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지금까지 글을 써왔던 건 좋았기 때문이었구나. 글을 쓸 때 나는 가장 편안하고 행복했구나.’
사실 그동안 왜 글을 썼는지 알지 못했다. 중학교 때 부모님 등쌀에 떠밀려 다닌 공부방에서 처음 글을 썼다. 믿기지 않겠지만, 선생님과 어머니는 내가 글을 잘 쓴다고 했다. 당시는 공부방 선생님의 상술과 자식 사랑에 눈먼 부모의 칭찬이라고 치부했다.
어머니가 내 글을 좋아했다. 공부방에서 글쓰기 숙제를 많이 내줬는데, 어머니는 식탁에 앉아 그 글을 흐뭇한 표정으로 읽곤 하셨다. 특히 가족 수필을 쓸 때면 내 글을 파일에 꽂아 고이 간직하셨다. 어머니는 글쓰기가 가장 어렵다고 했다. 아들이 글을 쓸 때마다 신기하고, 좋다더라. 어머니는 시도 때도 없이 소재를 던져주며, 글을 써보라고 했다. 고등학교 진로 상담을 할 때는 내가 글 쓰는 일을 하길 바랐다.
어머니의 바람을 단칼에 잘랐다. 당시 나는 패션디자이너가 되고 싶었다. 어머니가 매번 던져 주는 글쓰기 소재가 어느 순간 '글을 써라'라는 무언의 압력으로 느껴졌다. 반항심이 생겼다. 어머니의 바람을 접게 하려고 글을 안 썼다. 또 억지로 무언가를 쓰고 싶지도 않았다. 그 시간에 <아레나>와 <에스콰이어> 같은 남성잡지를 보는 게 더 좋았다.
그런데 이상하게 글은 항상 나를 따라다녔다. 고등학교 때부터 일기를 썼다. 당시 일기를 쓴 건 학창 시절 열심히 살았다는 증거를 남기고 싶어서였다. 군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일기를 쓰고 책을 읽고 독서록을 썼다. 군대는 워낙 할 일도 없고, 할 수 있는 게 이것밖에 없었다고 치자.
체코에서 부다페스트로 가는 기차 안에서 나는 또 무언가를 노트에 긁적였다. 어떤 내용을 썼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내 머릿속에 있는 모든 걸 토해냈을 거다. 여행을 다니며 느낀 점을 썼거나, 나의 감정과 앞으로 해야 할 일에 대해 적었을 테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왜 내가 글을 쓰고 있지?’ 이상했다. 글을 쓰고 있는 자신이 낯설었다. 처음 있는 일이다. 어렵게 혼자 온 유럽까지 와서 내가 글을 쓰고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건 깨달음이었다.
나는 글 쓰는 걸 좋아했다. 학창 시절부터 이 순간까지 글을 썼지만 그 이유를 제대로 알지도 못했고, 생각조차 안 했다. 그저 피상적인 이유들 뿐이었다. 그런데 그 기차 안에서 처음으로 자신이 글을 쓸 때 가장 편안하고, 행복하다는 걸 알았다.
지금까지 내가 글을 쓴 이유가 수긍이 갔다.
돌이켜 보면 글쓰기는 씻고, 밥 먹고, 잠자고, 화장실 가는 것과 비슷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일상이었다. 나는 단 한 번도 글을 진지하게 대한 적이 없었다. 매일 이어폰을 꽂고 음악을 듣는다고 해서 우리가 음악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과 비슷하다.
하고 싶은 걸 찾았다. 용준이 때문에 패션을 포기하면서 목표(?)를 상실했다. 목표라기보다는 ‘좋아하는’ 걸 잃었다. 군대에서 ‘내가 좋아하는 게 무엇일까, 하고 싶은 게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반복했지만, 뚜렷한 답을 내리지 못한 상태였다.
결심한 건 있었다. ‘하고 싶은 건 무엇이든 경험해 보자. 어차피 실패한 인생 밑질 것도 없다. 좋아하는 걸 하고 살자.’ 혼자 유럽을 온 것도 군대에 있으면서 ‘꼭 하고 싶은 경험’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곳에서 ‘좋아하는’ 걸 찾았다. 놀라운 자기 발견이었다. 예상치 못한 엄청난 소득(?)이었고, 기뻤다.
허탈하면서 미소가 지어졌다. 달리는 기차 창밖을 바라봤다. 기차는 너무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았다.
펜을 내려놓고, 창밖을 바라봤다. 기차는 너무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달렸다. 우중충한 구름 사이로 서광이 드리웠다.
코로 숨을 깊게 들이마셔 입으로 크게 내뱉었다. '휴우~' 누가 보면 근심 가득한 한숨이겠지만, 나는 안도했다. 한국에 돌아가 당장 하고 싶은 일이 생겼다.
가장 찾고 싶었던 ‘것’이라는 게, 가장 가까이 있었다. 한 번도 의식하지 않은 일상이 내 모든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