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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cm Jan 30. 2020

<B급 기자 막전막후> 학생도 백수도 아닌....

2010년 3월 대학 캠퍼스가 새내기들의 입학식으로 붐빌 때 나는 서울 강남 한복판으로 갔다. 입학한 패션직업전문학교가 강남 신사동에 건물 하나 달랑 있던 터라 입학식 할 공간이 없었다. 학교 측이 빌린 강남 삼성역에 있는 섬유센터 컨벤션홀에서 입학식이 치러졌다.


홀은 컸지만 컴컴했다. 사방이 검은색 벽으로 둘러싸 있었다. 조명은 비운의 주인공을 떠올리게 할 만큼 주황빛이 감돌았다. 학교장이 축사를 했지만, 잘 안 들렸다. 학창 시절 그렇게도 꿈꾸던 새로운 시작의 순간이었지만, 가슴 벅차지도 희망차지도 않았다.


함께 공부할 신입생들을 둘러봤다. 패션 학교답게 휘황찬란하고 개성 넘치는 친구들이 많았다.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나쁜 말로 그들이 싼 티 나게 느껴졌다. 학창 시절 꽤나 놀았던 ‘일진’ ‘문제아’로 밖에 안 보였다. ‘나는 학교 다닐 때 놀지도 않고, 열심히 공부했는데…’라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신입생들을 위한 점심식사 자리를 마다하고 입학식이 끝나자마자 그곳을 서둘러 빠져나왔다. 머리가 복잡하고 피곤했다.


직업전문학교였지만 나름 대학 흉내를 내는 것처럼 보였다. 신입생이라고 학교에서 엠티를 보내줬다. 서울 근교로 갔는데, 허름한 펜션에 100평 남짓한 공간에서 레크리에이션도 하고 조별로 장기자랑도 했다. 난생처음 취할 때까지 술을 마시며 그 분위기를 즐겼다. 어른이 된 기분이었지만, 술을 마실수록 암울했다.


나와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 동기들의 말투와 행동 등을 보며 멋대로 평가하고 재단했다. 그저 학창 시절 공부도 안 한 불량한 학생쯤으로 여겼다. 단순히 멋 부리기를 좋아해 패션을 한다고 속으로 생각했다. ‘나만큼 패션에 진지한 사람은 이곳에 없다’라는 교만도 부렸다. 그렇지만 술이 오고 갈 때는 웃었고, 그들 이야기에 박수쳤다. 그럴수록 죄책감과 좌절감이 밀려왔다.


내가 생각했던 그림이 아니었다. 작년 이맘때까지만 해도 원하는 대학에 합격하리라 확신했다. 낭만이 가득한 캠퍼스에서 입학식을 치르고 대학 동기들과 꿈을 나누며 밤새 술을 마실 거라고 상상했다. 꿈이라도 꿀 수 있었던 그때가 훨씬 낫다. 재수라는 단어가 내 머릿속을 수천 번 흔들었다. 실제로 입학식에 참석한 일부 신입생은 재수를 한다며, 입학을 취소하기도 했다.


‘나는 너희와 달라’라는 의식에 사로잡혀 있었다. 엠티에 온 신입생들은 모두가 0000패션직업전문학교라는 명찰을 찼다. 나도 한쪽 가슴에 그 명찰을 찼다. 수용소에 끌려와 죄수 명찰을 찬 기분이었다. 그들과 별반 다를 게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들과 함께 앉아 있는 이 공간을 인정하지 못했다.

학창 시절 누구보다 입시에 성공할 거라고 믿었지만 실패했다. 지적이라고 생각했지만 멍청했다. 다르다고 생각했지만 다를 게 하나도 없었다. 시간을 되돌릴 수도, 지금 당장 대학에 갈 수도 없다. 현실과 술기운이 겹쳐 미친 듯한 무력감을 느꼈다. 그날 어떻게 잠들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대학에 입학한 친구들은 바빴다. 술 약속과 대학 동기들과 단체 미팅 등으로 일주일 약속이 꽉 찼다. 나는 전혀 바쁘지 않았다. 어떤 술 약속도, 미팅도 없었다. 직원전문학교에서 만난 동기들과도 거의 술자리를 갖지 않았다. 미팅도 하지 못했다. 대학에 다니질 않으니, 누가 그런 자리를 제안하지도 낄 기회도 없었다.


당시 대인기피증이 있었다.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았다. 나는 학생도 아니었고, 백수도 아니었다. 대부분 사람이 당연하듯 “지금 어디 대학교 다녀요?”라고 물었다. 그 질문이 무서웠다. 그럴 때마다 나는 “패션디자인 학교 다녀요”라고 얼버무렸다. 직업전문학교를 다닌다고는 차마 말하지 못하겠더라. 직업전문학교라고 함은 고등학교 3학년 때 대학 못 가는 친구들이 학교 대신 다녔던 곳이기 때문이다. 집과 학교만 다녔다. 제대로 된 인간관계는 그때 사귀었던 여자친구가 전부였다. 학창 시절부터 원하던 공부를 하고 있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 하루하루를 버텼다.   


학교생활에 적응할 때 즈음 고등학교 때 절친했던 친구에게 연락이 왔다. 오랜만에 얼굴이나 보자고 그러더라. 이 친구는 나름 서울 상위권 대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친구를 만나러 A 대학교 다니고 있었다. 친구를 만나러 A 대학교에 갔다.


A대학교 캠퍼스 정문 앞. 대학생들이 삼삼오오 모여 다녔다. 여유롭고 넉넉한 표정들이었다. 그들 속에 친구가 씩씩하게 걸어 나왔다. 더 멋져진 것 같다. 친구가 학교 캠퍼스를 구경시켜줬다. 곳곳에 심어진 울창한 나무, 크고 작은 호수들이 눈에 띄었다. 캠퍼스 지도가 없으면 길을 잃어버리기 십상이었다. 도심 속에 덩그러니 건물 하나 있는 내 공간보다 친구의 공간이 수백 배는 크고 다채로웠다. 친구의 공간이 부러웠다.


캠퍼스 이곳저곳을 소개하며 학교 전설에 나올 법한 이야기를 해댔다. 대학 CC가 걷다가 다람쥐를 만나면 커플이 된다느니, 캠퍼스에 돌아다니는 고양이가 귀엽다느니 등등 내가 모르는 대학교 생활을 들려줬다. 그 이야기들도 부러웠다.


친구가 캠퍼스에 있는 계단에 관해 이야기한 적이 있다. 명확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내용은 이렇다. A대학에는 ‘바보 계단’이라는 게 있다. 모름지기 계단은 한 발만 떼면 위 계단을 밟을 수 있지만, 이 계단은 한 발 떼기도 뭐하고 두 발 떼기도 뭐한 애매한 크기로 만들어졌다. 건축공학적으로 잘못 지어진 계단이라고 하더라. 그래서 바보 계단이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친구의 박식함에 놀랐다. ‘역시 대학을 다닌 친구는 다른 건가.’라고 속으로 생각했다. 친구에게 물었다. “이런 거는 어떻게 알았어?” “새터에서 알려줬어.” “.....”(나는 당시 ‘새터’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다시 돼 물었다. “새터가 뭐야?” “아~ 새내기 배움터라고 신입생이 들어오면 학교 선배들이 캠퍼스 생활을 설명해 주는 자리야.”


사용하는 언어가 달라질수록 각자의 상황이 달라진다는 걸 깨달았다. 친구는 대학생이고, 나는 학생도 백수도 아니었다. 직업전문학교에 다니고 있는 고졸일 뿐이다.

이 이야기를 듣고 또다시 절망했다. 새터라는 단어를 이때 처음 알았다. 나와 친구 사이 언어의 괴리가 생겼다. 사용하는 언어가 달라질수록 각자의 상황이 달라진다는 걸 깨달았다. 친구는 대학생이고, 나는 학생도 백수도 아니다. 직업전문학교에 다니고 있는 고졸일 뿐이었다. 친구들이 대학을 다니면서 경험하고 있는 것들을 나는 전혀 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에 형용할 수 없는 패배감을 느꼈다.


나는 홀로 바보 계단에 서 있었다. 이 계단은 고칠 수도 물릴 수도 없다. 머리가 복잡했다. 대학에 가는 게 옳은 일이지만, 공부를 다시 하기는 죽기보다 싫었다. 내가 과연 대학을 극복할 수 있을까. 비루했다. 학창 시절 성공에 대한 야망으로 불탔던 나는 어느새 생존의 불안에 떨고 있었다.


그날 친구를 만나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곤 주저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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