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 남양유업 창업주 외손녀 황하나의 마약 투약·공급 의혹을 최초 보도한 박창민 일요시사 기자가 출연해 황씨와 지인의 대화가 담긴 음성파일을 공개했다. 박 기자는 앞서 지난 2일 황씨와 지인이 나눈 카카오톡 대화 내용을 보도한 바 있다.“ -머니투데이-
“버닝썬 사건이 점점 커지고 있습니다. (중략) 그런데 이 폭행 사건을 처음으로 보도한 기자가 있습니다. 작년 12월이었네요, 그때 최초로 보도를 했었고, 그런데 이 기사에 따르면 버닝썬 사건보다 오히려 아레나, 다른 클럽이죠, 옆에 있는 아레나가 훨씬 더 중요하다, 이 사건을 주목해야 된다, 이런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관련된 얘기를 일요시사 박창민 기자와 함께 나눠보겠습니다.” -KBS김경래 최강시사-
“안녕하세요. 한국기자협회 000국장입니다. 제342회 이달의 기자상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중략) 시상식은 오는 3월22일 금요일 오전 11시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 19층 기자회견장에서 열립니다.”
내 인생에서 가장 큰 사건이 일어났다. 지난해 3월 19일 화요일 오후 1시 서울 경복궁 근처. 나는 얼마간 움직일 수 없었다. 심장이 펄떡펄떡 뛰었다. 문자를 수 없이 다시 읽었다. 믿기지 않았다. 혹시 잘못 온 문자가 아닌가 싶어, 한국기자협회에 전화를 걸었다. 수상자 ‘본인이 맞다’고 했다.
전화를 끊고 나도 모르게 눈물이 쏟아졌다. 난생처음 고졸, 마이너언론사 기자, 비주류라는 굴레 속에서 해방감을 느꼈다. 1990년 한국기자협회 이달의 기자상이 제정된 이후 주간신문 기자로서 20년만에 역대 두 번째 수상자가 됐다. 그동안 내가 기자 명함을 들고 다녔지만, 스스로를 기자라고 당당히 말할 수 없었다. 애초에 나는 기자로서 결격사유가 많았기 때문이다.
한국 기자 사회에서 대학을 안 나왔다는 건 치명적인 결격사유다. 시대가 변했다고 하지만 기자는 여전히 엘리트의 직업이다. 대한민국 기자 중 대학을 안 나온 사람은 거의 없다. 진보언론인 한겨레-경향신문조차 고졸 출신 기자는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메이저언론사로 갈수록 SKY출신 같은 고학력자들이 발에 차일 정도로 많다. 대부분 언론사는 공개채용 때 지원 자격조건으로 4년제 대학 학위를 요구했다. 기자가 되기 위해 최소한의 조건이 대졸인 셈이다. 고졸은 기자직을 지원할 자격도 없었다.
대학교 어디 나왔어요?
기자를 대하는 사회적 분위기도 마찬가지였다. 많은 사람이 “오늘 같은 시대에 대학 안 나오는 게 뭐가 큰 흠이냐”라고 말했지만, 그들이 가장 먼저 물어보는 게 “대학교는 어디 나왔어요?”였다. 이 질문이 나올 때마다 말문이 턱 막힌다. 초년병 시절에는 이 질문이 가장 무서웠다. 행여 취재원에게 기자로서 신뢰를 주지 못할까 조바심이 났다.
실제로 그랬다. “대학을 나오지 않았다”라고 답했을 때 사람들의 복잡 미묘한 표정과 흔들리는 눈빛을 나는 수도 없이 봤다. 그러곤 하나 같이 이렇게 되물었다. “대학도 안 나왔는데, 어떻게 기자가 됐어요?”
기자로서 자격 조건은 하나 더 있다. 바로 메이저 언론사 공개채용 시험에 합격하는 거다. 한국 언론사 입사 시험은 ‘언론고시’라고 불릴 정도로 악명 높다. 채용인원도 적어 경쟁률이 수백 수천 대 일에 달한다. 사실 한국에서는 메이저 언론사 공채를 돌파하는 사람만이 진정 기자로서 자격이 주어진다. 기자 지망생들이 언론사 공채에 목숨을 거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기자가 되기 위해 수많은 청년이 최소 수개월 수년을 공부에 모든 걸 쏟는다.
내가 기자로서 자격이 없는 건 공채로 기자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최근에 언론사 공채에 학력제한이 없어졌지만, 여전히 그 벽은 높고도 높다. 한국어능력평가와 공인영어점수 등 각종 스펙이 필수며, 논술, 작문, 상식 같은 무수히 많은 시험을 치러야 한다.
나는 여느 기자 지망생들과 180도 다른 삶을 살았다. 입시에 실패해 대학에 가지 못했다.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노력과 보상이 비례하지 않다’는 걸 알지 못했다. 이걸 깨닫고 나니 공부와 시험 그리고 경쟁이 무서웠다. 더 이상 노력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도망쳤다. 재수를 포기하고, 좋아하는 공부를 한답시고 패션직업전문학교에 입학했다. 또래 친구들처럼 인턴, 동아리 활동, 해외 어학연수, 공인 영어성적, 각종 자격증 등 스펙을 쌓지도 않았다. 자기소개서와 이력서에 들어갈 '한 줄'은 모두 공부와 시험을 필요로 했고, 나는 단 한 줄도 적을 게 없었다.
“공부만이 살길이다.”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과 선생님께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던 말이다. 실제로 틀린 말이 하나도 없었다. 공무원-대기업-메이저 언론사 등 채용 지원 자격조건에 4년제 학위가 필수였으며, 모든 관문마다 공부와 시험이 기다렸다. 내가 지원할 수 있는 메이저 언론사는 많지 않았다. 아니, 거의 없었다.
순전히 나의 잘못이다. 한국사회에서 주류로 가는 가장 공평하고 공정한 건 시험과 공부임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이건 치열하게 살지 않았고, 노력하지 않았다는 명백한 증거다.
대학을 가지 않은 순간부터 나는 사회 부적격자였다. 아무리 스펙을 쌓고 노력한들 학벌을 극복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한국은 학벌사회다 ‘간판이 곧 그 사람의 가치’라는 등식이 여전히 유효하다. 나에게 학벌은 학창 시절 ‘더 열심히’ 살지 않음에 대한 평생 짊어지고 가야 할 업보다. 사회가 나에게 던지는 물음이었고, 제대로 된 답을 하지 못한 벌이다.
스스로 실패한 인생이라고 일찍 인정했다. 결혼, 연애, 내 집 마련, 출산 등 한국사회에서 가장 기본적으로 여기는 것들을 바라지 않게 됐다. 그저 욕심일 뿐이다. 이것들 중 단 하나라도 얻을 자신도, 책임질 자신도 없었다.
이렇게 써놓으니 학벌 콤플렉스에 절어 있는 사람 같지만, 그렇지는 않다. 인생에서 가장 잘한 결정은 누가 뭐래도 대학에 안 간 거다. 대학에 가지 않았기 때문에 기자가 될 수 있었다. 누구나 원하는 평범함을 바라지 않은 대신 단 하나는 절대 놓치고 싶지 않았다. 좋아하는 일을 찾는 거다. 친구들이 스펙을 쌓을 때 ‘원하는 게 무엇이고’ ‘좋아하는 일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고민했다. 이런 과정을 반복해 기자라는 직업에 도달했다.
25살, 우여곡절 끝에 시사주간신문 <일요시사>에 입사해 기자라는 명함을 들고 다닐 수 있게 됐다. 언론계에서는 ‘황색언론’이라는 딱지가 붙는 타블로이드 주간지다. 빨간색과 노란색으로 뒤덮인 표지, 과도하게 큼직한 제목과 선적정인 소재로 사람의 눈길을 사로잡는 삼류 언론사다.
현직 기자와 기자 지망생들 사이에서는 ‘절대 들어가면 안 되는 언론사 중 하나’로 꼽힌다. 매체력, 취재 환경, 처우, 평판 등 하나 같이 좋지 못한 거로 알려졌기 때문이다(이런 소문은 모두 편견일 뿐이다. <일요시사>는 모든 면에서 그 어떤 곳보다 괜찮은 언론사다.)
하지만 나에게는 감지덕지였다. 언론계와 독자는 ‘찌라시’ ‘사이비 언론’ ‘별 볼 일 없는 매체’라고 평가절하했지만, 그보다 못한 이력을 가진 사람에게 기자 명함을 쥐여줬다. 덕분에 세상을 뒤흔든 사건·사고와 특종보도의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2016년 최순실 국정농단 당시 최순실의 남자인 '고영태가 강남 호빠 출신'이라는 사실을 최초로 보도해 일주일간 ‘고영태’와 ‘호빠’를 포털사이트 실시간 검색어 1위에 올랐다. 당시 조·중·동을 비롯해 많은 언론이 이 기사를 인용보도했다. 이 보도가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에 불을 지폈다고도 평가했다.
2018-2019년도에는 승리 클럽 버닝썬 폭행사건 피해자인 김상교씨를 최초로 인터뷰했으며, 클럽 아레나의 경찰-국세청-검찰 커넥션을 8차례 연속 보도해 '강남 클럽 게이트'의 문을 열었다. 이 공로가 인정돼 한국기자협회 이달의 기자상을 받았다.
2019년 구글 인기검색어 TOP10에서 6위를 차지한 남양유업 재벌3세 황하나 마약 사건도 최초 보도했다. 당시 모든 언론사가 내 기사를 인용보도할 정도로 파장이 컸다. 보도 다음날 CBS <김현정 뉴스쇼>에 출연하기도 했다. 이 기사로 남양유업은 제2의 불매운동이 일어났다. 황하나는 구속돼 유죄를 받았다.
이 외에도 세간에 대통령과 총리 동생을 영입해 주목을 받았던 SM그룹 관련 보도는 모두 내 기사에서부터 시작됐다. 2018년 7월 SM그룹이 총리 동생을영입했다는 걸 최초로 보도했으며, 후속취재를 통해 2019년 7월 대통령 동생까지 영입했다는 걸 처음 밝혔다. 이후 조선일보가 내 기사를 사실상 베끼다시피 보도하면서 정치권에 큰 파장이 일었다.
지난 5년간 나름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한 기사를 여러 개 썼다. 이름도 없는 마이너 언론사 기자에게 과분한 특종이었다. 내가 어떻게 이런 기사를 썼는지 지금도 잘 믿기지 않는다. 국민들의 알 권리와 대단한 사명감에 불타 이런 기사를 쓴 건 아니다.
나에게 기자질은 놀이 혹은 게임이었다. 게임은 하다 보면 재밌고, 더 잘하고 싶어 지는 법이다. 남들이 안 쓰는 기삿거리를 발굴하는 일이 게임 퀘스트를 깨는 것처럼 재밌었다. 저널리즘을 알아가는 과정은 마치 게임 세계관을 이해하는 것처럼 흥미진진했다. 그저 경험치를 축적해가며 좋은 기자로 성장하고 싶었다.
또 한편으로는 기자로서 성공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한국 기자 사회에서 내 위치는 그야말로 ‘근본 없는 상놈’에 가깝다. 고졸, 마이너 언론사 기자도 세상을 '씹어 먹을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올해 1월 17일 내 기자 생활에 쉼표를 찍었다. 기자 생활이 싫어진 건 아니다. 만 6년간 쉴 틈 없이 달렸던 탓에 번아웃이 왔다. 주변 사람들은 “참아라” “버텨라” “견뎌라” “다 그렇게 산다”라고 이야기하지만, 그렇게 못 하겠더라. 나약하다고 할 정도로 무언가를 견디고, 인내할 힘이 나에게는 없었다.
견디지 못했기 때문에 나는 비주류가 됐다. 일찍 미천한 자신을 인정했다. 한국사회는 ‘무엇이 되기 위해’서 쏟는 노력과 공부 그리고 시험이 너무 많았다. 진득하게 궁둥이를 붙이고 책상 앞에 공부한다는 게 너무 힘겨웠다. 스스로 내 목을 조르는 기분이었다.
20대 내내 생존에 대한 공포를 느끼고 살았지만, 누구도 사자가 사슴을 잡아먹었다고 탓하지 않는다. 세상은 언제나 그래 왔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오히려 이런 생존 경쟁이 더 심화되고 있다.
'노오력'하고 싶지 않았다. 공부는 더 이상 출세를 보장하지 못한다. 신분상승의 사다리도 끊긴 지 오래다. 좋은 대학을 졸업해 누구보다 노력했던 친구들조차도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라고 한탄했다. 노력을 시키고도 실패하게 만드는 사회 구조는 더욱 공고해졌다. 이 때문에 ‘헬조선’ ‘N포 세대’ ‘삼포세대’라는 신조어가 생겼다. 그래서 나는 그냥 마이너로 살기로 했다
서른 살이 된 지금 나는 학벌과 마이너함에 대해 조금 솔직해지려고 한다. 그동안은 누군가에게 굳이 말하고 싶지 않았다. 심경의 변화에는 지난해 한국기자협회 이달의 기자상을 받은 영향이 컸다. 당시 수상 문자를 본 순간 자신을 짓눌러왔던 감정에서 처음 해방감을 느꼈다. 지금이 아니면 이런 이야기를 공개적으로 털어놓을 기회가 없을 것 같다. 기자생활을 쉬는 동안 나의 이야기를 하나씩 풀어볼까 한다.
막전막후(幕前幕後)란 어떤 일이나 결정의 앞뒤 상황. 또는 드러나지 않은 사실을 뜻한다. 요즘은 거의 쓰지 않은 구닥다리 단어지만, 내가 근무했던 타블로이드 주간지에서 많이 쓰는 용어다. 이 글은 지난 10년간 한 고졸 청년과 B급 기자의 막전막후다. 한국사회에서 학벌의 의미 그리고 언론계의 현실을 고졸 기자 시선으로 바라봤다. 많은 피드백이 있으면 좋겠다. 그저 지난 10년간 내가 겪었던 일들을 최대한 솔직하게 쓰고 싶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