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 찌질이의 신세한탄

사랑한다는 말로도 위로가 되지 않는-브로콜리 너마저

by 범준쌤

나는 연애 찌질이다. 서른 하고도 , 올해 나는 드디어 30대 중반에 들어서게 됐다. 'ㅅ'받침부터는 중반이라고 했던 최초의 인물에게 찾아가 따지고 싶지만, 어쩌랴 어느새 30대 중반이 된 걸. 으른의 연애를 하고 있을 줄 알았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서로 배려해주고, 존중해주며, 각자의 길을 지지해주는 으른의 연애를 하지 못했다. 오로지 나만을 생각했던 연애였다. 상대를 배려했던 말과 행동은 결국 나를 위한 말과 행동이었다.


그땐 인정하지 못했다. 무엇보다, 솔직하게 여자친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던 비밀이 많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별 것 아닌데, 그 당시에는 그게 트라우마였고, 부끄러움이었고, 그 이야기를 하면 나를 이상하게 볼 것만 같았다. 인간관계에서 보이던 회피 성향과 과도 오버스러움은 연애에도 고스란히 드러났다.


이때까지 나는 2번의 연애를 했다. 첫 연애는 스무 살 때였다. 3~4년을 만났고, 헤어지고 난 후 3~4년을 솔로로 있었다. 두 번째 연애는 28살 때였다. 2년을 사귀고, 2년을 솔로로 지냈다.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난 사귄 만큼 솔로로 보내는 시간을 보냈다. 이것보다 중요했던 건 연애를 했던 상대방이 나에게 느꼈던 공통적인 감정이었다. '(너는 혹은 오빠는) 나한테 무언가 말하지 않는 게 있는 거 같아. 왜 힘들다고 이야기를 안 해? (넌 혹은 오빠는) 힘든 게 없어? (너는 혹은 오빠는) 왜 나한테 이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이야기 안 해?' 등과 같은 반응이었다.


그땐 몰랐지만 나는 지극히 갈등을 일으키기 싫어하는 성향이었다. 갈등을 일으키는 것보다 내가 참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지금도 여전히 그렇다. 친한 사람이든, 안 친한 사람이든 누군가와 얼굴 붉히면서 싸우는 게 싫었다. 갈등을 일으키는 상황 자체를 피하고 싶었던 거다. 내가 손해 보더라도, 내가 힘들어도, 상대방의 말과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아도 나는 이야기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상대방은 그런 나를 오해했다. 이 사람은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닌가 하는 식의 오해였다. 그땐 몰랐지만, 이제 그 마음을 충분히 이해한다. 만약 누군가에게 마음속 깊은 이야기를 용기 내서 스스럼없이, 솔직하게 하는 데, 상대방은 그런 이야기를 전혀 꺼내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 사람을 쉽게 신뢰할 수 없게 된다.



그런 날이 있어

그런 밤이 있어

말하지 아마도 말하지 않아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넌 말이 없었지만


그런 말이 있어

그런 마음이 있어

말하진 않았지 위로가 되기를

이런 말은 왠지 너를 그냥

지나쳐 버릴 것 같아서


정작 힘겨운 날엔 우린

전혀 상관없는 얘기만을 하지

정말 하고 싶었던 말도

난 할 수 없지만

사랑한다는 말로도 위로가 되지 않는

깊은 어둠에 빠져 있어

사랑한다는 말로도 위로가 되지 않는


-사랑한다는 말로도 위로가 되지 않는, 브로콜리 너마저 [졸업] 2번째 트랙



정작 힘겨운 날에 나는 전혀 상관없는 얘기만을 그녀에게 했다. 회사에서 힘든 일이 있어도, 부모님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아들이라 마음이 시리고, 상처 받았을 때도 나는 그녀를 오히려 웃겼다. 시시껄렁한 농담과 유머러스함으로. 정말 하고 싶었던 말은 별로 중요하지 않는 말들에 가려져, 내 마음에만 남아있었다. 그걸 그녀도 느꼈던 것인지 노력했지만, 계절이 몇 번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 나를 보면서 많이 힘들어했을 거 같다.


나는 왜 사람들에게 솔직하게 이야기를 하지 못할까 생각해보았던 적이 있다. 명확한 답은 나오지 않았지만 어느 정도의 답을 나름 찾았다. 타고난 성향도 있겠지만, 내가 자라온 환경의 영향이 있었다. 직업군인 출신의 아버지 밑에 자라오면서 정해진 규칙 하에 살아왔다. 학생은 이래야 하고, 아들이면 이래야 하고, 아내면 이래야 하고, 아침밥은 꼭 먹어야 하며, 어른한테는 이렇게 해야 한다는 아버지가 정한 그 틀에 오랜 시간 끼워 맞춰져 살아왔다.


그리고 아버지는 나에게 칭찬을 잘하지 않았다. 오히려 지적을 많이 했다. 어떤 성취를 이루어도, 그건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다. 마음이 많이 아팠다. 아버지를 싫어했지만 또 사랑받고 싶었기에 아버지에게 사랑받기 위해 내 속마음을 말하지 않고, 말하지 못하고 그 틀에 나를 구겨 넣었던 것 같다. "아빠, 나 너무 힘들어. 그렇게 강요하고, 화내는 거 싫어.", "엄마한테 그렇게 말하지 마. 아빠 없을 때 엄마 우는 걸 나 지켜보는 거 힘들단 말이야." 나는 왜 그런 말을 아빠에게 하지 못했을까. 아마 그 말을 하면 나를 사랑하지 않을까 봐, 나를 싫어할까 봐 말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렇게 10대를 보냈고, 그렇게 20대를 보냈고, 그래서 이런 30대가 되었다.


나는 아버지와 단둘이 술 한잔을 기울이며 진솔한 이야기를 아직도 해본 적이 없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아버지를 여전히 사랑한다. 술이 체질상 맞지 않지만, 그래도 더 늦기 전에 꼭 한번 해보고 싶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떨어져 살다 보니 더 애틋해졌고, 사이도 좋아졌다. 부모님 집 근처에 강의를 할 때면 꼭 집을 들려서 하룻밤 이상은 자고 온다. 그리고 하루에 1번씩 아버지와 어머니를 안아드린다. 처음에는 쑥스러워하시고, 거절하시더니 이제는 내 품에 쏙 안기신다. 포옹하고, 손으로 등을 어루만지며 쓰담 쓰담해드린다. 참 좋다. 왜 진작 나는 그렇게 작아져버린 아버지를 껴안아드리지 못했을까. 이제 나는 아버지와 진솔한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에게 상처 받았던 날들을 훌훌 털어버리고, 용서해드리고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나의 힘듬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연애를 찌질하게 했던 이유는 결국 부모님과의 관계와 이어져있었다. 아직도 여전히 낯간지럽고, 어색하고, 쉽지 않겠지만, 부모님과 함께 진솔히 이야기를 앞으로 조금씩 해보려고 한다. 내가 무엇이 힘들고, 나는 지금 어떤 상황이고, 어떤 꿈을 지니고 있는지 말이다. 그래야 이 연애 찌질이를 탈출할 수 있을 것만 같다. 상처 받은 영혼을 잘 들여다보면 오래된 상처가 있다. 오래전부터 알아온, 나에게 소중한 이, 사랑하는 사람, 바로 부모님이 낸 깊은 상처다. 우리는 부모님에게 받은 상처를 살펴봐야 한다. 그 상처를 소독하고, 연고를 발라주고, 회복되어 갈 때 새로운 사랑을, 제대로 된 사랑을 시작할 수 있지 않을까.



이전 05화나를 위해, 남을 위해 감정을 숨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