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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cm Jan 29. 2020

<B급 기자 막전막후> 완벽한 실패

지원한 대학에 다 떨어졌다. 예비가 있었지만, 50번대였다. 재수를 할까 고민했지만, 패션직업전문학교에 가기로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패션 디자이너가 되고 싶었다. 중고등학교  시절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패션디자이너 150인을 소개한 책 ‘Fashion Now’를 항상 가방에 넣고 다녔다. 이 책은 영어로 된 예술 전문 서적이다. 틈만 나면 이 책을 폈다. 영어를 잘해서 읽었던 건 아니다. 사전을 찾아보며 한 문장 한 문장 해석했다.


그들이 어떤 커리어와 과정을 거쳐  이토록 중요한  패션디자이너가 됐는지 궁금했다. 책에 간간히 일본인과 중국인 패션디자이너가 소개돼 있었지만, 한국인은 없었다. 수십 년 후 한국인 패션디자이너로서 저 책에 '이름 석자를 남기리라'라는 야망을 품었다.


학창 시절 패션이 너무 좋았다. 세계적인 패션 브랜드의 역사와 그곳에서 근무하고 있는 수석디자이너의 이름과 이력을 줄줄이 꿰고 있었다. 교과서에는 수업시간 필기보다 머릿속에 있는 패션디자이너와 패션브랜드 이름을 이열종대 줄 세워 써 내려 간 낙서가 더 많다.


패션직업전문학교를 가겠다는 아들의 결심에 부모님은 말이 없으셨다. 안다. 얼마나 속이 쓰릴지.


부모들은 삶의 성적표가 자신이 아닌 자식이라고 했다. 자식이 대학 갈 때, 취업할 때, 결혼할 때 이렇게 총 세 번의 인생 성적표를 받는다고 하더라. 자식이 얼마나 잘 되느냐에 따라 점수를 매긴다. 나는 부모님의 첫 번째 인생 성적표에 낙제점을 안긴 불효자였다.


부모님과 학원 선생님은 재수를 권했다. 학창 시절 공부를 아주 등한시한 학생은 아니었다. 중학교 3학년  기말고사에서 전교(220~230명) 18등을 했다. 물론 아주 우수한 성적도 아니다. 성실히 공부한 학생 정도는 됐다는 의미다.


고등학교 때는 패션디자인과 진학에 맞춰 미대 입시를 준비했다. 그림도 나름 열심히 그렸다. 미대 입시에 필요한 언어와 외국어, 사탐 과목 성적도 나쁘지 않았다. 언어를 빼고는 2~3등급을 꾸준히 유지했다. 학창 시절 미련 없이 공부하고 그림을 그렸지만, 입시에 완패했다.


2004년 7월23일 오전 8시에 찍었던 'Fashion Now' 책 표지다. 중학교 3학년이었다. 이 사진을 핸드폰 배경화면으로 해놓았던 기억이 있다.


패션직업전문학교를 가겠다고 했을 때 많은 사람이 말렸다. 평생 고졸 꼬리표를 다는 것보다 1년 재수해 대학을 가는 게 인생에 훨씬 이롭다고 했다.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과 학교 선생님 그리고 어른들께 고졸의 삶은 비참하다고 배웠다.


고졸이 가질 수 있는 직업은 거의 없다고 했다. 공부 안 하면 공장에서 일하거나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노가다꾼이 된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다. 이런 일을 하는 사람들은 일찍 병들어 죽는다고 겁도 줬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른들은 육체노동을 경멸했던 것 같다.


초등학생 시절 우리 집은 분식점을 했다. 여름이면 어머니는 낡은 샌들을 신고 자전거로 배달하러 다녔다. 매일 밤 10시 장사를 마치고 돌아오시면 쩍쩍 갈라진 발뒤꿈치를 매만지며, 초죽음이 됐다. 그럴 때마다 어머니 발을 주무르며, 가게를 떼려치우라고 성냈다. 어머니는 퍼질러 누워 매번 “공부 열심히 안 하면 엄마처럼 산다”라고 힘없이 말했다.


학창 시절 엇나가지 않고, 성실히 공부했던 건 어머니처럼 분식점을 하고 사는 게 불행한 삶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고졸이 얼마나 불행한지 듣고 자랐지만, 다시 공부할 자신은 없었다. 입시에 실패하면서 '노력과 보상이 비례하지 않다'는 걸 알았다. 노력에 대한 보상이 따르지 않은 게 더 비참할 것 같았다. 내 지능이 떨어진다는 걸 인정했다. 공부로 누군가와 경쟁해 이길 자신도 없다. 매번 시험을 치르는 것도 엄청난 압박이었다. 고3 때 수능 모의고사를 치른 뒤 채점할 때마다 손이 덜덜 떨렸다. 그저 공부와 시험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 탈출구가 패션이었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곳은 전라남도 광주다. 정원 미달된 학과를 골라 지원했다면 지방대라도 갔을 텐데, 기어이 서울에 있는 패션직업전문학교에 입학하겠다고 했다.

허영심만 가득한 나는 모로 가도 서울에 가고 싶었다. 직업전문학교였지만, 학비는 서울권 사립대만큼 비쌌다. 나는 부모님께 두 번째 불효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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