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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창일 Feb 17. 2019

나도 모르게 살아온 '트렌디 라이프'

    사람은 대부분 어린 시절에 자신을 특별한 존재라고 생각하는 시기가 있다. 나 역시도 내가 그런 줄 알았다. 그러던 어느 날 돌이켜보니 내가 얼마나 평범하고 내세울 것 없는가 하고 깨닫는 순간이 왔다. 그게 아마 스무 살 즈음이었던 것 같다.


    자존감이 낮은 20대 중반을 보내고, 방송일을 하다가 늦게 간 학교에서 교수님들과 대화를 하며 내 삶을 돌아보고 자존감을 많이 회복하는 시기를 보냈다. 자존감을 회복하는 키워드는 내게 있어서 나 자신의 선택을 믿고 추진하는 것이었다. 우유부단하다는 말을 많이 듣던 나였는데, 그것은 나 자신의 선택에 대한 확신과 믿음, 행동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주저하는 삶을 살아온 것이다.


    그렇게 조금씩 내가 하는 일에 자신감이 붙고, 평범한 삶 속에서의 소소한 즐거움을 찾아가고 있었다. 내가 하는 일과 취미가 비록 거창하고 부티나는 것은 아닐지언정, 개성 있고 독립적이며 나름대로 자유로운 무언가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얼마 전 문득 돌이켜보니, 나도 참 착각하며 살았구나 하고 스무 살 때와 비슷한 감정을 느끼게 되었다. 최근 몇 년 전부터 뉴스에서는 n포 세대(연애, 결혼, 출산 등 n가지의 무언가를 나름의 이유로-특히 경제적-포기한 요즘 한국의 젊은 세대)라는 단어를 접하고, 일본의 젊은이들은 1마일족(동네 인근 1마일 이내에서만 생활하면서 큰 야망 없이 작은 것에 만족하는 세대)이 되어가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1마일족은 꿈이 사라져 오히려 사소한 작은 것으로 행복하다는 뜻으로, 무언가 노력해도 성취할 수 없는 젊은이들이 찾아낸 쥐구멍 같은 행복을 역설적으로 의미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이런 뉴스를 접한 뒤, 나 자신을 보며 나도 n 포 세대인가? 하지만 나는 지금 하는 일 때문에 결혼을 미룬 것이지 비혼 주의자는 아니니까...라고 생각하며 지나쳤다. 그런데 이제 와서 다시 생각해보니 그건 나 자신을 속이는 꼴이었다.



    나는 내가 독립적이고 자유롭게 살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따지고 보니 이 사회의 흐름에 아주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그 흐름에 몸을 맡긴 뉴스 속 주인공이었다. n포 세대는 남 얘기가 아니었다. 친구 중에는 지금도 결혼하고 출산하고 가족을 꾸리고, 창업하거나 회사에서 승진하는 경우도 많은데 그에 비하면 나는 더욱 그런 사회 용어에 가까운 꼴이었다.


    새로운 용어가 생겼다는 것은, 이미 그 현상이 사회적으로 큰 흐름이 된 것이라 생각한다.(물론 의도적으로 단어를 만들어 유행시킬 때도 있겠지만, 이건 다르다고 생각한다.) 내가 내린 결정이 사회적 현상에 의해 속박당했달까? 내 자유 의지의 그릇이 작아졌달까? 가랑비에 옷 젖듯이, 내 인생의 큰 결정을 자신의 생각이 아닌 사회적 흐름에 맡긴 셈이었다.


    나는 회사에 다니다가 상사와 동료들 간의 의견 마찰도 싫고, 승승장구할 미래가 보이는 직장도 아니었을뿐더러, 친한 친구 결혼식도 못 가는 업무의 과중함이 싫어 퇴사했다. 그리고 개인적인 일을 찾아 프리랜서로 활동하고 있다. 처음에는 이게 잘 될까 싶었는데 이 길도 조금씩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개인적인 시간이 늘어나(이게 정상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운동이나 여가를 즐기며 살게 되었다.


    그런데 그 과정 속에 큰 야망이나 연애, 결혼 같은 인생의 보편적 흐름이나 목표가 희미해져 가고 있다. 그냥 지금 이대로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작은 소비를 하며 큰 사고 없이 지내는 것에 감사하며 즐겁다.


    이렇게 된 지금의 내 모습은, 떠올려보니 내 주변에 세워진 어떤 가상의 장벽?이라고 할까? 내가 할 수 있는 선택지의 범위가 작아졌기 때문에 그 속에서 고르고 골라, 나 스스로 행복해질 방법을 찾다가 나온 모습인 것 같다. 인간은 어떤 상황에서든 즐거움을 찾으려 하는 본능이 있다. 그것이 일본의 1 마일족으로 표현됐다고 생각한다.


    사회적인 시스템의 변화를 분석할 정도의 지식은 없다. 하지만 지금의 세대는 그 나름대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 좁아지는 공간 속에서 행복하려고 발버둥 쳐온 셈이다. 제목의 의미가 내가 능동적으로 유행을 쫓아간 것이 아니라, 선택지가 좁아진 줄도 모르고 그 안에서 자유롭게 선택했다고 착각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작은 행복도 행복이다. 현실과 비교한 내 삶이 그리 싫지만은 않다. (좋다. 라고 쓰기엔 또 뭣해서 부정의 부정문을 사용함...)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사회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살아왔다. 자유롭다고 생각하지만 육체의 본능에 지배당한 채 사는 인간의 인생처럼, 인생의 크고 작은 결정도 사회의 큰 흐름에 지배당하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무엇 하나 그렇지 않은 게 있나 싶긴 하지만...


    어쩌면 엉뚱한 생각이라고 할 수도 있겠으며, 나의 부족한 점을 사회의 탓으로 돌리는 변명 아닌가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글을 쓰는 목적은 누군가를 탓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런 생각을 했다 정도의 작은 기록용이기 때문에 큰 의미를 둘 필요는 없다. 그동안 나무만 보고 살아왔다. 조금은 숲을 본 것 같은 기분에 쓰는 오늘의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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