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당시 넌.... 음... 속된 말로 대표랑 편집장 따까리 같았다."
한국에 돌아와 내가 쓴 글을 다시 읽었다. 글이라고 할 수 없었다. 낙서장이나 마찬가지였다. 가장 기본적인 맞춤법도 지키기 못했다. 비문도 많았다.
나조차 이해하기 힘든 글들을 적어왔다. 이런 글쓰기는 잘못된 거다. 최소한 글이라는 건 어쨌든 누군가 읽었을 때 이해는 되게 써야 한다. 내 글은 지나치게 추상적이고, 감정적이었다.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부끄러운 글이다.
내 글이 마음에 안 들었다. 글을 배우고 싶었다. 논리적인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차갑고, 이성적이고, 객관적인 글이 멋져 보였다. 이런 글을 어디서 배울 수 있을까. 글을 쓰는 직업들을 찾아봤다. 많지 않았다. 하지만 가장 확실한 곳이 있었다.
언론사였다. 특히 ‘신문’은 바라던 글쓰기를 배울 수 있는 최적화된 곳이었다. 패션 에디터라는 직업이 떠올랐다. 비록 패션 디자이너의 꿈을 접었지만, 다른 분야로 패션 업계에서는 일할 생각이 있었다. 글을 쓸 수 있는 패션매거진에서 인턴을 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2013년 3월 23살 패션직업전문학교에 복학했다. 학교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 학교에 마음이 떠난 상태였다. 공부보다 일거리를 찾아다녔다. 틈만 나면 인터넷으로 패션매거진의 인턴, 알바 자리를 뒤졌다.
이쪽 분야 일자리는 희소했다. 있어도 나는 지원할 수 없었다. 인턴의 경우 대부분 4년제 대학교에 다니는 재학생들이 대상이다. 무급으로 일할 마음도 있었지만, 그 기회마저도 자격이 필요했다.
인터넷을 뒤지다가 한 청소년 진로월간지에서 대학생 에디터를 모집한다는 공고를 봤다. ‘대학생’이라는 단어가 걸렸지만,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지원했다. 아무런 기대를 하지 않았다.
며칠 뒤 면접을 보러 오라는 연락이 왔다. 면접관들은 나보다 한두 살 많은 대학생이었다. 이 매체 대표가 대학생으로 청년 창업가였다. 어떤 질문을 했는지 기억나진 않는다. 합격했다. 10여 명의 대학생과 에디터로 활동할 수 있게 됐다. 대학교에 안 다니는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물론 무급이었다.
그래도 기뻤다. '글을 배울 수 있겠다'는 기대감이 컸다. 대표는 새로 뽑은 대학생 에디터를 대상으로 워크숍까지 했다. 대학생 기자증과 향후 에디터 수료증 등을 발급해준다고 약속했다. 스펙 한 줄을 덤으로 얻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편집장은 연합뉴스 인턴기자 출신이었다. 당시 이 편집장이 굉장한 사람인 것처럼 느껴졌다. 언론에 대해 잘 몰랐지만, 연합뉴스만큼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자신이 연합뉴스 인턴 시절 이야기를 자랑스럽게 무용담처럼 늘어놓곤 했다. 내가 모르는 세계여서 그런지 그 편집장의 이야기가 실로 대단한 경험으로 다가왔다.
에디터 활동은 길지 않았다. 함께 들어온 대학생 에디터들이 왠지 모를 이유로 하나둘 그만뒀다. 그러다 두 달 만에 대학생 에디터 체제는 사실상 해체됐다. 얼마 후 회사는 경영 악화로 휴간에 들어갔다. 아마 내가 그곳에 가장 마지막까지 남은 사람 중 한 명이었을 게다. 직장을 잃은 기분이었다. 기자증과 수료증도 받지 못했다.
몇 년 뒤 함께 에디터 활동했던 동생을 만났다. 그 동생이 이야기하길 당시 내가 참 순진하고, 바보 같았다고 하더라. 대표랑 편집장에게 “왜 그렇게 굽신굽신했냐”라고 타박하듯 물었다. 이 말을 듣고 조금 놀랐다. '나는 한 번도 누군가에게 굽신굽신한 적이 없는데?'
이 동생 왈. 대표가 어린 대학생들에게 스펙을 준다고 유혹한 거다. 열정페이(?)로 싸게 어린애들을 돌려 회사를 운영했다. 편집장은 대단한 거 하나도 없고, 허세나 부리는 그런 사람이었다. 좋은 사람들도 아니었는데, 왜 그렇게 내가 그 사람들 말에 고분고분하고 따랐느냐였다.
또 다른 형도 이 동생과 비슷한 지적을 했다. 이 형 왈. 그때 넌.... 음... 대표랑 편집장 지키는 호위무사? 속된 말로 '따까리' 같았다.
의식하지 못했지만, 실제로 나의 단면이었다. 군대에서 자기객관화를 과정에 이런 인식이 정립됐다. '기회가 왔을 때 나는 절대 실수하면 안 된다.' '나는 절대 모나면 안 된다. 그랬다간 어렵게 잡은 그 기회가 사라질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을 불편하게 해서는 안 된다'.
이런 의식이 행동에도 고스란히 배어 나왔다. 내가 '따까리 같았다'는 그들의 주장에 선뜻 수긍이 간 이유였다.
실제로 나는 대표와 편집장에게 이런 부정적인 면을 전혀 보지 못했다. 그곳에서 글을 배우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들의 지적과 훈계를 다 소화하려 했다. 적어도 그들은 나보다 많이 배우고, 똑똑한 사람들이었으니깐.
또 한 편으로는 그들에게 고마움도 있었다. 대학생도 아닌 내가 이 공간에 있다는 것 자체가 소중한 경험이었다. 대학도 안 나왔지만, 그들은 나를 뽑아줬다. 그래서 매일같이 사무실에 나와 무엇이든 하려고 했다.
나에게 절박함은 다른 말로 비굴함이었는도 모르겠다.