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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울창고 Nov 28. 2018

인왕아파트 그리고 안산맨숀

반 세기를 살고있는 인왕산 앞 낮은 터줏대감들


오래된 아파트 단지에 가면 종종 묘한 기분이 든다. 누군가가 태어나 모든 생애를 함께한 곳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한 걸음 한 걸음이 조심스럽다. 시간이 쌓인 그 공간을 거닐다보면 이름도 얼굴도 모를 누군가의 추억을 마주한다. 한 아이가 힘겹게 아파트 계단을 영차영차 오른다. 곧 그 아이는 친구들과 아파트 단지를 뛰어다니며 무채색의 공간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계단 사이로 난 민들레를 꺾기도 하고, 세발자전거를 타고 아스팔트 주차장을 경주장으로 만들어내기도 한다. 아이는 자라 어느새 교복을 입고 터덜터덜 계단을 내려와, 집을 떠난다.


건물은 말을 하지 않는다. 그저 한 사람 한 사람을 품고, 그들의 오고감을 담아낼 뿐이다. 시간이 켜켜이 쌓인 동네일수록, 건물은 더 과묵해진다. 그의 빛났던 과거를 뽐내는 대신, 물이 똑똑 새는 파이프 아래로 벗겨지는 페인트 조각을 떨어뜨리며 차가운 듯 푸근하게 남은 이들을 더 끌어안는다.


인왕산과 안산의 사이를 지나는 통일로를 걷다보면 이런 터줏대감들을 많이 만날 수 있다. 인왕산 아래 누구나 알아보는 고급 브랜드 마크를 달고 있는 고층 아파트 앞, 길을 지키고 있는 인왕아파트와 안산맨숀도 동네에서 꽤나 알아주는 터줏대감들이다.





1968년생인 인왕아파트는 올해로 반세기를 살았다.


인왕아파트

주소: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홍제동 104-58 (통일로32길 3)


인왕아파트는 대한주택공사가 서울시 주거난 해소를 위해 추진한 프로젝트의 결과물로, 1968년에 지어졌다. 당시 종로-서대문이 한 학군으로 묶여있어, 교육환경이 좋다는 점을 강조하고, 맞벌이 부부에게 이상적이라는 타이틀로 분양을 진행했다.


지상 6층의 아파트 4개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주거용 126 세대, 점포 6세대로 건물 1층에 점포가 위치해있는 상가아파트이다. 입주 당시 미곡상, 양장·양품점, 잡화상, 식료품정, 미장원, 식육점 등 생활에 필요한 각종 부대시설들이 입점했다. 지어질 당시에는 이러한 상가아파트가 많지 않았던 것을 감안하면, 당시에 굉장히 고급 아파트였음을 알 수 있다. ‘현대식 문화생활을 인왕아파트에서’라는 제목으로 광고하기도 했다. 전면 및 부엌 발코니에 장독대와 연탄 등을 저장할 수 있게 한 점, 부엌을 연탄 아궁이 형식으로 설계해 거실 난방을 가능하게 한 점 등 당시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다.


현재는 도예공방, 세탁소, 미용실이 운영중이다.



인왕아파트를 매력적으로 만드는 것은 기존 필지에 순응하여 4개의 동이 배치되어 있다는 점이다. 비정형의 필지를 따라 각각 다른 각도로 배치된 4개의 동은 가운데 마당을 둘러싸며 무리하게 길을 막거나 기존 도시의 질서를 무너뜨리지 않고 땅에 맞게 흐르듯 배치되어 있다.

박스형태의 정형 고층 아파트들이 줄 맞춰 서 있는 현대식 아파트 단지와는 달리, 필지 모양에 따라 건물이 꺾여있거나, 대지 경계에 따라서 아파트를 배치하는 등 현대인의 눈에는 과감하게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아파트 단지에 들어서면 그 흐름을 따라 형성된 동선을 자연스럽게 따라 안쪽으로 걸어 들어가게 된다.


1960-70년대에 지어진 대부분의 아파트가 그렇듯, 3층이 입주 당시 가장 인기가 많았다. 현대 아파트들은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어 있어 탁 트인 전망을 담보하는 고층이 인기가 많은 데에 반해 당시 아파트들은 엘리베이터가 없다보니 3층이 가장 인기가 많았던 듯하다.  


나무로 된 우편함엔 ‘이사감’ ‘유△△ X’ 등이 써있다.
인왕아파트를 지키는 삼순이, 삼식이의 모습이다. 몇몇 주민들이 집을 마련해주고 사료를 주고 있다.








안산맨숀

주소: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홍제동 104-20 (통일로 32길 6)


안산맨숀은 인왕아파트와 마찬가지로 대학주택공사의 시공 아래 1972년에 완공되었다. 인왕아파트와 형제처럼 좁은 골목을 가운데에 두고 마주보고 있다. 안산맨숀은 지상1층은 상가로, 지상2~6층은 주거공간으로, 44세대 거주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주거공간과 중정이 위치하고 있는 2층이 실질적인 1층의 역할을 한다.  


분양 당시 시내 중심부에서 가장 가깝고 값싸고 환경좋은 상가아파트로 소개되었다. 초기 이름은 ‘안산상가아파트’였으나, 주거 브랜드의 고급화를 위해 ‘안산맨숀아파트’로 간판 변경했다. 실제로 70년대에는 연예인, 정치인 등 유명인들이 거주했다.



안산맨숀은 무엇보다 건축적인 매력이 돋보인다. 진주를 품고 있는 조개와 같이, 안산맨숀의 진정한 매력은 건물 안에 들어서야 비로소 보인다. 입구를 통해 관리사무소를 지나 계단을 올라오는 순간 눈에 들어오는 중정은 마치 완전히 다른 차원의 세계로 들어선듯한 느낌을 준다. 사다리꼴 대지를 따라 안산맨숀은 가운데에 사다리꼴 중정을 품고 있다. 천장이 없는 개방형 중정으로 햇살과 바람이 그대로 들어온다.


중정을 향해 각 세대가 문을 두고 있는 내향형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웃과의 소통이 적어진 현대에는 조금 어색할 수 있는 구조


중정을 가운데에 두고 계단을 따라 차례차례 층을 올라갈수록 중정은 매력을 더한다. 정점은 6층이다. 6층의 작은 마당은 주민들의 커뮤니티 공간 역할을 한다. 주민들의 손을 탄 작은 정원을 지나 옥상으로 올라가면 텃밭을 만날 수 있다. 옥상 전체를 경작지로 활용하여 교외의 대안역할을 하게 했다. 프랑스 건축가 르 꼬르뷔지에가 건축의 5원칙 중 하나로 꼽았던, 건물이 서기 전에 있던 녹지를 대체하는 ‘옥상정원’ 개념을 떠올리게 한다.

 

주민들의 커뮤니티 공간으로 사용되는 작은 정원이다.
계단을 한층 더 올라가면 옥상 텃밭을 만날 수 있다.
연탄으로 불을 떼던 중앙난방의 흔적이 남아있는 굴뚝 뒤로 우뚝 솟은 신형 아파트가 보인다.


옥상에서 내려다보는 홍제동에는 여기저기 덕지덕지 묻은 시간의 흔적과, 천천히 그러나 빠르게 새로이 밀고 들어오는 현대식 건물의 물결을 볼 수 있다. 땅과 가까이 붙어있는 낮은 집들을 바라본다. 이 터줏대감들이 언젠가 새로운 건물에게 자리를 내줄 때, 그들이 서 있던 땅이 그들의 기억을 고스란히 담아주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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