춘을 관조하면서 (2)
연락하지 못할 전화번호를 몇 개 품고 산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은 한 때 내 세상의 대부분을 차지했던 애들이었다. 이제 겨우 몇 해가 지났을 뿐인데, 그들의 얼굴과 목소리, 머리칼의 형태는 먼 전생의 기억을 끌어올리듯 희끄무리했다. 이젠 내게 염치라는 게 별로 남아있지 않지만, 그래도 있지. 우리 정말 다시는 만날 수 없는 걸까? 다신 볼 수 없는 사람이라 여기고 살아가기엔, 우리의 삶은 아직 삼 할 정도도 넘지 않았는데. 나도 모르는 사이 몇 개의 세계를 건너 다니는 꿈을 꾼 것 같다. 일장춘몽의 기억처럼 모두 덧없다고 치부해 버리고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는 꿈. 인과 없는, 혹은 기승전결이 완벽했던 몇 개의 이별 이후로, 사랑했던 얼굴을 뒤로 보내는 일에 그럭저럭 익숙해지던 참이었다. 삶이란 원래 그런 거니까, 이별과 만남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게 우리가 살아가는 생의 본질이니까. 감내하며 인내하는 것이 생을 관통하는 무언의 도리라고 여겼다. 그러나 아주 가끔은 우리가, 어떻게 우리가 이렇게..? 싶은 것이다. 모든 인과와 논리를 뒤로 미룬 채 감정만을 되새길 때 흔히 접할 수 있는 오류. 좀처럼 우리가 분절되었다는 사실마저 모르는 사람처럼 굴고 싶어진다.
오늘은 집에 돌아오는 저녁 내내 따뜻한 봄바람이 살갗을 스쳤다. 바야흐로 소생의 계절, 지독하게 앓던 세계에도 새순은 돋고 꽃잎은 얼굴을 내민다. 거기에도 여전히 봄이 온다는 사실을 시간이 좀 지난 후에야 알게 되었지. 모든 약속들이 속절없이 저물었지만, 그럴 수만 있다면 그 무렵에 나눴던 미래와 약속들에 대해서 그 애와 오래도록 대화를 나누고 싶다. 우리가 머물렀던 세계를 다시 조명하며, 사랑 한가운데였던 곳에 우뚝 서서 꽃잎이 돋는 옛 세계를 함께 추억하고 싶었다. 그러면 언제까지고, 그 애를 사랑했던 시절로 잠시나마 돌아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