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알게 해 준, 나를 지켜준 책들
2015년, 가을이 들어설 무렵 회사를 관두었다. 그리고 겨울, 여자친구와 헤어졌다. 아무런 일도 하지 않으니, 사람들과의 만남도 줄어드니 무기력과 우울함이 찾아왔다. 얇아져가는 통장잔고를 보면 더 불안해지고, 내가 한심스러워졌고, 미래가 암담했다. 남들은 오전 근무를 마치고 직장동료들과 하하호호 웃으며 함께 점심을 먹으러 갈 때, 혼자서 봉구스 밥버거에서 밥버거와 컵라면을 먹고 있는 내가 초라해 보였다. 뭐라도 해야겠다 싶어, 평소 미뤄두었던 평생교육사 실습을 시작했다. 근데 출근 하루 만에 관두었다. 전화를 받고, 사람들을 응대하고, 수업 출석체크를 하는 이 일을 잘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 갑자기 엄습했던 것이다. 평소라면 아무렇지도 않게, 그 누구보다도 잘할 수 있는 일들이 너무 어렵게 느껴졌던 순간을 기억한다. 그리고 여기에 더 이상 있기 싫다는 감정이 강하게 올라왔다. 그래서 실습 담당자님께 거짓말을 했다.
방금 아버지가 갑자기 쓰러지셨다는 연락이 왔어요. 당장 김해로 내려가야 할 거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거짓말이었다. 그 말을 전하고 양해를 구한 뒤 그대로 도망쳤다. 그리고 이후에도 그곳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아버지는 이제 괜찮아지셨냐는 담당자의 따뜻한 말에, '이제 괜찮아지셨지만, 계속 김해에 머물러야 할 거 같아서 실습을 못하겠다'며 또 거짓말을 해버렸다. 이 거짓말과 이 경험은 나를 더욱 움츠러들게 만들었다. 두려움을 직면하지 않고,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도망치는 자신이 혐오스러웠다. 그렇게 힘든 시기에도 불구하고, 가족들에게, 친한 친구들에게 괜찮은 척, 잘 지내는 척을 했다. 그때의 나는 내 상황을 그들에게 솔직히 이야기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 시기였다.
현실도 잃고, 꿈도 잃은 상태였다. 희망은 없고 절망만 내게 남은 것 같았다. 부정적인 말을 스스로에게 계속할 뿐 그 누구와도 속 깊이 이야기할 수 없었다. 아무런 빛이 없는 동굴 속에, 입구가 무너져버린 터널 속에 혼자 덩그러니 남아 있는 것 같았다. 2014년, 창업을 실패하고 겪은 우울함과 무기력보다 훨씬 강력한 녀석이 내게 찾아왔었다.
하루 종일 웹툰만 봤다. 밤늦게까지 멍한 상태로 웹툰만 보다가 잠들었다. 나의 일상에서 오전 시간은 사라져 버렸다. 오후 2시쯤 일어나 씻고 3시에 집 밖을 나섰다. 룸메이트가 조기출근을 하기에, 오후 4시쯤이면 집으로 돌아오는데, 나의 그런 모습을 보여주기 싫었다. 정처 없이 걷거나, 카페에서 휴대폰을 하며 시간을 때웠다.
어느 날, 알람 소리를 못 들었는지, 알람을 맞추지 않았는지 3시쯤 일어났다. 허둥지둥 씻고, 나가려고 했을 때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내 앞에 있는 거울을 쳐다보았다. 그 거울에서 흐리멍덩한 눈빛을 지닌, 이런 모습을 들키지 않으려고 조급함과 다급함만으로 가득 찬, 무기력하고 절망적인 표정을 한 한 사람이 있었다. 나였다. 순간 눈물이 흘렀다. 펑펑 울었다. 이렇게나 많은 시간이 내게 있는데, 할 일이 없다는 사실이, 그리고 여전히 작은 공간에서 혼자 처박혀 움츠러들어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억울하고 자신에게 미안했다.
더 이상 이렇게 살 수는 없었다. 이렇게 죽기도 싫었다. 세수만 간단히 하고 옷을 두툼히 챙겨 있고 집을 나섰다. 정처 없이 걸었다. 하염없이 발길 가는 대로 길을 따라갔다. 우연히 집 근처 작은 도서관이 보였다. 이상하게 그 공간이 끌렸다. 예전에는 저기 가서 책도 많이 빌려보고 했었는데, 오랜만에 가볼까 싶어 들어가 보았다. 왠지 들어가고 싶었다. 차가워진 몸을 도서관 안에서 녹이고 싶었다. 2층 열람실에 들어가 책들을 쭉 살펴보았다. 아늑한 느낌이 들었다. 오랜만에 편안한 감정이 들었다. 신간 서적이 요즘 뭐 있나 본 후, 종교/철학/심리 분야를 둘러보았다. 어떤 책인지 기억나지 않지만, 그때 우연히 집어 든 책에서, 우연히 펼친 페이지에서 운명 같은 문장을 발견하게 되었다.
인간으로서 가장 위대한 도전은 자기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세상이 멈춘 듯했다. 천둥이나 벼락을 맞았으면 그런 느낌이었을까. 큰 망치로 머리를 한대 얻어맞은 듯했다. 그리고 그 문장을 읽었을 때 마음이 평온해졌다. 무언가에 중독되지 않아도, 그 순간 자체에 몰입한 적은 너무나도 오랜만이었다. 그리고 다시 시작해보자는 마음이 들었다. 폐허에서 다시 일어서고 싶었다. 나를 변화시키기 위한 위대한 도전을 다시 시작해보자는 생각이 강렬했다. 내가 겪고 있는 이 문제를 해결해보고자 결심했다. 일단 내가 왜 힘든지에 대해서 이유를 알아야 했다. 심리상담전문가를 찾아가기에는 모아둔 돈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 스스로 책을 읽으며 공부해나가기 시작했다.
그때 만난 소중한 책들은 마리사 피어의 <나는 오늘도 나를 응원한다>,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 구본형의 <나는 이렇게 될 것이다> 등이다. 나의 밝음만을 내 모습으로 생각하고 어두움을 품지 않았기에, 인정하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았기에 힘들었던 것이다. 이상향적인 모습을 설정해놓고, 그 모습이 아니었을 때를 인정하지 못했고 무엇보다도 그 두려움과 어두움을 나와 남들에게 고백하지 못했다. 취약성을 드러내지 못한 채 여러 가면과 회피로 숨겨두고 있었던 것이다. 그 숨겨둔 부분이 곪아서 터졌기에 힘들었다.
쉽게 포기하고, 취약함을 드러내지 못하는 이 단점들은 아직도 있다. 하지만 이제 이를 받아들이고 인정한다. "나는 겁쟁이고, 쉽게 포기하는 사람이다'를 부정하지 않는다. 바뀐 게 있다면 힘들 때 주변 이들에게 힘들다고 말을 조금씩 하게 됐다는 것이다. 도와달라고도 요청할 수 있게 됐다. 예전 같으면 이런 글도 쓰지 못했을 것이다. 글로도 쓰고, 어느 정도 말로도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 나와 다르지만, 비슷한 고민과 경험을 했던 사람들의 글과 말을 자주 찾아본다. 브레네 브라운의 <마음가면>, 일자 샌드의 <센서티브>, 박승오, 홍승완의 <위대한 멈춤>, 에크하르트 톨레의 <지금 이 순간을 살아라> 등을 읽으며 나 자신에 대해서 보다 이해하게 되고, 더 사랑하게 될 수 있었다.
나를 알게 되고, 감정이 회복되니 도망친 무대로 다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평생교육사 2급 실습을 도망친 그곳은 아니지만, 다른 장소에서 똑같은 일을 하며 끝까지 마쳐냈다. 그리고 평생교육사 2급을 작년에 땄다. 누가 보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내게는 큰 장애물처럼 느껴졌던 일을 해내니 너무 기뻤다. 운명 같은 문장을 발견할 수 있는 기회를 더 많이 갖고자 온라인 독서모임을 만들어 운영하고 있다. 쉽게 포기하는 나이지만 이 일만큼은 어느새 3년 동안 해오고 있다. 그리고 다시 강의를 시작하고,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조금씩 해나가기 시작했다. 알고 보니 나는 겁쟁이기도 하지만, 용기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쉽게 포기하는 사람이기도 하지만, 알고 보니 나는 끝까지 해내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런 나를 이제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다. 그리고 조금은 더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